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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2 16:04
산업혁명 이후 유목민의 귀환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인력과 축력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축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유목민이 더 유리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화석연료라는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는 이상 유목민이 정주민보다 더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이 불가능할테니까요.
19/01/22 16:24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결국 '공업혁명' 전과 후가 다르고, '화석연료'가 변수라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화석연료'의 고갈 내지는 '대체연료'의 등장이, 혹시라도 판도를 바꾸어 유목 제국의 귀환을 부를 가능성이 있을까요?
19/01/22 16:17
말타고 돌아다니는 유목민의 부활은 당연히 없겠죠. 억지로 꾸며내자면 여러 나라를 상대로 무역하는 다국적기업을 현대의 유목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글쓴이님이 생각하시는 유목민의 개념이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19/01/22 16:30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모호하기 그지 없는 관념이지만, 1) 이동형(정주하지 않음), 2) 기동성(빠른 속도로 움직임), 3) 단순성, 4) 유연성, 5) 강건함, 6) 주변부, 비주류성 등이 요소인 것 같습니다. 한 지점에 주구장창 살지 않습니다.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삶의 방식이 단순하고 많이 가지지 않습니다. 삶의 방식을 빠르게 바꿉니다. 그래서 강건합니다. 문명의 중심부, 주류에 위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명 사회가 간과하고, 정복자로 등장할 때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으로 등장합니다.
19/01/22 16:32
유목민과 도시화가 비교되는데, 이 둘의 연관성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일단 유목민이 먼저 줄었고, 시간이 흐른 후에 도시화가 크게 이뤄진거죠. 역사적으로 볼 때 농경민족은 뿌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비 정착민들에게 수탈을 당하죠. 본문에선 유목민만을 언급했습니다만, 왜구나 바이킹등 해적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 없이 마냥 평화롭다면, 정착민들의 생산성이 훨씬 좋습니다. 비정착민들은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침략을 해서 부족한 재화를 충당하는 거죠. 이러한 것은 기본적으로 비정착민들의 전투력이 정착민들의 전투력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래야 침략을 하니까요. 전투력이 우수하다고 한들 집단대 집단으로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개개인이 우수하다는 겁니다. 기본적인 행보는 개개인이 우수한 것을 바탕으로 정착민들이 모여서 대응하기 전에 치고 빠지는 형태로 수탈하는 거죠. 그러다 집단으로도 비정착민이 강할 경우에는 정복당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화기가 발달하면서 전투력이 비등해지거나 역전됩니다. 비등해지기만해도 정착민들의 인구가 더 많기 때문에 치고빠지는 건 무리가 되죠. 약탈민족들도 화기를 사용하겠지만, 화기의 발달은 정착민들이 더 빠르게 가져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화기가 발달하기 시작하며 유목민이니 바이킹이니 왜구니 하는 것들의 영향이 확 줄어버린거죠. 이러한 안정성이 도시화에 영향을 주기는 했겠지만, 도시화를 가속한건 산업혁명이죠. 산업혁명에 의한 도시화는 비정착민들을 끌어들인게 아니라 정착하던 농경민들을 위주로 끌어들여 도시화 한 것이기에 유목민들하고는 큰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19/01/22 16:50
말씀해 주신 바를, 탈-유목-화가 먼저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완결된 후에 (그 계기는 농경민이 유목민을 무력으로 역전할 수 있게 한 '화기'라고 해 주셨고), 그와는 별개로, '공업혁명'을 계기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새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1차 산업혁명(농업혁명)뿐만 아니라, 2차 산업혁명(상업-공업혁명)도, 유목민의 삶의 방식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농업 중심 사회 구조를 상업-공업 중심 사회 구조로 재편한 상업-공업혁명은 어떤 측면에서는 유목민적 삶의 방식에서 멀어지고(탈-유목화), 어떤 측면에서는 유목민적 삶이 도입되고(재-유목화),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문명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유목 제국의 귀환"이 꼭 말 타고 활 쏘며 달려 오는 훈족 전사들의 등장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19/01/22 16:38
유목민 등장하려면 우주로 진출하거나, 핵전쟁으로 완전 리셋되거나, 지하자원 고갈되거나, 지구온난화로 대륙이 바다에 잠겨야해요.
