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딱히 약속이 없으면 해가 지기 전에 잠을 잡니다. 야간알바를 해야 되기 때문이죠. 때로는 술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열시 반에 알람을 맞춰 놓긴 하는데 간혹 깜빡하거나 그대로 자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녁 알바랑 오십분 되면 확인 카톡 해주기로 약속했죠. 정말 코 앞이라서 늦지는 않습니다. 늦게 일어날수록 부시시한 폐인의 모습이 되긴 하지만요.
아무튼 일부러 자는것이니만큼 제대로 자기 힘들고 꿈도 이상한 걸 꾸다 몸이 찌뿌둥한 채로 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일할 때 안 자려면 그 때 자 둬야죠.
새벽 두시 이십오분, 물건이 들어옵니다. 먹고 마실 것들이죠. 손님 없을 시간대긴 한데 희한하게 이럴 때면 갑자기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늘 그렇죠. 청소할 때나 화장실 갈 때나... 제가 담배를 많이 피울수록 매상이 오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때쯤 오는 손님들이야 다 비슷합니다. 술 먹고 오거나 술 더 사가거나, 피씨방에서 놀다가 집에 가는 길에 들르거나죠. 커플들도 참 많이 옵니다. 한밤중에 편의점 오는 거 무서운 건 아는데 그럴거면 남친 시키면 되지 왜 그 짧은 시간의 헤어짐도 거부하는 거랍니까. 그나마 외국인은 혼자 오거나 친구들이랑 오니 낫습니다. 가게 앞에 외국인 기숙사가 있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손님 받으며 물건을 정리합니다. 다 끝나니 두시 오십오분쯤 됐네요.
꽤나 바빴던 모양입니다. 그제서야 눈치채다니요.
손님 없을 땐 폰으로 노래를 듣습니다. 심심하잖아요. 가게에서 기본으로 틀어주는 노래들은 제 취향 아니구요. 그렇게 폰을 들고다니다 아무데나 놔두기도 하죠. 보통 노래가 들리니 까먹을 리는 없구요. 손님이 갑자기 왔을 때 좀 매니악한 노래가 나오는 게 좀 문제일 뿐이죠. 사쿠란보처럼요. 물론 전 일본 가요일뿐이니 당당히 들었지만요.
근데 그 폰이 없어졌습니다. 손님 와서 노래를 꺼놨고 그대로 잊고 있었던 거죠. 배터리가 많지 않아 노래만 들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아니라면 중간중간 슬쩍 봤겠죠.
아무래도 누가 자기 거라고 착각해서 들고 간 모양입니다. 이거 참 ㅡㅡa 난감해졌군요. 급히 가게전화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연결을 잘못해서 배터리가 다 나갔더군요 orz 타이밍 죽입니다. 다른 손님한테 빌릴까 했는데 이럴 땐 또 아무도 안 오죠.
뭐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했죠. 인터넷 되고 게임 되고 알람도 되는 신묘한 물건일 뿐이니까요. 이 오밤중에 저한테 연락할 사람도 없구요. 그렇게 급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원래 잃어버린 물건도 필요없어질 때 찾게 되는 법이죠. 마음을 놓으니 폰이 돌아왔습니다.
예상대로였습니다. 술이 살짝 들어간 상태로 오셨던 분이었죠. 단골까진 아니었지만 몇 번 본 기억이 납니다. 카스 레몬과 오징어집을 주로 사갔죠. 살짝 섞여나오는 경상도 억양 덕에 더 쉽게 기억하고 있었구요
죄송하다고 하길래 괜찮다고 했습니다. 뛰어온 것 같아서 되려 미안해지더군요. 굳이 지금 돌려줄 필욘 없었는데... 확인해보니 역시 온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고도 딱히 뭘 사는 것도 아니면서 머뭇거립니다. 저로선 그걸 보고 있기도 그렇고 딱히 말할거리도 없어서 포스기만 보고 있었죠. 그렇게 한 이삼분? 뜬금없는 말을 꺼내더군요.
"혹시 pgr 하세요?"
...!?
어찌보면 당연한 질문입니다. 잠금해제하면 첫 화면이 피지알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건 피쟐러 내에서만 당연한 거죠. 그렇다면?
... 무슨 말을 할까요. 다른 데서는 아.. 아닙니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혹시라고 했지만 확신에 가득찬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로그인 돼 있었으니 제가 누군지도 당연히 알고 있더군요. orz
아직 가입한 지 얼마 안 돼서 글 쓰기까진 몇 주가 더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도 눈팅 몇년간 해왔다 하니 피쟐러라는 게 변하진 않겠죠. 저도 그 분도 이렇게 우연히 피쟐러를 만나게 된 건 처음이었습니다.
참 신기했고 반가웠습니다. 한 시간 정도 수다 떨었죠. 할 얘기는 많았습니다. pgr 얘기 게임 얘기 야구 얘기 등등... 후배라서 학교 요새 어떤지도 얘기했구요.
그래도 여자분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을 순 없죠. 밤도 너무 늦었으니 보냈습니다. 다음엔 낮이든 저녁이든 맨정신으로 보자고 하면서요.
생각해보면 참 재밌습니다. 헌팅한 적도 받은 적도 없지만 보통 전화번호를 따 가는 것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아예 폰을 가져가 버리네요 (...)
이걸 피쟐에 올릴까도 얘기했습니다. 재밌으니 올리긴 올리자고 했죠. 하지만 친목질 문제가 걸릴지도 모른다고 얘기해뒀죠. 그래도 그냥 썩혀두긴 아깝죠. 아 창피하니까 외모 묘사는 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저로선 매우 아쉬운 부분이네요.
이런 식으로 써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재밌기는 할건데 이런 댓글이 달릴 가능성이 높으니 감안해야 된다고도 했죠. 그게 싫다면 그냥 피쟐러 우연히 만났다는 쪽으로만 쓰겠다구요.
상관없다는군요. 아예 생겼다는 쪽으로 써도 된댑니다. 아이구 그런 위험한 말씀을...
일단 약속을 정하고 먼저 일어나는 쪽이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아침이 오는 소리에 잠이 들고 따가워지는 햇빛을 느끼며 잠에서 깰 겁니다. 그런 게 영 싫었는데 이번은 좀 다를 것 같네요. 깨고 난 다음이 다를 테니까요.
카톡이 왔답니다. 일어나야 될 거 같은데 역시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한 이삼분 지났을까, 전화가 오네요. 나 아직 자고 있는 중인데 봐주면 안될까요.
어기적거리며 전화를 받습니다. 역시 자고 있던 거였냐면서 늦기 전에 나오랍니다. 알겠다고 했죠.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서둘러야 했습니다.
카톡을 확인해 봅니다. "자고 있는 거 아니죠? ^^"라고 돼 있습니다.
간단히나마 이를 닦으며 혼자 되뇌여 봅니다.
그럼 그렇지...
뭐 그런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현재시각 열시 오십오분,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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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뻔한 스토리인가요. 어차피 제 글에 반전 따윈 없습니다.
pgr의 아스키 문학을 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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