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에 빠졌던 폰에서 건진 사진들을 추가했습니다. 근데 두 장 밖에는 못 올리는군요.위의 사진은 목포 마리나에서 출항한 배가 목포 대교를 지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오른쪽에 튄 물방울 보이시나요? 돛으로 가는 요트가 낭만스럽다면 엔진의 힘을 빌린 보트는 가슴이 뻥 뚫어지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울돌목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크고 거대한 조형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웬지 이 동상은 크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할 얘기는 지난번에 다 했으니까 마지막에 느꼈던 짤막한 감정들을 적어보겠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답사를 기획하는 일은 절대 쉬운게 아닙니다. 잠자리부터 식사, 그리고 비용문제까지 모두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죠. 운이 좋게도 다들 불평불만 없이 도와준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잘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전 답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답사가 끝나고 나서야 그 날이 5월 18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저는 우리 모두가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3척의 배로 조선의 운명을 구한 이순신에게, 그리고 광주의 그날에게 말이죠. 조류를 느끼기 위해서 속도를 최대한으로 늦춘 보트는 10노트의 속도로 명량을 떠밀려갔습니다. 그런 거칠고 험한 바다에서 열 배가 넘는 적과 맞서 싸우던 이순신 장군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배에 서 있기도 힘들었으며, 어머니는 자기를 만나러 오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같던 조선 수군은 하루 아침에 전멸 당해서 한 줌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적은 너무나 강하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울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분명 도망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이 역사를 움직인 순간을 꼽아보라면 그날의 명량을 자신의 바다로 만들었던 상처투성이의 한 남자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진압군이 들어오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저항을 포기 하지 않았던 그날의 광주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피가 역사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역사는 대가 없이 전진하지는 않습니다. 피와 죽음, 그리고 끔찍한 시행착오끝에 나아가죠. 우연찮게도 이름 없는 시민들이 독재에 맞서 싸우던 그날, 명량의 그 급류 위에서 서 있었던 저는 온 몸으로 역사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전율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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