지난 주말에 확밀아를 지웠습니다.
의외로 중독성은 별로 없는지 아직까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문득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생각나 원전을 찾아 고쳐봤습니다.
그다지 게임에 관련된 것도 아닌 것 같고, 유머가 될만큼 재미가 있지도 않아 자유게시판에 올려봅니다.
이래놓고 지난 주말부터 괜히 디아블로3를 다시 시작해서 골드라도 현금으로 좀 사볼까 하는 건 유머.. 일까요?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확밀아를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하지 않았다. 할 만큼 하다가 내 폰에서 앱이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갔다. 그런데 게임 하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게임에 소용되는 아이템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플레이에 의해서 카드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카드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카드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올해 봄까지 확밀아 게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플레이 했었다. 6개월 전 크리스마스, 딱히 할일이 없었을 때 어떤 네티즌이 게시판에서 추천해준 것이다. 앱에 돈을 써본 적이 없는 거처라 할만한 게임이라고는 확밀아뿐이었다. 그 게임을 위해 관계 자료을 찾아다 읽었고, 카드들의 획득을 위해 홍녹차뿐 아니라 인자 방어용으로 페이크카드까지 구매하여 설치하기도 했었다.
알람이 울리면 번개같이 폰을 꺼내 숟가락를 얹어 주어야 했고, 매일 친구 접속현황을 체크해서 최근접속 3일이상 친구는 칼같이 삭제하기도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키운 보람으로 추천덱 공체합은 50만을 넘어섰고 리더 일러는 아서콜 보상카드로 도배가 되었으며 내 덱을 본 사람마다 앞다투어 친추를 해대곤 했다.
지난 봄 추위가 풀린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구름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봄내음이 가득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벌써 접속을 안한지 세시간이 지난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가득 차서 썩어 넘쳐갈 AP와 BP가 눈앞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폰을 꺼내 확밀아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숟가락을 올리지 못한 요정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안타까워하며 막 방생된 각요에 숟가락부터 올리려 했지만 풀덱으로 때려 좋아요로 욕만 들어먹었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게임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확밀아를 하면서는 일에도 전념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운전을 할 때도 신호대기 때 요정이 있나 되도록 자주 폰을 들여다보아야 했고, 굿나잇 딜을 하고 자려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비스크 숟가락을 얹고 잠이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그간 쌓인 가챠가 꽤 되었기에 선뜻 다 긁어버렸다. 넘치는 현란형과 멀녹선을 확인하고 앱 삭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듯 홀가분한 해방감. 반년 넘게 함께 지낸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확밀아를 통해 무소유의 의미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밀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노가다를 하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이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드랍 카드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홍차를 지르고 가챠를 질러 배수카드를 소유하려 든다. 가챠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수백만원의 과금도 불사하면서, 카드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확밀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친구들이 오늘에는 좋아요로 맞서게 되는가 하면, 막타가지고 서로 으르렁대던 사람끼리 친구추천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 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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