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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1 15:15
영국 사람, 일본 사람을 많이 상대해보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요,
이걸 섬나라 기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제가 만나본 영국,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인식하고 외부 (영국 사람들에게는 유럽 대륙, 일본 사람들에게는 중원과 한반도) 를 '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독립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반면에 어찌보면 굉장히 관계성이 떨어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자국을 전 세계 질서의 일환으로 인식하고 타국과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굉장히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요. 제 생각에는 일본인들의 경향은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라는 현실을 인지한 17세기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9/11/21 15:24
뭐 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중화질서 내에 못 들어간 왕따국 비스무리한 존재였는지라.. 그러니 중화 외부에 대해 관심이 더 많을 수 밖에 없죠. 지리적으로도 조선보다 서양인
이 찾아오기 더 용이한 위치고요.
19/11/21 17:50
조선도 1708년에 필사본을 제작했었네요,. 일본보다 100여년은 느렷군요. 그렇지만 1711년에 만국전도도 없냐고 비웃는건 어불성설이죠.
19/11/21 19:20
다테 마사무네는 크리스찬이 아니라 단지 서양과의 교역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식 배를 자체적으로 건조하고 로마 교황에게 사절단을 보낸 것이지 (여기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서양과의 교역을 통해 힘을 길러 궁극적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도 넘보기 위함이었다는 당대의 평가도 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가 기리시탄(크리스찬) 다이묘는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기리시탄 다이묘라면 오토모 소린이나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있죠.
그리고 마사무네의 명을 받고 로마에 다녀온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가 남긴 사절단 관련 기록(慶長遣欧使節関係資料, 慶長는 당시 일본의 연호입니다.)은 센다이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세쿠라 츠네나가 본인이 해외를 방문하던 당시에 기록한 개인적인 일기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어쩌면 하세쿠라 가문이 훗날 집안에 크리스찬이 있다는 이유로 멸문을 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19/11/22 00:40
백제 멸망, 당의 멸망으로 인해 견당사가 폐지되는 등 외부 교류가 줄어가는 상황에서 불교의 토속화와 호겐의 난으로부터 헤이안 시대의 종말, 헤이케로부터 시작되는 막부 성립. 일본의 역사를 보면 오다 노부나가 시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헤이안시대 말기부터 상대화가 되어있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중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동경이야 있었겠지만요. 그 이유는 중국이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었느냐 없었느냐구요. 딱히 조선이 무능한건 아니었죠.
19/11/22 06:36
명종때 일본사신들이 조총을 갖다 신무기라고 갖다바침 -> 오랑캐 잡기라고 병기고에 짱박아둠,
선조가 조총기술 국산화 추진 -> 저언하 어찌 무기개발이라뇨~.... 조선은 성리학 프레임에 갖혀서 망했죠 정유재란당시 일본군장수는 아버지한테 쓸데없이 사람보내지말고 조총지원해달라고 편지를 썼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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