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리 활발하진 않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국민학교 시절 나에겐 친구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 나에게 먼저 다가와줬던 활발한 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그 친구 그리고 또 다른 한 친구 3명이서 어울려 다니며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집-학교 밖에 몰랐던 내가 그 친구와 함께 산도 가고 강도 가고 학교 마치면 바로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도
놀고 그 친구 집에 가서도 놀았다. 같이 있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함께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너무나 빨리 시간이 흘러갔기에..
그리고 그해 여름 방학..
그 친구는 다른 한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왔다. 강에 놀러가자고..고기 잡으러 가자고..
그 날 나는 약한 감기 기운이 있어서 방에 누워 있었고, 엄마는 내가 아파서 못 나간다는 말을 대신 해줬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 날 늦은 오후 엄마와 아빠가 집 근처 강에서 인명 사고가 있었다는 말을 하면서 나를 데리고 나갔고 소방관들이 강에 들어가서 열심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사람들은 잔뜩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이름..
설마 실종자가 그 친구인 것인가..
갑자기 무언가 무서운 느낌이 들었고 난 엄마 아빠를 졸라서 빨리 집에 가자고 했다.
그렇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가버린 여름 방학.. 그리고 개학..
학교를 가자마자 난 그 친구를 찾았지만 그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 2학기동안 난 다른 한 명의 친구와 제대로 말도 섞을 수 없었다.
무언가 엄청나게 멀어져버린 거리감..
우린 그렇게 멀어져갔고.. 성인이 되어서 길에서 마주쳐도 어색하게 서로 인사만 겨우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20살이 되던 해..정확히 10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난 겨우 그 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던 말이 잔뜩 많았던 걸 가득히 적은 편지 하나를 들고서..
이제야 여길 다시 찾아와서 너무 미안하다고..그때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워서 마지막 가는 길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나 혼자만의 사죄를..변명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무언가를 키우는 걸 좋아해서 집에서 참 다양한 동물들을 키웠다.
개, 고양이, 병아리, 금붕어, 토끼 그리고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예쁜 새..
그런데 무언가 온전히 정이 가지 않는다고 할까...뭐라 표현하기 애매한데..
내가 키우는게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동물이라 그런가 딱히 그 동물들에게 정이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가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사왔던 동물이 햄스터였다.
당시에 친구 집에 가서 햄스터 2마리를 보고 너무 귀엽다고 확 꽂혀 버려서 그 날 바로 집에 가는 길에
햄스터 1마리를 사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엄마는 왠 쥐를 사왔냐고 징그럽다고 했고 누나들은 귀엽게 생겼네라고 한 마디 하고는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엔 세상 귀여운 애완동물이었고, 난 그런 햄스터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쳇바퀴도 사주고
나름 내딴엔 많은 공을 들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내 방은 제대로 난방을 하지 않아 무척이나 추웠는데 난 혹여나 햄스터가 추울까 햄스터용 담요도 만들어서 넣어주고
솜도 넣어줬다.
난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누나들에게 햄스터 혹시 괜찮은지 잘 봐달라고 말하고 잠깐의 외출을 하러나갔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집으로 돌아와 방으로 들어가 햄스터가 잘 있는지 봤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빳빳하게 온 몸이 굳어있는 느낌..
녀석은 그렇게 내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하늘 나라로 떠나 버린 것이다.
난 녀석을 안고 정말 닭똥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고, 누나들은 그 울음소리에 놀라서 들어와 나와 햄스터를 보고는
분명 좀 전까지 괜찮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 귀엔 그런 말이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난 울면서 햄스터와 햄스터를 위해 준비해줬던 담요를 가지고 집 근처의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녀석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담요와 함께 묻어줬다. 그 곳에선 춥지 말고 따뜻하게 지내라고..
그리고 처음엔 매일같이..그 후엔 일주일에 한 번..또 그 후엔 한 달에 한 번..일 년에 몇 번..내 기억에서 그 녀석이 완전히 잊혀힐 때까지 난 그 곳을 방문했고, 서울에 올라온지 10년이 다되어가는 내가 그 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한지 이제 10년이 좀 넘어가는 것 같다. 아직도 그 녀석을 묻어준 곳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데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고 있겠지..
***
중2부터 고3까지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느낀 사랑이란 감정이 아닌.. 우정과 사랑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런 감정을 공유했던 사람..
우리 딴에는 나름 사귄다는 사이였지만 뭔가 순수한 그런 느낌의 교제였기에 그 흔한 뽀뽀도 한 번 못해봤고, 손 한 번 잡는 것도 뭔가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무려 2년이 다되어가던 시기에 손을 처음 잡아봤으니 말이다.
거기에 나름 서로가 모범생(?)이고 서로의 공부를 방해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그 흔한 놀이공원 데이트도 하지 못했고, 만나는 곳의 거의 90% 이상인 지금으로 말하면 노잼 데이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데이트에 불만 한 번 가지지 않고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어주던 그녀가 참 고맙다.
그리고 고3이 되던 해 우린 조금씩 만남의 횟수나 연락의 횟수가 줄고 있었다. 고3이라서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니 당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고3에겐 방학이 없지만 어쨌든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그녀를 처음 만나고 유난히 하얗던 피부를 보고 좋아했는데 그게 어릴 때 크게 아파서 병원에서 2년이란 시간을 보내서 그렇다고..그래서
자기는 사실 학년은 같지만 나보다 2살이 더 많다고..
그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는데 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미 몇 개월이 됐다고..
내가 공부하는데 신경 쓸까봐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연락한건 그녀를 내가 못보고 그녀가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울면서 찾아간 병원...
몇 개월 사이 몰라볼 정도로 많이 야윈 그녀는 펑펑 우는 나를 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환하게 웃어줬다. 처음 봤던 그 날처럼..
그 날 이후 매일같이 학교를 마치면 난 병원을 찾아갔고,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져갔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리고 너무도 뜨겁던 대구의 여름 어느 날..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소를 지은체 그렇게 떠나갔다.
자기는 답답한 곳에 있는게 싫다며 자기가 죽으면 꼭 바다로 보내달라고 했고..
그녀의 유언처럼 그녀를 바다로 보내줬다.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넓은 바다에서 더 이상의 고통없이 행복하게 웃으며 지낼 수 있길 바라며 나의 잔인한 고3 여름방학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가슴 속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쓰라린 추억과 함께..
****
꼬물이를 보낸지 이제 어느새 3주가 가까워 온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간 그 일이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지나가는 애기들에 관심이라곤 없던 와이프나 내가 이제 갓난아기만 지나가면 흘끗 쳐다본다.
마치 우리 아기도 태어났으면 저렇게 예뻤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건지..
하루..그리고 일주일..이주일..
역시 모든 것에 시간만큼 완벽한 약은 없다.
정말 미칠 거같이 슬펐던 그 감정이 점점 가라앉더니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다.
하지만 가끔씩 느껴지는 무언가 공허한 그 느낌이 오면...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일 때가 있다.
어제 밤에도 와이프가 잠들기 전에 갑작스레 울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갑자기 꼬물이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요 며칠 웃기도 많이 웃고 전혀 그런 티가 안 나서 괜찮아진줄 알았는데 와이프도 아직 마음이 많이 아픈가 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괜찮아지겠지..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살면서 보냈던 많은 인연들이 문득 떠오르는 그런 비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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