19/01/22 16:46
100킬로 떨어진 곳에서 도심에 있는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도 수두룩하고 설명절되면 수억이 되는 사람이 1000킬로는 우스운 거리를 이동해서 귀성을 하는 중국같은 경우를 봐도 그렇고 교통 정도 경제 모든게 네트워크가 된 오늘날에 유목민이고 정착민이고 따지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9/01/22 16:59
하지만 100킬로, 1000킬로미터를 왕복 한다는 이들도 자기 '국적'과 '주소지'와 '업무주소지'가 있고, '주소지'는 간헐적으로 바꾸더라도, '국적'은 거의 바꾸지 않는다는 점, 왕복은 하지만 결국 '주소지'에서 '주소지'로의 반복적 왕복이 대개라는 점 등등에서, 현대의 삶은 "정착성"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상당한 "유목성"이 삶의 일부로 도입되기는 했지만요. 더 많은 무국적, 무거주, 비정주형적 삶을 특징으로 하는 보다 유목적인 공동체가 등장할 가능성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위의 어떤 분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오늘날에는 다국적기업이 그 맹아가 될 지도 모르겠네요.
19/01/22 16:55
'유목민'에 비할만한 생활 형태는 앞으로 없을것 같구요.
글쓴이님이 말하는 '시민'은 '비도시 주민'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고, 이는 정착/비정착보다는 '체제에의 편입'이라는 의미가 더 강해보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그게 아닌 경우는 성립되기 힘들겠죠. 정주하지 않고 과거의 유목민과 똑같이 살아도 시민인건 마찬가지니까요. 생활형태를 떠나 '시민이라는 위치'에 정주하는겁니다. 오늘날 과거와 그나마 비슷한 구도를 찾자면 도시 주민/비도시 주민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몇십년쯤 지나면 세계의 주요 대도시들은 초거대 도시로 바뀔테고, 비도시 지역의 주민은 극도로 줄어들겁니다. 근데 그러면서도 교통과 통신이 고도로 발달하며 비도시 지역의 생활여건은 더욱 도시에 가까워집니다. 도시/비도시라는 구도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시대환경이죠.
19/01/22 17:21
여러 생각이 나게 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공권력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행정구역은, '시'(내지는 '군')이다. (군은 도시가 아닌가? 군을 시라고 한다면) 행정권력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은 시이고, 행정권력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이들은 시민이다." 부분에 관하여, 지방자치법에 그런 내용이 안 나오는 것 같은데 혹시 본문의 지방자치법이 우리 나라 법률이 아니라 어떤 외국의 지방자치법인지요? 외국법이면 한번 찾아보려고 여쭤봅니다.
19/01/22 18:16
지방자치법(률)과 그 조문을 염두에 두고 쓴 부분은 아닌데, 찾아보니, 국내 지방자치법은 "시, 군, 구" 밑에 "동, 읍, 면"을 행정단위로 규정하고, 시는 "인구 5만 이상의 도시"로 하되, "도농복합형" 시를 둘 수 있도록 하는 등, 반드시 '시'='도시'도 아니었고, '군, 구'='사실상 시'라고 보는 것도 법문과 불일치하는 건 분명하네요. 비약하여 서술하다 보니 법률의 오인이 있었습니다.
19/01/22 19:34
[도시화]에서 중요한 것이 [연결성] 강화라 생각합니다. 인구증가나 인구밀집보다 오히려 그 점이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하고요. 사람과 사람의 연결, 도시와 도시의 연결, 도시와 물자의 연결 이런 것들이 강화된 것이죠. 유목민의 약화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목민이 약탈을 한다고 해보죠. 농경국가가 잘 연결되어 있으면, 빠르게 한곳으로 힘을 집중시켜 막아낼 수 있겠죠.
