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고려를 멸망 시키고 조선을 세울 때, 그의 손에 있는 무력이 '동북면 군사세력' 이라면, 중앙 출신의 여러 급진적 유학자들은 이성계의 두뇌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이 두 세력이 합쳐져서 고려 말의 최대 당파인 '이성계파' 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이성계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정도전 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조선왕조에서 백안시 당했으나 현대에 들어 재평가를 받았고, 수많은 매체에서 다뤄지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 인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말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성계 파에서 정도전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정도전 이상으로 존재감을 보이는 인물이 바로 '조준' 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가장 드러내놓고 적대하며 반감을 표시하던 인물이 조준이었고, 고려 왕조 최후의 보루였던 정몽주가 일당을 모아 이성계파를 치려 할때도 "가장 먼저 이성계의 측근인 조준 등을 쳐야 한다." 며 나섰을 정도로 여말 당시의 사료를 살펴보면 조준의 존재감이 상당합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것은, 정도전과 조준이라는 두 인물 중에 누가 더 정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던 인물이었을까? 라는 점입니다.
우선 먼저 들어가기에 앞서 살펴볼 만한 논문 주장이 있습니다. 주장의 근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여기에 인용하는데, 아래쪽에 요약을 해놓았으니 굳이 다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약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그 유명한 고려 말 '전제개혁' 논의에서 정도전은 의외로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반면 조준의 존재감은 절대적입니다. 정도전이 존재감을 발휘하는 시기는(정확히 말해서 존재감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개혁파의 넘버원 주자 격으로 존재감이 발휘되는 시기는) 오히려 대중들에게 사전혁파로 유명한 전제개혁 보다 그 이후 '척불 운동' 즉 반 불교 운동 당시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또 묘하게도 조준의 전제개혁 논의에서 정도전의 영향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반면에, 정도전의 '척불' 운동에서 반대로 조준의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같이 척불 운동하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고 심지어 조준은 척불에 관한 이야기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색을 통해 보는 고려 말기 성리학자들의 '유화적 불교관'
유교는 기본적으로 반 불교 성향이 있지만, 고려 말의 성리학자들은 의외로 불교계와 비교적 가까운 입장이었습니다. 애초에 고려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막대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구요. 물론, 가깝다고 해서 무슨 불교를 찬양한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불교 계 인사들과 가까웠던 목은 이색도 "불교가 좋은건 아니지만 취할 게 아예 없지는 않다." 정도로 일종의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먹는 불량식품' 정도의 인식이긴 하지만, 여하간 접하는걸 아예 꺼리진 않았고 정몽주 등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 쪽의 불교계 인사들과도 교류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고려 말 당시의 정세와 비교해서 정도전은 유독 강경한 반 불교, 즉 '척불론자' 였습니다. 여기에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건은 물론 '불씨잡변' 같은 책으로 대표되는 정도전 본인의 사상도 있겠지만은-- 이걸 현실정치에서 적용하는 와중에서 척불론 주장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느냐, 즉 조준 등이 전제개혁 논의를 주도하며 개혁파의 기수가 되어가는 와중에, 정도전 역시 개혁파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척불론을 주장한게 아닌가, 이를 위해 교우관계까지 끊어버리는 열성을 보이면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이런 주장을 해당 논문에서 하더군요.
즉,
1. 개혁파의 양대 기수인 정도전과 조준은 시문 등으로 살펴보아도, 이전부터 별다른 교우 관계, 친분이 없었음
2. 초기 개혁파의 주된 쟁점인 '전제개혁' 과정에서 개혁파 쪽에서 이를 주도하는 건 조준, 그리고 온건파에서는 이색이 중심으로 나서 논쟁이 펼쳐지고 조준의 존재감이 매우 강해짐.
3. 그 과정에서 정도전의 존재감은 비교적 미미. 오히려 이 당시만 해도 정도전은 조준과 교우를 하기보다도 반대인 온건파의 유학자들과 교우를 계속 이어감.
4. 이후 정도전이 척불 운동을 전개함. 그때까지 이어지던 온건파와의 교우관계 역시 이 무렵 정도전이 자신의 손으로 파토내버림.
5. 척불운동을 하며 불교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이색을 정도전이 맹렬하게 공격하고 심지어 목을 벨 것을 요구하기까지 함.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정도전의 존재감이 개혁파 내에서 매우 커짐.
6. 정도전의 척불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반대로 조준의 존재감이 크게 보이지 않음. 조준 본인이 적극적으로 척불 사상을 보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음.
