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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1 11:29
일단 피지알 게시판의 업로드 기능으로 올려 놨는데, 이미지 파일을 문단 중간에 넣을 방법을 찾아보는 중입니다....
구글 포토 링크를 따도 안 되고 이거 참 곤란하네요.
19/08/01 11:30
1. https://ko.imgbb.com/ 에 들어갑니다
2. 이미지를 해당 사이트에 올립니다. 3. embed codes 밑에 선택칸에서 HTML full linked를 고른다음 그 밑칸의 코드를 복사해서 피지알 글쓰기에 붙여넣습니다. (예시 - <a href="https://ibb.co/BtSSSpj"><img src="https://i.ibb.co/80SSSC2/1.png" alt="1" border="0"></a> ) 4. 완료
19/08/01 12:00
블로그 들어가서 대충 축척 보니까 익주-이릉 거리가 한반도 폭보다 넓어보이네요.. 후방에 유능한 사람들 없으면 반란진압/보급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겠어요. 조운 제갈량 다 후방에 놓을만 하군요..
19/08/01 12:47
근데 생각해보면 병력도 우세할 것이 없는데 저 어마어마한 영토를 수복하려고 생각한 것이 좀 지나치게 야심찬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나라의 능력을 본인보다 확실히 아래라고 본 것일까요 아니면 형주와 이민족이 자신이 나타나면 바로 호응할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19/08/01 13:06
비록 장군들 여럿이 이릉에선 빠졌지만 바로 직전에 한중에서 조조를 깨트린 걸 생각하면 촉이 더 우세했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19/08/02 10:25
일단 강릉만 확보하면 장강에 기대어 그 남쪽 영역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형주(번주와 습진)와 이민족(무릉만이)도 모두 호응해 왔고요. 물론 사전작업이 있었겠지요.
다만 유비가 손권이나 육손의 군재를 자신보다 낮게 본 건 아마도 사실일 겁니다. 당대 유비보다 낫다고 할 만한 군사지휘관이 그리 많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대략 적벽대전 이후인 209년에서 형주 공방전 이전인 219년까지 10여년 동안 패배 없이 승승장구하기도 했고요.
19/08/02 10:47
라이벌인 조조도 죽었겠다, 조카뻘인 손권이나 육손을 보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말야. 나 젊을 때는...'이라고 생각할 법도 했죠.
19/08/01 14:33
영걸전에서도 장판파 전투와 함께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릉전투군요. (물론 1599로 렙업노가다를 충실히 해왔다면 괜찮습니다만).
시작과 함께 체력은 1/4로, 사기는 1/2로 깎이고 시작하는. 다음 편 빨리 올려주세요~~.
19/08/01 15:32
1599 안했다는 가정하에, 장판파는 적토마 꼼수라도 있지 이릉대전은 정말 어렵지 싶습니다. 일단 출진순서와 맵배치 관계부터 외우고 시작해야....
19/08/02 07:13
일단 형주의 '근거지'를 상실했고, 목젖인 상용을 잃은게 가장 컸죠.
영토로만 따지면 현재 대한민국만큼 잃었다고 보심 비슷할겁니다.
19/08/01 22:37
작금의 황제가 누구지? 했는데 습진평이군요....;; 그런 관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연의에서처럼 무식한 돌격, 노망이 아니라, 그야말로 반백년 전장을 누린 용감한 노장의 마지막 전쟁이었다라는 느낌이 드네요...!
19/08/02 00:05
선주전에 따르면 정월에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고 2월, 선주가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 효정(猇亭)에 주둔했다. 한산(佷山)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계만이를 위로하자, 이들이 모두 서로 잇따르며 호응했다. 진북장군 황권은 장강 북쪽의 제군을 감독하며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吳軍)과 서로 맞섰다라고 되어 있는데 삼국지 위지 문제기에 달려있는 주석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222년 2월에 갈라진 무리(支黨) 4만명, 말 2,3천필을 이끌고 자귀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유비의 병력이 4만만 있었던 것 것 같지는 않고 다른 병력(오반과 진식의 수군, 황권의 강북 병력이라던가, 오계만이라던가)이 있는 가운데 유비가 4만명을 따로 이끌고 효정에 진을 쳤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유비가 오반을 데리고 유인책을 편 것은 유비가 효정에 도착한 후인 222년 6월의 일(자치통감)이지 221년에 자귀에 있을때가 아닙니다.
19/08/02 10:38
육손전의 서술이나 이후 유비의 움직임을 볼 때 저는 유인책이 222년 1월 이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유비가 이릉에서 자귀로 돌아가기 전에요. 유비가 당초 출병했을 때 병력이 4만여명이라는 건 자치통감에 명시되어 있고, 이 때 황권의 병력을 따로 계산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후에 무릉만이가 가세한 건 명확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수만 명의 병력을 너끈히 보내줄 거대한 세력도 아닌 만큼 저는 222년 시점에서 유비의 병력은 죄다 박박 긁어 모아도 5만 정도나 혹은 그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19/08/02 16:02
자치통감에서 나온 4만명은 선봉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222년 정월에 따로 진식과 오반의 수군을 이릉에 주둔시켰고 2월에는 자신은 자귀에서 효정으로 이동하고 황권은 장강 이북에 있었던 제군들을 감독하라고 보내죠. 222년 시점에 이릉에 있는 수군과 강북에 있는 황권군이 따로 있는 상황에서 손권이 조비에게 직접 보낸 상소에서는 유비가 갈라진 무리 4만명을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다고 썼습니다. 이것만해도 유비가 이끄는 병력 4만 외에도 이릉의 수군, 강북의 황권군이 따로 있었다고 봐야 겠죠. 자치통감에 따르면 무현부터 이릉경계까지 수십의 둔영이 있었다고 하니까 거기도 조금씩 배치되어 있었을 거구요. 오반의 유인책의 경우 저 같은 경우엔 자치통감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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