그리고 유목민이 전투력이 강했던 주된 이유도 실은 연결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기동성... 그것이 바로 연결성이죠. 드넓은 초원에 있는 부족들을 빠른 시간내에 모아서 전장에 내보낼 수 있는 기동성. 물자를 말에 태워서 수송할 수 있는 기동성. 적을 양쪽에 분산시켜두고, 재빨리 한곳으로 집결하여 각개격파하는 기동성. 변방의 성에 적의 주력 부대를 묶어두고, 재빨리 수도로 돌격할 수 있는 기동성 말이죠. 그게 추상적으로는 연결성인 거라 생각합니다. 연결성에 있어 말을 능가하는 자동차와 기차가 등장한 이상, 유목민의 전투력은 끝난 거라 봐야겠고요. 초원에서 풀 뽑고 젖 짜내어, 차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유목민을 비유적인 의미로 본다면, 아직도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추상적으로 널리 의미를 갖는 것은 질서와 무질서라 생각합니다. 농경은 질서요, 유목은 무질서에 비유할 수 있다는 거죠. 세상의 중심에 질서가 존재하고, 변방에 무질서가 존재하는데, 그 무질서가 조그만 새 질서를 창조하여, 기존의 거대한 옛 질서를 침략하고, 그래서 세상의 중심에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고 이게 비유적으로 꽤 잘 맞아떨어지죠. 댓글에서 말씀해주신, 유연성, 기동성, 단순성 이런 것도 무질서 내지 초기 질서에 어울리는 것이겠고요. 질서는 노인이 되면, 복잡해지고 경직되고 느려지는 법이니까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도 바로 이것이고요. 기존의 패러다임이 존재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여, 경쟁하는 거죠. 그중 대부분은 기존의 패러다임이 승리하는데, 간혹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면서 대체하기도 하고요. 또 다른 비유로는 스타트업을 유목민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연성, 기동성... 스타트업이죠. 스타트업 대부분은 파괴되지만, 간혹 시장에서 승리하여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구글을 들 수 있겠죠. 몽골이 중국 침략하듯, 구글이 야후를 침략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비유적으로 볼 때, 유교보다는 도교가 유목민에 가까운 거라 생각합니다. 도교는 무질서이자 또한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는데 적합하단 거죠. 포스트모더니즘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목민인 거죠. 다만 그게 영원한 무질서여서는 안 되고, 무질서는 과도기적인 것일 뿐, 질서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구질서를 파괴하고 새질서를 만들든, 새질서를 만들어 그것으로 구질서를 파괴하든 말이죠. 얼마전에 조던 피터슨 교수의 이집트 신화 강의영상을 유투브에서 본 적이 있는데요. https://www.youtube.com/watch?v=_Wsz9fQmKc4 호루스를 탄생시켜야 파괴와 혼돈이 가치를 갖게 된다는 생각인 거죠.
19/01/22 22:28
말씀해주신 바는 유목성이 아니라 연결성이 차이를 만들었고, 도시화로 연결성이 극대화되어 유목 패권의 귀환은 어렵다는 것으로 새겼습니다.
연결성, 기동성, 무질서, 도교, 포스트모더니즘, 스타트업의 특성이 상통한다는 것도 일정 부분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는 유목 사회를 과연 '무질서'로, 농경 사회를 '질서'로 특징지을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유목 사회에도 나름의 규범과 질서는 존재했고, 특히 제국으로까지 확장된 유목 사회는 그 질서가 고도로 조직화된 특성을 보입니다. 비록 그 질서가 '문자'에 의존해, '복잡'하고 '정교'하지는 않더라도요. 그래서 질서성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19/01/22 23:31
제국으로까지 확장된 유목 사회는 그저 유목 사회라 보기 힘든 것 아닌가 싶네요. 농경 사회와 혼합된 것이겠죠. 그러면서 기존 농경 사회의 질서를 일부 가져다 쓰기도하고, 새롭게 변형해서 새 질서를 만들기도 하고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글에서 예시한 오고타이 칸 몽골은 주변부라 보기 곤란한 것 아니겠어요. 이미 중심부에 있는 것이죠. 많은 농토를 가지고 말이죠.
