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때 보통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확고하게 잘 미치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철두철미한 관료제 국가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군사력을 가진 여러 지방 호족들을 어찌어찌 잘 섞어서 녹여놓았기에 딱히 유럽의 중세 시대나 중동 지방의 일처럼 대놓고 지방이 군사를 동원해 조정에 도전한다거나 하는 식의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껏해야(?) 왕위 계승 분쟁에서 줄을 서곤 하는 정도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하간 이런 지방세력들은 국가가 어느정도 반석 위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곤 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력이 있어서 지방에 손을 못 대었다' 라기보다는, '애초에 터치를 하기 힘들어서 지방에서 그냥 대충 알아서 굴러갔다' 는 이야기가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대놓고 엄청나게 강력한 지방 군벌이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웅거하거나 그러진 않았으니까요. 자잘한 호족들이 지역에서 콧방귀를 뀌고 다녔던 것이지...
아무튼 이렇게 지방에서 여러 유력자들이 대놓고 힘 좀 깨나 쓰고 다니고, 딱히 이런 지방의 일까지 제대로 간섭하기 어려웠던 고려 조정은 중앙 관리를 보내 지방의 호족과 적당히 느슨하게 연계해서 일을 처리하곤 했습니다. 관리는 중앙이라는 권위는 있어도 머나먼 중앙 보다는 가까운 호족의 주먹이 현지에서는 잘 먹힐테니 말입니다.
이런 고려시대 어느정도 세력 있는 지방 유력자의 행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다름 아닌 이성계 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계의 조상들이 그렇습니다.
'전주 이씨' 면서 동북면으로 이주하게 된 기구한 운명의 이성계 집안의 행보는 어느정도 유명한 편입니다.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조상이 현지 관리와 트러블이 생기고, 분개한 현지 관리가(당장 자기 힘으로는 지방에서 당해낼 수 없으니) 무려 '중앙' 에 SOS를 쳐서 '군대' 를 동원해서 치려고 하자, 이에 이성계의 조상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중앙의 병력을 당해낼 수 없겠다고 여겨 전주를 떴던 겁니다.
이때 이성계의 조상을 따라서 이주했던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170여 가(家)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동북면 지역 이성계 세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후대인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뭔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중앙 관리와 트러블이 생겼다고 관리는 군대를 동원해서 지방을 치려고 하고, 그것 때문에 한두 집안도 아니고 170여 집안이 한꺼번에 지역을 뜬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고려 시대의 여러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분쟁은 '밥먹듯이 일어나는 흔한 일' 까지는 오버라고 해도, '정말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 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 엽기적인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무인시대의 최충헌.
때는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충헌' 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대. 무신들이 몇십년이나 난리를 치며 정치는 혼란해졌고 사방에선 민란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지만, 여하간 훗날 고려를 완전히 무정부상태 비슷하게 몰고 간 '몽골의 침입' 이나, 그 몽골의 침입의 전주곡이었던 '거란 유민들의 침입'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즉 엄연히 한반도 땅 내에서 정부가 그럭저럭 기능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1200년 경, 진주 지역에서 대규모 민란이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 지역
이때 일어난 진주의 반란은 다름 아닌 '노비 반란' 이었습니다. 당시는 몇년 전 그 유명한 '만적의 난' 이 발생해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도 했고, 진주 근처의 경주 지역에서도 농민 항쟁이 일어나던 시기였기에 여러모로 진주 노비들도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의민 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하는등 무신정권 설립 후 혼란한 시대상 속에서 자극받은 노비들은 그대로 들고 일어나서, 진주 지역 주리들의 가옥 50여채를 불을 질러 버리기도 하는등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진주가 무슨 어마어마한 대도시도 아닌데, 힘 좀 쓰는 주리급 인물들 집 50여채가 타버렸다면 지방 사회에서는 엄청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노비들 때문에 집이 불에 타버린 사람 중에 정방의(鄭方義)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방의의 집안에 대하여...
본래부터 진주 지역에서 토박이 성씨로서 '정' 씨 집안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듯한데, 정방의는 이때 창정(倉正) 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창정 직은 중앙 파견직이 아니라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그 지방의 토착세력이 대대로 차지하던 향리 직 중에 하나로 이것 역시 정방의의 출신 성분을 어느정도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하간 대대로 내려오던 향리 직을 맡으며 지방 호족의 일원이던 정방의는 당연히 분개해서 직접 활과 화살을 들고 노비들을 척결하러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고을 수령이었던 진주 목사 이순중(李淳中)이 이미 명령을 내며 노비들을 잡도록 했고 어느정도 일이 마무리 된 시점이었습니다.
