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順> 字 돌림 별명의 선생님들.
1. 당시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거의 경북대 사범대 출신이셨습니다.
도를 아는 군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도, 적어도 선생님답지 않은 선생님은 안 계셨지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벌도 거의 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학생 지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안목과 지혜를 갖추셨고, 성품들도 무난하신 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특정 선생님 때문에 상처받아서 힘들어 하는 친구는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사랑과 열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되도록 덜 가르치면서도 학생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이끌어주고,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학생들의 의문은 풀어주는....그런,
흔히 말하는 바람직한 선생님 像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해도,
당시 여건으로 주입식 교육일망정 대체로 수업에 충실하셨지요.
그 중 몇 분 선생님은 얼마나 열심으로 살뜰히 가르쳐 주셨는지,
그 때 배운 지식의 일부는 지금도 저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어제 들은 걸 오늘 잊어뻔지는 요즘에는, 머릿속에 지식을 양동이째로 마구 들이부은들 다 까먹고 어디 남아 있겠습니까.
‘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가 없다 ’ 는 말이 옳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 가지 애통한 점은, 총각 선생님 福이 지지리도 없었다는 것.
불어와 지학, 두 분 선생님이 총각이시기는 했는데,
참...사람이 그리 매력 없기도 힘들거라.
매력 없을랴고 일부러 애를 쓰도 그리 되기 어려울거라.
두 분 다 서울대 사범대 출신으로 실력 없지도 않았건만,
특징 없는 교회 오빠보다 더 무색+무취+무미+건조하여...
총각이라는 희소성도 의미가 없을 지경이었죠.
쨌거나.. 저의 여고 시절은 그런 면에서 소스 없는 스파게티 같았다고나 할까요.
2. 그래도 !! 우리는, 그 개성 없는 선생님들에게 개성적인 별명을 붙여줘 가매 ...
나름 학교 생활의 재미를 찾았지요.
바로 !!
일부 선생님들에게 <順> 字 돌림 별명을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선배님들( 아마도 세살 위 언니 期부터 )이 물려준 전통입지요.
언니 때엔
<척순이> 선생님이 가장 유명했다고 하더군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노상 뻥을 치셨다 합니다. 크크
잘난 척, 아는 척, 멋있는 척, 센 척.....
그런데 그 ~ 척 하는 모습이 상당히 귀엽고,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해서 별 아니꼽지는 않았다 하더군요.
애석하게도 우리는 척순이 선생님께 배우지를 못했지요.
우리 1,2학년 땐 3학년을 가르치고, 3학년 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거든요.
3. 먼저
1학년 때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셨던, <골순이> 선생님. 골을 잘 내어서 골순이가 아니라,
<곯아서 > 골순이 선생님이십니다.
사과나 감자가 약간 곯아빠진 상태를 떠올리면, 선생님의 모습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지요.
3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
야윈 몸,
새가슴,
구부정한 어깨,
노라탱탱 탄력 없는 얼굴.....
그래도, 얼마나 눈이 맑고, 웃음이 善하고, 자상하고, 깔끔하셨던지...
국사 담당이었는데 실력 또한 짱짱 하셨습니다.
반장을 비롯하여 은근히 좋아한 친구들(물론 저도 포함)이 많았지요.
당시 선생님과 저는 한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어 번.. 선생님댁에 도시락 심부름을 가기도 했지요.
그 때가 봄이었던가...
청소를 마치고 조금 늦게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우산이 없던 저는 뛰어가다가 교문께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비를 피하겠다는 생각만으로 부끄럼도 없이, 얼결에 ..선생님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고,
우리(응?)는 한 우산을 쓰고 적어도 15분간을 함께 빗속을 걸었습니다.
우리집 대문 앞에 도착해서 보니... 선생님 한 쪽 어깨와 팔이 흠뻑 젖어 있더군요.
아마도 그 때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어머니가 산딸기 한 소쿠리( 당시 오촌 당숙이 매봉산 아래에서 산딸기 농사를 지었음.)를,
선생님댁에 갖다드리라고 해서, 갔다가 ....
노을이 질 무렵 선생님과 단 둘이 교도소 쪽 둑길로 산책을 하고 온, 그 이후부터인가...
어쩌면 선생님이 저를 인정해 주셨기에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업 후, 선생님을 뵌 기회가 우연을 포함하여 대여섯 번쯤 되려나요...
매 년 스승의 날이 가까와 오면, 찾아 뵈오리라 결심하면서도,
아직 정식으로 찾아뵙지를 못 했습니다.
4. 다음으로
국어B(문학)를 담당하셨던, <끽순이>선생님. 가장 살뜰히 교재 연구를 해와서, 가장 알차게 가르치셨지요.
한 칠판 가득~ 판서를 하면서, 귀에 쏙쏙 들어 오도록 상세하고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집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지요.
2학년 때, 몇 단원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잊을 수 없는 <세계 문학 산책> .그 한 단원 진도 나가는데 20시간 쯤 걸렸는데, 우리 모두 시간 가는 줄 몰랐었습니다.
그리 열심으로 강의를 하시다 보니...
침이 전방 2m 지점까지 산지사방, 무작위로 튀었습니다.
그래서 앞 줄에 앉은 우리 꼬맹이들은 눈치껏 페파홀트로 얼굴을 가려 가면서 설명을 들어야만 했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좀 과장하여 말하면, 침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인간의 목에서 나오기 어려운 기계음이 섞였습니다.
끼이익 ---- 한 시간에 한 번쯤 내질러 주시는 이 끼이익--- 때문에, 선생님 별명은 끽순이로 정해졌지요.