그리고 무질서를 어떤 점 같은 걸로 보기보다는, 콩가루도 무질서라 부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숫자로 이야기하자면, 무질서도 0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또한 0에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면, 무리없는 게 아닐까 싶고요. 유목 사회뿐만 아니라, 이제 막 불이나 다루던 원시 사회도 실은 무질서도가 0이 아니죠. 현대 사회에 비해 현저히 질서가 빈곤할 뿐인 거죠. 순수히 유목 사회도 콩가루라 말하는 건 무리지만, '농경사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전체적으로 질서의 다양성과 고도성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로 의미를 나누면 무리없지 않나 싶습니다. 덧붙여 무질서에 대해 한 가지 또 비유를 하자면, 생물의 번식도 무질서라 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면, 정자와 난자인 거죠. DNA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랜덤적으로 절반만 가져와서 새로운 절반과 합친 것이 됩니다. 서로 다른 유전자 조합의 수많은 정자들이 헤엄치는 그 순간은 혼란의 시기라 할 수 있겠고요. 그러다가 수정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질서를 갖추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에도 수정 전후를 놓고 볼 때, 수정전이 완전한 무질서는 아니죠. 다양하게 반쪽 질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수정후가 완전한 질서는 아니죠. 쌍둥이를 보면 알 수 있듯, 배발생 과정에 랜덤적인 것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뇌발달까지 생각한다면 아기가 엄마 뱃속에 나온 순간도 상당부분 무질서가 포함된 것이겠고요.
19/01/22 19:47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수업을 중국인 교수님한테 들은적이 있는데 압도적인 인구 차에도 불구하고 유목국가가 농경국가를 넘볼수 있었던 이유를 '프로틴'에서 찾더군요. 농경은 인구를 안정적으로 부양하기에는 효율적인 시스템이지만 구성원들의 영양상태를 본다면 수렵이나 목축에 비해서 오히로 열등하다는게 요지였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냥을 하고 다니던 크로마뇽인의 평균키가 170은 됐다는데 불과 200년 정도 전까지만해도 농경민족의 키는 150이 될랑말랑했습니다. 농경민족의 군대는 결국 농민이고 이들은 몽골과 같은 유목민들과 신체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던거죠. 어릴때부터 습득한 전투의 기술과 기마부대의 강함도 물론 유목민들을 강하게 해줬지만 무엇보다도 신체의 강함이 중요하던 냉병기 시절에 이런 피지컬의 차이는 농경사회에 대한 유목민의 우위를 보장해 줬습니다. 근대시기에 이르러서 화병기의 발전은 이런 신체의 차이를 상당부분 극복시켜줬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본질적으로 화학비료와 농업기술의 발달으로 인류는 식량의 엄청난 잉여생산을 하게됩니다. 이러한 잉여농산물은 가축에게 먹여지면서 단백질로 전환되게 되었고 종국에는 단백질 공급이 유목민들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유목민의 강함을 지탱해주던 신체적 우위는 없어지게 된거죠.(오히려 역전됐을지도?) 이런 영향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목민이 정주민족을 압도하는 일은 다시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19/01/22 22:33
저도 단백질이 중요한 매개변수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정주민족이 유목민족 만큼의, 이상의 프로틴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유목 패권의 재 등장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유목민이 정주민족을 압도하는 일이 '다시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CapitalismHQ님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제가 궁금해 하는 유목 패권의 재등장에 대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근대화와 도시화는 불가역적이다"라고 단언하시는데, 저는 미래의 예측에 관하여는 모든 종류의 단언이 신중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다 못해 정말로 영화 매드 맥스와 같은 식으로 역사가 퇴행할 가능성도 0%는 아닌 것 같구요. 또한 제가 생각하는 유목 패권의 특성은, 꼭 "말" 타면서 "양" 치는 "훈족"의 재현은 아닙니다. 미래의 유목 세력은, 전혀 다른 것을 타면서, 전혀 다른 것을 기르면서, 그러면서도 정주하지 않고 부평초처럼 떠 도는 유목민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19/01/23 05:29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크크... 보고나니 하고 싶은 말이 두 가지로 갈려서, 1번과 2번으로 적겠습니다.