막 나서려던 정방의는 약간 김이 샌채로 (일단 향리이니) 관아로 향했습니다. 관아에서 정방의는 상관인 사록(司錄) 정수룡(全守龍)을 만났는데, 이런 지방에서 정말 생경할 일인 대규모 무장항쟁을 막 경험한 정수룡은 조금 흥분했는지 정방의에게 캐물었습니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무장을 하고 다니는건가?"
그러자 정방의는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적 수괴를 체포하려 했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잡아서 일을 해결했다 하니 축하드리려 왔습니다." (欲捕賊魁, 他人已擒, 敢入賀耳)
하지만 흥분한 상태였던 정수룡은 이 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다! 네가 무장을 하고 온 것은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였으렸다!" (不然. 汝持弓矢, 亦必作亂也.)
그래서 정수룡은 정방의를 바로 체포해 아예 고문까지 하면서 실토를 받으려 했지만, 애초에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으니 고문해봐야 뾰족한 혐의가 나올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정수룡은 자기가 오버했음을 인정해 정방의를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여기서 끝났으면 해프닝 정도로 끝났겠지만, 문제는 보고를 들은 목사 이순중의 태도였습니다.
"정방의가 반란을 도모한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사록이 놓아주었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方義正欲作亂, 司錄放之, 非也)
아마도 이순중 역시 정수룡처럼 난데없는 무장항쟁을 경험해 얼얼하기도 했을테고, 일단 뭔가 일이 벌어졌으니 사고 터진 말년 병장마냥 "아, 진짜...아 진짜..." 같은 모습으로 어떻게든 중앙에 면피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을테니 의심 같은 일은 죄다 민감하게 반응했을 겁니다. 하물며 노비 집단의 난이라고 해봐야 제대로 된 주모자를 찾기도 막연할텐데 나름 이름 있는 정방의가 주모자였다고 하면 범인 지목도 쉬울테고 말입니다.
때문에 한번 풀려났던 정방의는 다시 잡혀왔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칼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이순몽은 범인으로 점찍은 정방의를 데려와 국문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조사(+ 고문)을 해서 실토를 받으려고 하던 와중이었는데...
다들 모여서 국문을 하려고 하는 와중에, 갑자기 정방의의 동생인 정창대(鄭昌大)가 관아에 뛰어들어왔습니다. 분기탱천한 정창대는 앞에 고을 수령이 있건, 근처에 지방관 및 포졸들이 있건 간에 아랑 곧 하지 않고 형의 목에 걸린 칼을 벗겨 버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이순몽의 눈 앞에서 대놓고 형을 부축하면서 관청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무슨 몰래 야밤을 틈타 도주시켰다, 이런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난입해서 혐의자를 데려간 겁니다.
그 이튿날 다시 국문하려고 하는데, 방의의 아우 창대(昌大)가 갑자기 뜰에 뛰어들어와서 방의에게 채운 착고를 벗겨 버리고 부축하여 나갔다. - 고려사절요
이튿날 다시 문초하려 하자 정방의의 동생인 정창대(鄭昌大)가 관아로 뛰쳐 들어와 칼을 벗긴 후 부축해 탈출했다. - 고려사 정방의전
여하간 당장은 "저...저거!" 하면서 정방의를 그냥 데려간걸 지켜만 본 고을 수령이었지만, 뒤에 다시 수를 쓰려고 할 건 틀림 없고, 생각해보면 열받기도 해서 정방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불량배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학살을 시작했습니다.
정방의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평소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다녔고, 그러면서 계속 세력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세력을 모은 것으로 다시 또 마을을 습격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인 사람의 숫자가 무려 6,400명에 이르렀습니다.
불량배들을 불러 모아 주의 마을들을 습격해 평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을 죽이니 이로 인해 피살된 자가 6,400명에 이르렀다. - 고려사 정방의전
6,400명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수준의 숫자냐면, 후삼국시대 고려와 후백제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수만 단위의 군세로 격돌했던 '일리천 전투' 에서 후백제군 전사자 숫자가 5,700명 정도입니다. 한 지방 국가가 이 전투 져서 나라 망했다 는 수준의 사람들을, 동네 토박이 향리가 평소에 아는 사람 선동해서 난리 일으켜서 죽이고 다녔던 셈입니다.
