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1/03 14:52:59
Name chilling
Subject [일반] 나도 그런 순수함이 있었던 때가 있었지
우선 신재민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폭로?한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공적인 영역에서의 비판이지 개인의 삶은 다른 층위에 있기에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그의 글에서 20대의 ‘나’와 꽤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치, 경제 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입시도 예체능으로 준비하던 고등학생이 소위 사회과학을 배운다는 학부에 입학하며 참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배우는 게 그런 것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경제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크고,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기껏 20대 초반의 병아리가 좁은 식견으로 내 판단이 항상 옳다는 착각에 빠져 강변하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군대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군조직 특성상 티를 내지 않고 일은 열심히 해서 큰 사고 없이 전역했지만, 군대 내의 의사결정 시스템, 업무 방식에 대해 큰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 군 간부들은 일을 저렇게 처리하지?”, “상식적으로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런 종류의 생각들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종합적인 판단 없이 나만 옳다고 생각했다고 느낍니다만.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걸 받으며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 조직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 넓어지긴 했으나 아직 반골의 물이 좀 덜 빠졌던 것 같아요. 소위 중간관리자 이상의 직책에서 행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들을 보며 무능한 고연봉 루팡들의 집합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재민과 같이 5년을 버티지 못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로는 모든 의사결정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재민과 또래로 더 이상 20대와 같이 바보지만 순수한 열정은 넘치는 그런 나이도 아니구요. 나이도 먹고 이런저런 위치에서 여러 입장을 겪어보니 조금은 알겠어요. 균형감 있고, 여러 측면을 다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 면만 보고 있을 때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죠. 설익었는데 자존심만 강한 바보랑 같이 일하던 전 동료들이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물론 아직도 태생적인 반골 기질이 남아있을 겁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제가 존재하는 곳엔 그 흔적이 있을 거에요. 그래서 신재민의 글을 보며 다시 나를 점검해봅니다. 제 글을 그분이 읽을 리는 없겠지만,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고 이번 일을 통해 깨닫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돌아볼게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1/03 14:59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chilling
19/01/03 15: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페스티
19/01/03 15:10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치기어린 행동이 당시에는 정말 알기 힘들죠.
chilling
19/01/03 15:46
수정 아이콘
배우고 느끼며 성장하면 좋은 어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대화하고 설득하기 어려운 반골로 계속 남는 것이겠죠.
19/01/03 16:04
수정 아이콘
뜨끔하게 됩니다..잘읽었습니다.
chilling
19/01/03 18:28
수정 아이콘
저도 뜨끔하며 그런 적이 없는지 돌아보게 되더군요. 뭐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스타카토
19/01/03 16:04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저도 20대 초반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 불만들이 가득차 있었죠.
종합적 판단없는 나만 옳다는 교만한 생각이었죠...
이제 책임지는 자리에 서서 보니 그것이 얼마나 어린 생각이었는지 느껴봅니다.
그 어린생각이 큰 힘을 갖을때도 있지만 잘못 쓰일땐 얼마나 나쁜 결과를 얻는지 이제야 보이더군요.
웹툰 송곳의 "서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라는 말이 참 의미깊다는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생각 역시 시간이 더 들면 역시 또다른 어린생각이 되겠죠
오늘도 겸손해지기 위해 노력해봅니다. 잘은 안되지만.
chilling
19/01/03 18:29
수정 아이콘
저도 동감합니다. '잘 되진 않지만' 겸손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려고 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9616 [일반] [잡상] 러시아 2월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6] aurelius6267 19/01/04 6267 1
79614 [일반] 나는 물수건이 싫었다. [20] 혜우-惠雨8948 19/01/04 8948 43
79613 [일반] 신재민 전 사무관 건에 대해서 김동연 전 부총리가 글을 썼습니다 [47] 홍승식17324 19/01/03 17324 12
79612 [일반] 주 이탈리아 북한 대사 대리가 잠적했다고 합니다. [13] 홍승식12676 19/01/03 12676 1
79611 [일반] 디즈니의 새로운 세계에서 클리셰를 보여주며 보여주지 않다.(주먹왕 랄프 노스포 리뷰) [21] 치열하게8218 19/01/03 8218 1
79610 [일반] 넥슨 김정주 회장, 지분 전량 매각설 [99] 光海16668 19/01/03 16668 0
79609 [일반] 여론 참여 심사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24] jjohny=쿠마6579 19/01/03 6579 5
79608 [일반] 김태우-신재민의 신뢰도를 깎아먹었던 하나의 이슈 - 김정주 [13] Davi4ever8893 19/01/03 8893 3
79607 [일반] 자게, 스연게 및 건게/여참심 운영위원을 모집합니다 [11] jjohny=쿠마6403 18/12/28 6403 1
79606 [일반] 신재민 전 사무관의 유서(로 추정되는 글)과 관련해 민변측이 공식적으로 부인했습니다. [41] 원시제10315 19/01/03 10315 4
79605 [일반] 자유한국당 “신재민, 광주민주화운동 이래 최대 양심고백” [87] aurelius11890 19/01/03 11890 11
79604 [일반]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변화와 함께 앞으로 한국은 어떻게 될까요? [44] 벌써2년7148 19/01/03 7148 0
79603 [일반] (본문 약스포) 블랙미러 최고의 에피소드를 뽑아보아요. [51] OrBef21099 19/01/03 21099 4
79602 [일반] 우먼스 플레인 16회가 올라왔습니다. [60] 마재9338 19/01/03 9338 15
79601 [일반] 석 달째 추리소설을 읽으며 - 스포 無 [10] 잠잘까7910 19/01/03 7910 7
79600 [일반] 어떤 민주당의원의 한심한 내로남불 [96] 차오루13213 19/01/03 13213 55
79599 [일반] 나도 그런 순수함이 있었던 때가 있었지 [8] chilling5023 19/01/03 5023 12
79598 [일반] 로아 디스트로이어 사태로 생각해본 최근의 인터넷 분위기 [53] 킬리언 머피9115 19/01/03 9115 0
79597 [일반] 신재민 전 사무관 자살암시 후 잠적 - 이후 모텔에서 발견. 무사합니다. [329] 츠라빈스카야30307 19/01/03 30307 2
79596 [일반] 어떤 공무원 사회 [34] 9192 19/01/03 9192 19
79595 [일반] 여러분께서 가장 즐겨보는 주간지/매체는 무엇인가요? [34] aurelius6725 19/01/03 6725 9
79594 [일반] 이순자 "내 남편 전두환은 민주주의 아버지" [208] 모모스201318003 19/01/02 18003 3
79592 [일반] 미국판 복면가왕 1화 방영 임박 [21] 타카이10892 19/01/02 1089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