1. 창세기 11장 6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이거 참 재미있는 문장 아니겠습니까? 절대신이라는 존재가, 바벨탑을 보자마자 '이러다간 인간을 막을 수가 없다.' 라면서 두려움에 떤다는 것이. 그리고 이들의 '종'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를 포함해서, 기존 가나안인들을 '정복'하는 사람들로 그리면서, 이상하게 전쟁에 대한 탓은 언급하신 가인의 아들인 두발가인 (투발 카인)에게 돌리지요. 전쟁의 무기를 만드는 자라고 가인의 혈통을 비난하면서요. 아무튼 일정 시기가 되면, '도시와 왕국에 대한 천벌' 같이 튀어나와서 이들을 '징벌'하던 유목민들이, 갑자기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사라진 것에 대해서 아루에님께서는 꽤나, 신비함을 느끼시는 것 같네요. 당혹감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글에서 '현대화'는 다차원적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먼. 제가 생각하기에, '현대' 즉 모더니티(Modernity)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차원적인 해석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과연 '현대화'가 다차원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산업혁명이라는 하나의 움직임이 지구를 삼킨 것 같은데 말이지요. 굳이 유목제국들 말고도, 중화 관료문명, 중동의 칼리프 문명, 아즈텍 제국 같은 '비서구' 강대국들은 '현대'의 문턱에서 몰락했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윗분들이 많이 적어두셨듯이,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의 원투펀치였고요. 하지만 아루에님께서는 '도시화'라는 요소를 통해서, 상업혁명과 산업혁명의 원동력인 '부르주아지'를 분리해내고자 하셨다는 것이 보입니다. "모두가 도시 주민이고, 도시 주민이 아닌 이는 어디에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적어도 현대 국가는 그렇다고 전제한다." 이 부분이, 현대 문명이 자리잡은 자본가들의 자본주의적인 '현대'의 토양이란 과연 무엇인지. 또한 모범 부르주아지가 '현대'의 이상적인 인간인 지금 시대 자체에 대한 정통성과 당위성의 물음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현대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엄청난 시대의 반골이라, 비슷한 질문을 가지고 온갖 역사에 남겨진 흔적을 들여다보고는 했습니다. 소련은 실패했지요. 이것은 서구의 프로파간다가 아닙니다. 분명 소련은 억압적인 형태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니, 오히려 결말이 파국이 아니었다면, 그것 나름대로 더 큰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문명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하던 근동의 최고 산출물이던 '이슬람' 역시, 근대의 벽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근대제국이었지만 '유럽의 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오스만 제국이 있었겠지요. 중동은 이슬람의 태동인 칼리프 시대부터, '유목제국'의 형태를 어느 정도 수용했고, 그 이전 고대부터 에피탈, 엘람, 파르티아 같이 지배층들은 항상 외부에서 말을 타고 들어왔지요. 하지만, 동북아의 청나라가 결국 유목 군사 엘리트였던 팔기군의 쇠퇴로 몰락했듯이, 오스만 역시, 정복왕조에 특화된 군사 엘리트였던 예니체리가, 술레이만 대제 이후 정주제국이 된 이후 부패하면서 끝내 '서구화'를 막았지요. 어쩌면 몽골제국과 동일한 서사일지도 모릅니다. 유목으로 시작해서 그렇게 거대했고, 그러니 결국 결말은 파국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면 자본주의와 현대 문명에 대척할 개념은 남지조차 못한 것일까요? '도시'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왜 그렇게 비위생적이고, 사람들이 문란해지며 (범죄율 증가, 소란 증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곳에 몰려드는가? 저는 미셸 푸코의 '도시, 문명, 권력'을 하나로 묶는 이야기 체제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개인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아루에님께서 "주토피아"를 본적이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왜 짐승들이, 자기 본능을 거세하고 살아야해서, 온갖 정신병이 넘쳐흐르는 도시에 좋다고 모이는가? 