은병
당연히 일이 이렇게 되자 고을 수령 이순몽은 두려움에 떨어 아예 문을 걸어 잠구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지만, 정방의는 일단 지방관이 아예 일을 보지 않으면 문제가 커지므로 이순몽을 협박해서 강제로 출근해서 일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동네의 은병이란 은병은 모조리 싸그리 긁어모으고는, 당시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던 조정의 실력자들에게 전부 뇌물로 바쳐 일을 무마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방의 토박이 향리가 조정의 권위에 불복하여 죄인을 마음대로 뺴놓아가고, 사사로운 패거리를 모아 수천여명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하고 한 지역을 숫제 장악해버린 일이, 그냥 조용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흘러가는 일처럼 되고 맙니다. 사람들 수천여명이 죽고도 중앙 출신 관리 이순몽은 정방의의 협박 아래 태평하게 사무를 보고 있고, 중앙에서도 지방에서 수천명이 죽건 말건 누가 지역을 장악했건 관심 없이 넘어가는 분위기가 된 겁니다.
여기에 지금으로 치면 '부지사' 정도 되는 안찰부사 손공례(孫公禮)가 진주에 순시하러 와서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면서 조사 해보았지만, 정방의가 두려웠던 현지의 관리들은 전부 "정방의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하고 발뻄하기 바빴습니다. 결국, 정방의 대신 목사 이순몽이 죄를 덮어써서 섬으로 귀양 가고 말았습니다.
한편, 아무리 조용하게 무마하려 한다고 해도 이런 일이 조용해지는게 말이 안되기 떄문에, 조정에서는 소부감 조통(趙通)과 중랑장 당적(唐績) 을 보내 진주의 사정을 알아보고 회유해보게 했습니다. 이떄가 1200년 8월로, 정방의가 난리를 일으킨 것은 1200년 4월 이었습니다. 즉, 조정 관리의 명에 거역해 무리를 거느려 6,400명을 학살하고 장장 4개월이 지난 시점에야, 그것도 당장 군사를 일으켜 토벌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보내서 "뭔 일 있는지 알아봐라." 고 시킨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중앙에서 달랑 두 명이 와서 뭐가 해결될 리가 없습니다. 정방의는 중앙에서 왕명을 받고 온 관리가 와도 절도 하지 않았고, 그냥 간단하게 예만 표시할 뿐이었기에 조통과 당적은 그냥 팔짱만 끼고 있었습니다.
○조통 등이 진주에 이르니 방의의 포학한 기세가 매우 성하므로, 조통 등이 어찌할 줄 모르고 다만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罔知所圖,但拱手而已)- 고려사절요
중앙에서 이제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문제도 알고 있는데, 정작 보낸건 달랑 2명 뿐이고, 그 2명은 어찌할꼬 하면서 팔짱만 끼고 있으니, 뭐가 해결될 리가 만무했습니다. 정방의는 독자적으로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자기가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를 마음대로 하면서 사실상 진주의 지배자로 행세했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독립 반란이었는데, 조정 군사가 토벌하러 오지도 않고, 그냥 중앙 관리들이 할거 없이 와서 소득 없는 이야기나 하다 돌아가는 수준이었습니다.
아예 조정에서 모른다면야 "일을 알게 되면 해결하겠지." 라는 희망이라도 가지지, 조정 관리가 왔다갔다 하면서 대놓고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뭔가 해결되는 일이 없자 진주 사람들은 다른 수단을 생각해 냅니다.
당시 진주의 바로 근처인 현재 합천군에는 노올부곡(奴兀部曲)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교과서에도 향·소·부곡으로 나오는 말이지만 부곡은 '천민은 아닌데 천민 비스무리한 양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학창 시절에 배운 기억이 있습니다. 여하간에 이런 혼란기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여간 거친게 아니었을텐데, 마침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이라는 두목이 돌아가는 분위기에 맞춰 반란을 일으켜 이 지역에서 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딱히 광명과 계발의 무리라고 해도 정방의보다 더 나을건 없었고, 그들 역시 합천 지역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고 행패를 부리면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주의 사람들 입장에선 이미 국가는 더 믿을 게 없었고, 광명-계발의 잔혹함 등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으니만큼 '이들에게라도 힘을 빌려보자' 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이에 정방의와 특별히 사이가 나쁜 20여명이 노을부곡으로 가 그곳에 거주하면서, 광명과 계발에게 "병력을 빌려 도와주십사" 하고 부탁을 했고, 이에 광명과 계발은 정방의를 쳐서 재물을 빼앗을 생각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이를 승낙했습니다. 즉, 반란군을 무찌르기 위해 도적 집단에게 의뢰를 한 셈입니다.
