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업계.... 아니 학계에서 소셜이란 social activity의 준말로, 동료 연구자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인맥을 형성하는 행위 전반을 일컫습니다. 간단히 말해 친목질이죠. 다만 소셜이 일반적인 친목질과 다른 것은, 친목 도모가 반쯤은 강제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연을 만들어 놓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유리해지기 때문에, 어떻게든 대가들과 한마디라도 붙여 보려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물론 저도 그들 중 하나였고요.
오늘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미소를 지으면서 세로토닌과 알츠하이머와 억제성 뉴런에 대해서 듣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가 저를 툭툭 치더군요.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인도계(처럼 보이는) 형님이었습니다.
형님이 매력적인 저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Excuse me, do you know Faker?'
.........................네????
- 어...저한테 하신 말씀이신가요?
- 당연하지! 나 skt 팬이야. 니가 지금 입고 있는거 skt 후드잖아!
아하, 그러고보니 제가 입고 있던 후드티가 바로 페이커가 파 살때 입던 바로 그 후드였더라고요.
팬심+디자인이 이뻐서 샀고, 보온성이 좋아서 자주 입는데, 이걸 그 인도 형이 알아보고 말을 건 것이었습니다!
- 와! 진짜 반가워요. 어떻게 알아보셨대. 저도 엄청난 skt 팬이에요. 2013년에 월챔 우승할때부터 팬이었어요!
-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 이번에 skt가 팀 새로 짠거 봤어? 완전 슈퍼팀이던데.
- 당연히 봤죠. 어떻게 이런 선수들을 모았는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 칸, 마타, 테디.... 또 누가 있더라? 아 클리드. 나 걔는 몰랐는데 진짜 잘하더라.
- 맞아요 크크 오늘 아침에 한 경기 보셨어요? 아프리카랑 했는데 클리드가...
- 오ㅡ 잠깐만. 스포일러 하지 마. 나 그거 이따가 볼거야. 여기 오느라 다 챙겨보진 못했어.
인도 형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skt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젠-지에서 정글러가 새로 왔는데 아직 한번도 못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 페이커가 한 챔피언에 꽃히면 계속 그것만 픽한다는것도 알고 있더라고요. 그야말로 [심상정] 그 자체...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오늘 있었던 실화입니다.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 너 페이커 실제로 본적 있어?
- 당연하죠. 서울 e스포츠 스타디움에 직관가서 몇 번 봤어요. 싸인도 받았다구요.
- 부럽다..... 저번에 미국에 왔을때 봤었어야 하는데. 언제 꼭 한번 한국에 가고싶네.
- 꼭 한번 오세요. 제가 가이드해드릴게요 크크
- 대단해!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재미있었어. See you later!
- 형님도 살펴가십쇼!
기본적으로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리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무서워하는 햇병아리인 저에게, 소셜은 언제나 엄청난 압박이었고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도 형님과의 대화는 정말 외국에서 처음 경험해 본 순수하게 즐거운 대화였어요. 다음에 어떤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부족한 영어 실력이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긴장도 압박감도 없이, 순수한 덕후의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너무나도 재미있었어요.
이게 소셜이구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라면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이렇게 즐거운 대화가 가능하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소셜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소셜을 어려워했던 이유는........ 아하, 내가 내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덕후가 아니라서 그랬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짝 좌절했습니다. 물론 소셜을 어려워하는 핑계를 대려면 댈 수야 있습니다. 아직 영어가 부족해서, 내 연구가 자신이 없어서, 성격이 내향적이라서........ 하지만 주제가 세로토닌에서 페이커로 바뀌었을 뿐인데, 신나서 얘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해 보니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과학 덕후가 아니었나 봐요.
사실 뭐, 완전히 모르고 있던 건 아닙니다. 몇몇 교수님들은 잠도 줄여가면서 연구한다던데, 저는 여전히 논문읽는것보다 게임하는게 좋고 피지알 보는게 좋고. 시간 많이 빼앗겨서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는 핸드폰 게임은 3년째 하고 있고. 그래도 화장실 갈 때 논문 들고가고 샤워할 때 연구 생각하니까 나정도면 그래도 덕후라고 할 수 있는 축에 속하지 않나....... 스스로 그렇게 자기위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교수님 죄송합니다. 전 페이커가 더 좋아요.
아! 인정해 버리니 마음이 편하네요. 난 과학 덕후가 아니었어! 페이커 짱짱맨!
덕후가 원한다고 맘대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생긴대로 살아야죠. 그게 참 슬픈거 같아요. 되고 싶다고 맘대로 못 되는 것.
그래도, 저도 언젠가는 찐하게 덕통사고가 나서, 그래서 덕후 코스프레가 아닌 진짜 덕후가 된다면....
그러면 참 좋겠네요.
.....페이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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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실제로 대화를 나눴을 영어에는 한국어와 같은 존대법이 없는데
왜 번역문에선 글쓴이(한국인)만 존대말 쓰고 외국인은 반말 쓰는걸까요?
둘다 똑같이 존대 쓰거나 아니면 반말 쓰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냥 키 190 넘고 덩치 크면 나이 어려도 '형님'이라서 존대 쓰세요? 사대주의? 피지컬적으로 우세하면 무조건 형??
우리나라에서 흔히들 "흑형"이라는 단어 많이 쓰는데 이것도 인종차별인거 아시죠?
샘 오취리가 예전에 방송 나와서 "흑형"이라고 좀 안 불러줬으면 좋겠다, 인종차별이다라고 한적도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신다면 racism에 아주 민감해야할텐데 의문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