푸코는 일단, 도시와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지만, 동시에 도시와 문명이 사람을 무작정 '홀리고' 있다고만은 보지 않습니다. 도시는 지적 노동자 (인텔리겐치아)를 부여하며, 그들은 삶의 의미를 대중들에게 주거든요. 인텔리겐치아는 신을 믿으라는 성직자일 뿐만 아니라, 부서별로 성과를 비교해서 닥달하는 부장님이고, 집에 가서 읽고 잘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작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없는 야생은 얼마나 '삶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부족할까요? 도시의 불빛은 태초부터 원시인들을 홀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유목민 칸들이 왜 '타락'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연상되지 않습니까? 멀리 광야에 농부가 하나 있습니다. 싹이 자라고, 수확하는 것은 삶의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일어나게 만드니까요. 신의 경지이지요. 게임 스타뷰밸리, 테라리아, 마인크래프트 정도만 되도 재미있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만일 옆의 도시에서, 거대한 국가가 존재하고, 그 거대한 체제의 관료, 수백과 수천을 조종하고, 그들의 언어를 통제하며, 작물을 분배하는 일은 더 큰 '권력' 즉, '더욱 짜릿한 경험'입니다. 물론 신념 체제가 다르다면, 그런 '도시'를 혐오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단자들을 정복하는 것은 도시와 제국, 어떤 '헤게모니 (패권)'의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런 '사상'누각은 대안을 혐오하거든요. (본래 '모래 위'라는 뜻이지만, 저는 모든 '사상'은 곧 사상누각이라고 봅니다.) 다른 왕, 다른 달력, 다른 종교행사는 체제의 붕괴를 일으키니, 일종의 면역활동으로라도 그런 질병을 억누를 능동적인 필요가 생깁니다. 신은 악신과 악마에 대한 투쟁에서 신성함을 가지는 것인것처럼, 도시의 부조리는 결국 도시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극복될 수 있겠지요. 보다 고차원적인 재화인 이념이 그런 작용을 했다고 봅니다. 도시와 왕국은 생각을 길러내지요. 입신양명이란 결국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권력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더욱 더 큰 자아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이 과정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유교의 군자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인', 이슬람의 '울레마'만 봐도요. 불교가 강했던 고려 시대에 승려는 임금들의 정치 조언자였습니다. 주류 종교와 정치는 어느 시공간에서도 함께했습니다. 권력을 담는 그릇으로서 유목제국과 정주제국이 경쟁했고, 결국 더 억센 질그릇이 다른 질그릇을 깨부순 것이겠죠. 이념과 권력과 전능함에 대한 욕구가 인간역사의 한 기둥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는 푸코가 우려하듯이 '하나의 거대한 회로'입니다. 인간은 회로의 구성물이고, 그 회로는 전기 회로가 아니라 권력의 회로입니다. 사람들은 부르주아지가 만든 현대문명에서 무한히 욕심을 가집니다. 왜냐면 우리는 기존의 한계를 극복했거든요. 로빈 후드는 영국 존 왕의 사냥터에서 의적활동을 합니다. 중세의 왕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천년왕국'을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천년왕국을 원했겠지만, 중세의 왕이라면 모름지기 누구냐 사냥터를 가졌고, 사냥터조차 자신들이 완벽히 지배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그들은 겸허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다릅니다. 인터넷을 낼 돈이 있으면, 지구 건너편에 자신의 메세지를 남길 수 있습니다. 예산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정치체제를 구축시키고, 영속시킬 수 있으며, 달나라에 인류의 종자를 퍼트리고, 화성으로 갈 수 있습니다. SF작가나 기계공학기술자도 아닌 대중이 알파고의 미래에 환호하고, 다이슨 스피어, 우주 엘리베이터를 논합니다. 이는 곧 제국주의입니다. 