즉, 여러 매체에서 정도전과 조준을 '혁명 동지'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잦은데,
정도전과 조준은 동지 같은 관계라기보다는 이성계라는 오너를 두고, 치열하게 자기 정책을 내면서 주도권 다툼을 펼치던 사이가 아니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이 논문은 '때가 때이니만큼 삼봉 선생을 재조명해보자.' 라고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주도로 편찬한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이라는 책에 실렸습니다. 즉 기본적으로 정도전을 중심으로 다루는 쪽에서 나왔던 주장 중 하나 입니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일단 넘어가고... 그런 베이스만 일단 습득한채로 다음 부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일단 중요한건, 저기서 말한 '전제개혁에서 정도전의 존재감이 얆았다' 라는 부분입니다. 그건 사실일까요?
..고려사 '식화지' 에 수록된 조준의 상서문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조준은 사전혁파론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상서문은 다른 사전혁파론자들이 올린 상서문의 원형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 이성계와 조준, 정도전의 조선왕조 개창, pp.207. 김당택 저
조준을 위시한 전제개혁론자들은....
─ 위와 동일한 책, pp.207
정도전은 조선 전기 제도의 '설계자' 로 널리 칭송되지만, 실제로 개혁의 청사진은 1388년 여름 2개의 주요한 상소를 올린 조준이 설계했다.
─ 조선왕조의 기원, pp, 291. 존 B. 던컨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pp.81~82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저
고려말 조준과 정도전의 개혁 방안. 유창규
"....신이 남에게 비난 듣는 일은 이루 다 아뢰기 어렵고 전하께서 잘 아시는 것만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략) 사전을 개혁한 건의는 신이 처음에 계획하기를, 토지는 모두 국유(國有)로 만들어서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고 군량미도 넉넉하게 하며, 사대부의 녹(祿)도 주고 군역(軍役)들도 먹여서 상하에 모자라는 근심이 없게 하려는 것이 신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결국 시행되지 않으므로 그 즉시 전하께 “제조관(提調官)을 사면하게 해주소서.”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토지 분배가 고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원망은 모두 신에게로 돌아옵니다.
─ 삼봉집, 제 7권, 습유(拾遺) 전(箋), 정도전 본인의 말, "내가 한거 아닌데 왜 내가 다 욕을 먹는가."
고려 말 여러 정치 개혁 중에 가장 직접적으로 중점이 되는 것이 바로 토지 개혁, 즉 사전혁파에 관한 문제고,
보통 이 사전개혁이라는 '업적' 에 있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바로 정도전 입니다. 조준, 남은 등이 뒤에 떠오르기는 하나, '정도전 등과 함께...' 라는 식으로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분야를 살피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사전혁파 논의에 대해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을 바로 조준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정도전의 입지는 생각 이상으로 미미 합니다. 어찌보면 가장 큰 행적이 나서서 직접 무엇을 했다기 보다도, 이색 등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정몽주가 중도를 지킬 때 조준에 협조 했다 정도 이니 말입니다. 즉, 제대로 말하자면 '정도전이 조준 등과....' 가 아니라, '조준이 정도전 등과....' 라고 해야 맞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수 많은 사람들이 말하던 정도전의 토지 문제에 대한, 여러 현대 매체에서는 거의 '마르크스주의자' 수준으로 까지 묘사되는데 영향을 준 그런 급진적인 사상은 무어란 말인가? 그게 다 거짓말이라는건가?
아닙니다. 정도전이 토지 문제에 대해 극단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당대 시대상에 비해 극단적인 시각' = '시대를 초월한 영걸' 이런식의 이야기는 잘 생각해보면, 반대로 보자면 '당대 시대상에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 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비록 정도전은 권문세족의 반대에 의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자신이 주장한 토지개혁 방안이 실패한 것처럼 말 하고 있으나, 이성계 세력 가운데서도 모두가 정도전이 의도한 바의 토지개혁 방안에 찬성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서 보았듯이 조준의 경우만 보아도 정도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고려말 사전의 폐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말 조준과 정도전의 개혁 방안. 유창규
정도전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로 꼽혀왔다. 그 의 사상적 검토를 통하여 고려말 개혁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높게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토지제도에 대한 그의 인식은 공적인 것을 강조한 나머지 당시의 추세나 개혁의 노선에 적합한 것이었다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일부 세력가의 소유권에 바탕을 둔 불법적인 토지 확대를 막아보고, 일반 농민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그의 노력은 사전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당시 사회를 바꿔보려는 의도로 이해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국가의 토지 관리라는 공적인 틀만을 너무 이상적인 형태로 파악하여 개인이 직접 경영할 수 있는 토지 이외의 사유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차원에까지 이른 것이다.