이렇게 합천 지역의 도적 무리가 진주를 향해 왔는데... 이에 정방의는 군사를 몰고 출격해 이 도적무리를 완전히 격파했고, 이긴 기세를 타고 아예 합천 지역까지 쳐들어가 노올 부곡을 습격, 부곡의 도적들을 완전히 학살해버렸습니다. 백성들이 반란 세력을 무찌르려고 도적을 불러들이고, 반란군이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격파하고 등등... 혼란한 상태였다고 할만합니다.
이렇게 조정에선 완전히 손 놓은채로 이웃 고을의 군사 세력끼리 격돌까지 하면서 마음대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 난리를 치던 이 진주 사태는 처음 일이 일어난지 11개월 뒤엔 1201년 3월, 생각보다 어이없이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진주에서 왕처럼 활보하던 정방의를 진주 백성들이 습격해 죽여버렸던 겁니다.
이듬해 진주지역민들이 정방의를 토벌해 죽이자 정창대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해 왔다. 진주 사람들이 반격하자 정창대는 도망가고 그 일당들도 흩어져 버려 진주는 평온을 되찾았다. - 고려사 정방의전
정방의가 죽고 난 뒤 그 동생 정창대는 2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성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을 고려해볼때, 아마도 정방의는 무슨 목적 때문인지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을 동생에게 맡겨 진주 외곽 지역에서 뭘 해보려고 하다가, 그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측근 세력이 빠진 틈을 타 백성들에게 습격 당했던 것 같습니다. 추측컨데 이 200명은 맨처음 정방의와 난리를 일으킨 '불량배' 들이었을것 같고, 정방의가 노을부곡을 습격할때 동원한 군사들도 이들이 주축 아니었을까 하빈다.
여하간 정방의 사후 정창대는 그 200명을 이끌고 역공을 취하면서 발악을 해보았지만, 진주 농민들은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반격하니 결국 정창대는 못 당하겠다고 여겨 도망쳤고 그 무리들도 흩어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지만 기록에서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렇게 지방 토박 세력 중 하나가 일으킨 변란으로 7,000 명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 당하고, 이웃 고을의 세력과 독자적으로 전투까지 펼쳤던 진주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을까?
이런 사태를 겪으며 진주 지역은 기존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무엇보다도 본래 그 지역에서 행세 깨나 한다는 토성들, 토착 가문들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6,400명씩 학살이 되던지, 막 도적 무리까지 들어와 일대 전투를 펼치던지, 200명과 기존 농민들의 공성전이 펼치던지 신경도 안 쓰던 중앙에서는, 이렇게 세력의 공백지가 된 '빈땅' 이 되자 가만히 있던 그 사람들 맞는지 궁금할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진주 사태가 마무리 되고 3년 뒤, 최충헌은 진강군개국후(晉康君開國侯)가 되어 소위 '진강후' 가 됩니다. 진강은 진주의 당시 이름 입니다. 이렇게 되어 진주는 최충헌의 식읍이 되었습니다. 본래가 최충헌의 어머니인 유씨가 진주 유씨(晉州柳氏)로써 이 지역에 연이 있었는데, 정방의의 난 사태로 인해 본래 세력을 떨치던 정씨 등이 몰락함에 따라 편하게 자기 세력을 진주에서 키우게 된 셈입니다.
'...즉 진주의 노예들이 아전의 집과 관아를 불태우려 한 것은 노비문서를 태우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주의 봉기는 정방의의 등장을 가져 왔으므로 일반적인 민의 항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정방의의 반민중적 성격은 전체 진주민의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 일반 백성들에 의해 타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방의가 타도되고 난 이후에도 민들이 바라는 요구조건은 하나도 수용되지 않았다. 진주 주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정방의를 중심으로 한 토호세력을 몰아내는데 그쳤을 뿐 농민들은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여 피해가 막심하였다. 오히려 이때를 틈타 최충헌은 진주를 완전히 자신의 영유지로 만들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진주민이 최충헌의 반대세력인 토호세력을 제거시켜 준 셈이 되어 버렸다.
이정신, 『고려무인정권기농민·천민항쟁연구』, 고려대출판부, 1991, 247~268쪽.'
어찌되었건 중앙의 세력인 최충헌으로서는 지방 등에서 자신의 사적 세력지를 따로 확보하고 싶어도, 자기 세력을 늘리는데 지방의 토호들이 좀 불편한 존재였을 겁니다. 하지만 본래 외가로 인연이 있는 진주에서 본래 세력 있는 정씨 가문의 정방의가 난리를 일으켰고, 그 정씨 세력을 농민들이 힘을 내서 몰아준 덕분에, 편──안 하게 이 지역에 외가인 유씨를 대표적으로 하는 세력을 지원하며 자신의 사적 세력지를 더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