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 뒷 모습! 한 눈에 들어오는 남보다 넓은 등에 카키색 점퍼. 그녀의 눈에 익숙한 뒷 모습이었다. 분명히 그야!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저 넓은 등짝을 때리거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인사하지 못했다. 그는 아직 나와 어색한 사이니까. 그런건 아직 하기가 조금 그래. 그녀는 우리 사이에 꽤 넓은 강이 놓여 있음을 느꼈다. 아직까지 서로의 손을 강 건너에서 잡아주기는 커녕, 눈이 마주쳐도 그저 모르는 사람처럼 강물을 따라 걸어갈 그런 사이. 말하자면, 별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에 대한 정의할 수 없는 헷갈림이 그녀에게서 용기를 빼앗았을지도 모르겠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는 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이 동네에 그가 올 리가 없지. 왜 여기 있겠어? 그는 아직 퇴근할 시간도 아니라구! 그제서야 그녀는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 흰 색의 횡단보도와, 깜빡이는 녹색불이 겨우 제 위치를 찾았다. 세상에 닮은 사람은 여럿이니까. 그녀는 그러고보니 이제까지 그의 뒷 모습을 잘 안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냥 카키색에 넓은 등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많고 많았을텐데. 조금 들뜬 기분에 속내를 전부 들킨 것 같아서 발가벗은 듯한 수줍음이 얼굴로 올라왔다.다행히 고운 피부가 빠알간 홍당무로 되어버리기 전에 구원의 전화가 드르륵하고 주머니에서 울렸다. 아까보다 그의 거리가 꽤 가까워 졌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퇴근을 한 시간 당겼다. 마침 CGV 공짜표가 생겼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거든. 버스를 타고 용산에 내렸다. 용산은 예전과는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낡은 건물들에는 전부 붉은 색으로 '폐업' 따위의 글씨가 써 있고, 허허벌판 같은 공터가 늘어났다. 그 곳에는 각종 노점들이 초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듯 했다. 그에게 있어서 용산은 어릴 적 전자상가의 추억부터 스타리그를 보러 온 기억까지, 도시 속의 낭만이 서린 정취가 있는 동네였다. 그것은 인사동 같은 곳과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낡은 건물과 정비되지 않은 골목길 이전에 그 거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주는 느낌이 좋았었다. 새삼 원색 가득한 '다방'같은 간판이 싹 없어진 동네를 보자 조금 허전했다.
그래도 2013년이다. 21세기의 호들갑 하고도 벌써 10년이 넘게 지난 셈이다. 변화란 점진적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한 번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마냥 짠! 하고 앞에 탁 놓이는 것이다. 그는 그런 생각들이 좋았다. 왠지 옛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자신이 뿌듯했다. 그건 변화의 순간에 대해 조금 더 다양한 감상을 느끼게 해 주기도 했다. 그런 엉뚱한 상념을 깨운 것은 이 곳에서 들리지 않을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 목소리가 좋았다. 차분하고, 높은 톤 대신 조금 더 따뜻한 느낌. 어? 근데 이 목소리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있다. 엥? 어? 엥? 나는 잘못 봤나 싶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가 다시 한 번 휙 하고 또 돌렸다. 맞다. 그녀가 확실하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횡단보도에서 멈칫 하고 서로를 마주봤다. 그녀가 황급히 전화기를 끈다. 앗, 그렇게 통화를 끊지 않아도 되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여기 그녀가 있을까? 우연도 신기하네. 우리는 매번 마주칠 때마다 우연이다. 벌써 몇 번째지? 우리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나요? 하고 묻고 싶었다. 물론, 기쁘니까.
학교에서 그녀와 처음 말을 나눴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열풍이었던 애니팡의 점수가 나보다 몇 배는 높은 것을 보고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었다. 그 뒤로 우리는 종종 마주칠 때마다 가볍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알고보니 나이도 한 살 밖에 차이가 안 났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어느새 나도 그녀도 처음 인사할 때의 이름따위는 잊어버렸을 테다. 우리는 특별히 만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자주 마주치고는 했다. 대화는 언제나 약간은 어색했고, 조금 더 즐거웠다. 우리의 첫 인사가 좀 더 자연스러워 지는 만큼 그녀의 흰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갸름한 코, 동글동글한 턱선, 말똥말똥 뜬 눈은 태어난 아기가 그대로 어른스럽게만 변한 것 같아서 볼 때마다 귀여웠다. ..어, 그러니까. 그냥 귀엽다는 소리다. 아기가 어른되면 그냥 어른이 된 거구나.
어쨌거나, 우리는 신기하게 밖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래도 그건 퇴근길이나, 아침의 출근 버스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연이여도 납득이 간다고 해야하나? 학교에서 마주칠 때야 교내가 아무리 넓어도 교내니까. 하는 이유도 있었고. 오후에 잠깐 조교로 일 하러 나오는 곳에 내가 있으니까 마주치는건 당연한거고. 그래도 벌써 대여섯번은 족히 마주친 것 같다. 서로 출퇴근 시간도 다르고, 학교도 무지무지 넓은데 신기하게.. 생활리듬이 비슷한걸까?
처음 마주칠 때 그녀에게 한 눈에 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대화를 하면서 그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이것 저것 물어봤을지도 모르겠다. 애인 있어요? 좋아하는게 뭐에요? 시간있어요? 연락처 좀 줄래요? 그런데 이놈의 우연은 정말 일주일에 두세번이 터지는가 하면 이주 넘게 아무일도 없기도 했다. 그렇게 우연이 자주 겹치다가도 뜸해지고나면, 우리의 거리는 가까워 진듯 그렇지 않은 듯 평행선처럼 떨어진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린 친구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친구가 아니어서 더 좋긴 했지만. 생각이 다 정리되기도 전에 그녀는 황급히 내 쪽으로 뛰어왔다. 어, 안 뛰어도 되는데. 평소의 희고 고운 피부가 약간 홍조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초저녁의 어스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인사다. 듣는 사람까지 들뜨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이런 우연도 오래간만이다. 반가움이 앞섰다.
"아..네! 우와, 어?!"
그녀는 놀란 나를 보며 웃었다. 왜 용산에 있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내 반응만으로 맘 속이 들여다 보였는지 냉큼 대답했다.
"저 이 근처가 집이에요 바로 저쪽...집 쪽에는 번화가가 없어서 보통 여기까지 나오거든요. 근데 이 시간에 아직 학교에 계신 시간 아니세요?"
"아! 오늘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공짜 표도 있겠다 혼자 버스타고 그냥 왔죠.. 파란거 타면 한번에 오더라구요. 조금 일찍 나왔어요."
혼자 영화를 보러 온게 괜시리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여자아이 앞에서 뭐든 완벽해 보이고 싶은걸까? 하고 생각하니 입고 있는 옷이 맨날 그게 그거라는 사실이 좀 더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러시구나.."
대화가 평소보다 조금 더 어색했다. 짧게 자른 머리를 긁적이며 무슨 말을 해야할까 단어를 찾아보았다. '와! 근데 진짜 신기하네요. 어떻게 여기서 딱 마주치지?' '그러니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웃는 모습이 참 맘에 들었다. 치열이 굉장히 고르게 나 있었다. 잠깐 빤히 바라보다가 또 분위기가 어색해 지는 것 같아서 '영화 좋아해요?' 라고 물었다. 그녀는 한동안 바빠서 영화관 가본지도 한 세월이라고 한숨을 푹 쉬었다. 대화를 주고 받으며 cgv가 있는 용산 아이파크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간 긴장되어 뻣뻣했던 어깨가 조금 편해졌다. 나는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