고려말 조준과 정도전의 개혁 방안. 유창규
정도전에게 원대하고 급진적인 개혁 방안이 있었다고 한들, 최소한 토지 문제에 관련해서 정도전은 '이론가' 의 영역에 머물렀지 '실무자' 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애초에 정도전 본인조차도 "그런 생각이 있기는 한데..." 였지, 무슨 자신의 방안을 가지고 계속 들이대고 박살나다가 안되서 결국 중간타협책으로 계민수전 대신 과전법을 했다, (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식)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이성계파 내에서도 별 공감을 못 받았을테고, 정도전 본인조차도 별로 될것 같지도 않으니, 토지 문제에 관해서는 애초에 정도전은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조금 뒤에 서서 전면에서 나서는 조준을 지지하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지, 계민수전이라는 식의 논의가 전제개혁 논의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며 다루어지지도 못했습니다. 즉, 말 그대로 '이론으로만 남은' 이야기 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정도전 본인조차도 "요즘 왜 이리 사람들이 매사에 관해 내 욕을 많이하나" 라고 이성계에게 투덜 거리며, "나한테 다른 생각이 있기는 했는데, 그거 한 적도 없고, 그래서 난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왜 사람들은 내가 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다 싸잡아서 나에게 욕을 하는건가." 하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자기가 주도하지도 않았고 별로 열성적이지도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겁니다.
즉 고려 말 위화도 회군 이후 가장 중심적인 개혁 논의였던 토지 문제에 관해선 기록으로 보건 뭐로 보건,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고 그 관련 논의를 중심에 서서 이끌었던 인물은 조준이었습니다. 사실 사전혁파 관련하여 고려사 식화지 같은 관련 사료를 조금 보기만 해도 그 부분은 너무나도 명명백백 해서 다른 말이 나올 것도 없습니다. 다만 대중적 인식에서 정도전 >>>>>>>>>>>>>>> 조준이므로, 그 모든게 정도전이 다 중심에서 한 일, 이라고 묻어가지만...
정도전을 중심적으로 보며, 정도전의 재조명을 목표로 한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한영우 저) 같은 책에서도 전면에서 이를 시행한 사람이 조준이라는 것은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다만 '그 뒤에서 보이지 않게 정도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 는 식으로 흡사 조준이 정도전의 똘마니(?) 같은 느낌으로 묘사하긴 하지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근거 제시가 없고, 책 성향 자체가 정도전에게 우호적이고 정도전 중심적 이라는걸 고려해야...
고려말 조준과 정도전의 개혁 방안. 유창규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 멸망과 조선 탄생' 까지 조준은 정도전에 전혀 밀리지 않은 입지와 입장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조준이 이성계 파에서 더 중심적인 인물이었다고 보입니다) 정도전은 고려 말 보다는 오히려 조선 건국 이후에 이런저런 부분에 다방면으로 손을 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면서 주도적인 입장으로 떠올랐습니다. 고려 말보다는 이때가 정도전이 정국을 주도했다고 봐도 될 때입니다.
이 무렵 정도전은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많은 업적을 쌓는 동시에 자신의 사상을 정국에 풀어내면서 군사훈련을 통한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분쟁, 재상의 권한 강화와 거기에 따른 분쟁, 사병 혁파 등으로 인한 중앙의 권위 강화와 왕족들과의 분쟁 등 불만세력과의 분쟁도 아랑곧 하지 않고 강력하게 정책을 추진하였고,
반면 조준은 이 무렵에는 오히려 뒤로 빠져 그냥 실무자 중 한 사람으로 보내며 딱히 자신의 지위인 재상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이성계가 자신에게 떡하니 맡긴 병권도 오히려 부담을 보이며 "내가 이렇게 많은 권한을 가지면 안되지." 라면서 병권을 내려놓으려고 하고, 식읍 등도 거부하면서 거리를 보였습니다.
또한 여말 무렵에 이미 자기가 군사 문제에 관해서 어느정도의 개혁안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시기에 당장 적용하긴 무리지." 같은 입장으로 군사제도 개편을 곧바로 시행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명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문제에서도 여건상 무리라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즉 여말 무렵에 가장 핵심적인 토지 문제에 관해서 중심 인물은 조준이었고,
정도전의 여러 공적이 조준이 존재감을 앞서던 것은 조선이 개국하고 난 뒤 도화지 위에 밑그림을 좍좍 그리던 때,(그 중간에서 불교 관련한 척불론 관련 논의는 정도전이 주도했습니다)
다만 이때 조준이 정도전에게 권력이 밀려서 존재감이 좀 없었다기 보다는, 개국후에 본인이 막대한 권한으로 나서는걸 좀 꺼린듯 합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조준의 '실무자' 마인드가 강하지 않았나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