단순히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는 소시민의 꿈이 아닙니다. 더 큰 체제의 신민으로서 무언가를 바라는 그런 이념적인 쾌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꼬박꼬박 다니고 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종교에 심취해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유발 하라리의 '사피언스'에서 나왔던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현대 종교인들은, 산업혁명 이전의 중국인들만큼이나 인간의 역사에서 무의미 'Irreverent' 합니다." 영어의 Irreverent는 한국어의 무의미보다 더 강한 어감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게임 문명 시리즈를 해본 적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문명 시리즈는, 마지막 승리 조건을 향해서 모든 문명이 시작점에서 달려나가는 보드 게임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플레이어가 컴퓨터의 문명에게 큰 타격을 입혀서, 앞으로 어떤 승리 조건을 노리던, 이제 '걱정할 필요' 아니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 'Irreverent' 라는 개념에 해당합니다. "Human Need Not Apply". 인간 필요 없습니다. 2014년 유튜브에 올라왔던 비디오의 제목입니다. 기계로 모든 직업이 대체된 미래를 위해서 사람들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한다는 주제를 다룬 소설이었습니다. 직업을 인간에서 뺏어가면, 분배의 문제만 해결되면 하늘에 있다고 종교인들이 선전했던 천국이 지상에 열릴까요? 저는 회의적으로 봅니다. 인간은 점점 보이지 않는 회로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인간성을 잃고 있습니다. 마치 스타트랙의 보그 'Borg' 외계인이나, 좀더 전통적인 흡혈귀나 늑대인간의 이야기처럼요. 저는 여기서 '인간성'을 '전통적인 인간'의 특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한계'를 느끼지도 않고, 더 많은 것을 바래도 두려움이 없으며, 얼굴을 보지 않은 사람을 믿고 지지하며, 늙어 죽는 것에 거부하고,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으면 자신의 메세지가 잘못 전달되는 것에 두려움이 없지요. 누군가를 이것을 포스트모너니티라고 부릅니다. 보다 보수적인 저같은 사람은, '말세'라고도 하고요. 우리는 알파고에 충성을 바칩니다. 1984는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공포소설'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어떤 '사상'을 만들었는데, 그게 사람을 뛰어넘어서 재생산되면, 그 '사람 아닌 우리 자식'에게 뭐라고 말해야할까요? 1984의 배경이 되는 오세아니아에는 '영사 (Ingsoc)'이라는 공산주의(?)가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지요. 그리고 자연스러운 인간은 이미 영사에게 불안 요소로 이미 사라진 뒤의 이야기입니다. '영사'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의 인공지능이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결국 이데올로기와 인공지능은, (그리고 인간은) '알고리즘'이니까요.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고 오히려 서로 말통하기 좋고, 호환성되기 편하게 서로 나체로 가져다놓으면 비교하기가 매우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이것을 진보라고 부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칼로리의 지배자, 코딩의 지배자, '알고리즘'의 지배자가 되려고 합니다. 우주의 원리를 이해했다고 하고, 인류가 전지전능할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알고리즘이라니! 인류가 인공지능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인간이라는 화합물을 걱정해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사람들에게 잠시 멈추고,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전능한 존재치고, 사람 말이 통하는 존재는 없거든요. 사람끼리도 말이 안통하는데 허참. 