끽순이 선생님은 외모도 매끈허니.. 깔끔해서, 소문내가며 짝사랑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8년 차 이신데도 아이가 없어서, 간혹 입이 거친 친구들이 <고자>로 칭하기도 했으며..
제 친구 슉이는 가끔 짓궂게 <높은 아들>이라 부르기도 했.....
5. 그리고 또 한 분,
지리를 가르치셨던 <탕순이>선생님. 선생님은 단지, 피부가 검으면서 번들거리는데다가 눈빛이 느끼하다는 이유로...탕순이로 불렸습니다.
가끔 앞 줄에 앉아 제비새끼처럼 고개를 치켜 들고 설명을 듣고 있는,
우리 꼬맹이들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우리가 필기를 하고 있을 때,
스윽~ 다가와 발을 지그시 밟은 적은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두 번 밟혔는데 간신히 아무 내색을 안 했지요.
우리에게 딱히 징그럽게 구신 적도 없는데,
<음탕하다>의 탕을 끌어와 탕순이로 불렸으니.. 선생님으로서는 억울하기도 했으련만, 별 개의치 않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참... 그리고 한 가지 희한한 것은, 그런 쪽으로 무지한 여고생 때였는데..
우찌 남자가 풍기는 그 동물성의 느낌을 그리도 잘 잡아내어 별명을 갖다 붙일 수 있었는지..
신통하다 말입니다. 크크
여튼, 탕순이 선생님은 탕순이로 불리든가 말든가.. 나름 젠틀하고 깊이 있는 선생님 분위기를 잡으려고 애썼습니다.
수업하러 교실에 들어올 때엔, 항상 고개를 약간 숙이고 천천히 걸어와 교단 위로 오르셨지요.
그리고 교탁 위에 교재와 분필통, 출석부를 조용히 내려 놓곤,
시선을 운동장 쪽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여기서 표정은 매우 진지하셨습니다.
처음엔 우리도 선생님을 따라 모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선이 그냥 분위기를 좀 잡으려는 것 뿐임을 알고 부터는,
모두 선생님 얼굴을 쳐다 보았지요.
약 30초쯤 흐른 후, 선생님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곤 밑도 끝도 없이 목소리를 깔아 한마디 던지셨습니다.
“ 인생..참.. 재미 있습니다아. 늦었다고 한 때가 가장 빠른 때라지만, 결국 늦은 겁니다아... 어제 친구 녀석과 술 한 잔 했습지요.... ”
그래서 !! 뭐 우리 보고 우짜라는 말씀인지...
우리도 덩달아 뭘 깨달아야 한다는 겐지...
그리고... 또 약 30초가 흐른 후,
아참 !! 내가 지금 수업을 하러 들어 왔지,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비로소 출석 체크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곤 하셨지요.
또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칠판 판서에 몹시 정성을 기울이셨는데..
항상 노랑 빨강 파랑 삼색 분필을 섞어가매.. 등고선이며, 지층의 단면이며, 무슨 분포도 같은 걸 꼼꼼히 표시해 주셨습니다.
“ 말레이시아 필리핀 걔네들은 이모작을 해묵는데도 농산물 생산이 늘 부족하죠.
뉴질랜드 얘네들은 양을 키워서 그나마 좀 사는 애들이죠. ”
전 세계 사람들을 얘, 쟤, 걔로 칭하면서
목소리를 낮게 깔고 빙긋이 웃으며 설명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6. 끝으로...
걸핏하면 화를 버럭버럭 내시던, <썽순이> 선생님. 선생님은 별 이유도 없이 늘 구시렁 툴툴거리며 다녔습니다.
우리언니도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 때는 썽을 더 많이 내셨다 하더군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선생님의 웃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19세기 이탈리아 과학자 아보가드로를 닮은 듯,
몸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를 흔들고 다니면서 노상 미간에 두 줄 주름을 잡고 계셨지요.
물리Ⅱ (우리반은 이과였음.) 담당이었는데,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빨리 흡수 안 되는 우리나 ..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습지요.
K고 녀석들을 가르치다가 우리학교로 오셨기에, 늘 비교하면서 우리의 아둔함을 나무랐습니다.
당시 한 해에 서울대를, 재수생 포함 안 하고 30명씩 넣는 학교 녀석들 하고 비교하면,
우짜란 말입니꽈.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질문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질문이라기보다, 스스로의 썽을 풀려는 의도처럼 보였지요. 크크
출석부로 우리 머리통을 후려침과 동시에,“ 여기서 이 물체의 운동량은 얼마냐? ” 고
묻는데 !! 언제 답을 말하노 말임돠.
다문 1초라도 시간을 줘야 답을 말할 것 아니냐고오 ?
한 줄 맨 앞 학생부터 출석부로 한 대씩 갈기며, 빛의 속도로 그 뒤, 또 그 뒤로 넘어가면서
내려침과 동시에 질문을 던져대는데, 그 누가 답을 맞힐 수 있으리요.
언젠가 다급해진 누군가가,
일단 “ 스톱 !! ” 을 외치고, 두 손으로 출석부를 막긴 막았으나...
즉시 답을 말하지 못하여 몇 배 더 맞은 적도 있었지요. 크크
그렇게 한 차례.. 묻고 맞고 대답 못하고의 과정이 지나고 나면,
선생님은 다소 화가 풀린 듯.. 차근히 다시 설명해 주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썽순이 선생님에 대해선 그 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심지어 선생님의 화내쌌는 그 모습이 귀엽거나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으니까요.
쓰다 보니 ... 너무 길어졌군요.
별 특징 없는 선생님 이야기임에도 쓰는 동안
아득한 세월 저 편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