그래서 유목민을 돌아보자는 아루에님의 글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죽어간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사람이 살아갈 산 방법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2. 문학작품이 보통 우주로 가고, 판타지 세계로 가고 그럽니다만, 사실 하고 싶은 얘기는 어디까지나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고, 듣고 있는 주체는 '현실의 독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수 많은 작품들이, 이런 저런 기존 이야기적인 요소를 짜집어서 이야기를 만들지요. 그리고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유목민의 상징적인 문화코드가 이런 저런 매체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우주 서부극을 정립시킨 '파이어플라이 (Firefly)' 같은 경우에도, '리버 (Reaver)'라는 우주 '인디언'이 등장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리버에 대해서 재미있는 농담이 있습니다. 딱 봐도 리버는 '인준 (Injun)' 그러니까, '서부극의 야만적인 인디언'이거든요. 백인 서부극 제작자들이 좋아했던, 말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마을을 습격해서 아낙네와 아이들을 채가서 잡아먹고, 사람 머릿가죽을 모으고, 가끔은 두르고 다니는 그런 야만인이요. 그런데 '인디언'들이 리버들의 묘사가 조금 '불편'하다고 코멘트를 남기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마세요. 리버는 인디언들의 왜곡된 모습이 아니라. 정말 작품 세계 속에 등장하는 야만적인 식인 괴물이니까요.'라고 대답했지요. 아이러니하지않습니까? 아무튼 간에, 파이어플라이와 그 밖의 다양한 선구자들이 보여줬듯이, 우주공간은 서부시대 또는 인간의 '개척'시대 (굳이 미서부 뿐만 아니라,문명의 태초부터 시작되었던, 울타리 안과 밖을 가르는 거의 '모든' 시대)와 연관성이 많습니다. 최소한의 부양단위가 되는 '도시' 비슷한 몇몇 중심지가 있고, 그 밖의 '공허'에는 사람이 작은 규모로 살 수가 없거든요. 이게 실제로 우주 개척시대가 되면, '상상하고 배운대로' 반복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현실적인' 형태로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과연 유목 세력이 미래에 나타날 모습일지는, 조금 '문학적'으로 '문풍당당'하게 여유를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이야기긴 하네요. 부르주아지의 현대를 극복한 형태의, 어떤 대안 문명이, 우주의 공허를 헤쳐나가는 것, SF가 현대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결국 외계인을 소환하던 용을 부리던, 판타지는 결국 현실적인 상징성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온갖 재미있는 추억과 생각거리를 한번씩 돌아보게 만든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19/01/23 08:27
그나마 가장 가까운 것이 각종 미래를 다룬 소설과 게임에서 나오는 기업국가 정도겠죠
고정적인 생산기지를 가지지 못한, 강력한 무력을 지닌 완전한 유목민 집단 따윈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생산력 면에서 절대적인 차이가 나니까요. 현 국가들이 모두 망하고 그 이후의 '힘의 공백기'에 유목군단들이 일시적으로 번성할 수는 있겠지만 이후 정주국가들이 재등장하면 개발릴 운명입니다. 역시 생산력 면에서 상대가 안될 수밖에 없어요
19/01/23 15:12
기술의 발전으로 소수의 인력으로도 막강한 화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면서
기동성을 통한 우회하여 빈집털기 등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는 자동차와 탱크의 등장으로 더더욱 심해졌구요 인류가 지구에만 있는 동안에는 유목민으로 칭할 수 있는 존재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겁니다. 반면 우주로 진출하면 자신이 본거지는 숨기고 약탈하는 우주해적은 등장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장을 해야하며 주기적으로 이를 보수해야합니다. 이게 본거지가 없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주모함이 있다하더라도 그 세력이 크기는 어려울 것 같구요 정리하자면 유랑민 수준의 우주해적은 가능 할 것 같지만 이게 정주민보다 강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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