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팅만 고등학교 때부터 십수년째인데
이제 게임은 하지 않으면서도, 같이 나이 들어가는 pgr에 이제야 첫 글을 남깁니다.
얼마 전에 책 한 권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을 읽고 소개해드리고자, 용기내서 글을 남깁니다.
“아 이 양반 요즘 왜 이리 허약해졌어? 목수 일은 관둔거야?”
“이 할아버지가 저래뵈도 삼척에서 이름난 주먹이었는데, 요즘엔 허리가 망가져서 저 모양으로 다녀..”
“이분 아버지가 유명한 작곡가야! 알아서 잘 챙겨드려~~”
아무리 진료기록을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데…, 환자들 얼굴만 보고도 넉살 좋은 노교수님은
이름부터 가족관계 하는 일까지 다 꾀고 계십니다.
환자들과 같이 늙어가시는데, 예전엔 환자들이랑 외래 쉬는 시간에 담배도 많이 태우셨다는데,
요즘엔 세상이 바뀌어서 담배는 몰래 피우시는 교수님…
그런데 제 진료기록에는 환자 검사 결과부터 특이 병력사항을 빼곡히 적어놔도,
제 앞에 계신 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도통 알 길이 없습니다.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이 말을 해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진료실에서는 어디가 아파서 오셨는지 라도 물어보면 다행이고,
이조차도 시간이 없어 진단명 보고 처방을 내고, 수술일정 잡기 바쁜 게 현실입니다.
직업적 핑계를 떠나서라도, 요즘엔 취직이 하늘에 별따기라, 명절 때 친척 조카들에게조차 묻기 조심스러워집니다.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은 산업의학과 의사들이 노동현장에서 적은 산업재해와 직업성 질환에 대한 기록입니다.
산업의학과?
학생 때 강의는 들었지만, 수은/카드뮴 중독이 시험에 나올지 몰라 시험 전날 외워본 기억 정도만 어렴풋하고,
무슨 일을 하는 과인지 잘 몰랐습니다.
책에서는 광산 노동자 진폐증부터 삼성 반도체, 급식 아주머니, 콜 센터, 파견근로, 현장실습 등…
뉴스에서 한창 떠들다가 만, 가끔은 다큐멘터리나 르포 프로에서 다룬 여러 사례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전 어릴 때나 나올듯한 일들이 아직도 반복되고,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합니다.
책에서 인상깊은 구절들입니다.
산업은 합리화하고 강제 조정할 수 있지만, 사람은 아니다. 사람 몸에 남은 상처나 경험은 그렇게 할 수 없는 법이니까.
IMF 이후 비정규직이 증가하며, 노동강도가 강화되면서, 근골격계 직업병, 소위 “골병”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일하다 보면 다 아픈거지’가 아니라, 아파도 일할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을 넘어선 것이다.
열사병 원인은 태양이 아니라 저열한 제도였다.
노동자가 위험하면, 불안하면, 힘들면 더 이상 작업을 거부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노동자가 위험하다고 느끼면 위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골라서 쓸 것인가가 아닌, 어떤 일을 골라서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고용불안과 제대로 된 사회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중대한 건강 위험 요인은 소음도 아니고, 근골격계 부담도 아닌,
바로 실업과 해고이다.
가족들에게 먹일 것처럼 정성과 손맛을 다해달라고? 그럴 여유가 없다. 현실은 TV속 우아한 쿡방이 아니다.
엄마의 손맛을 기대하기보다 노동자의 수고로움을 느끼는 감수성이 퍼지기 바란다.
신자유주의에서 왜곡된 인간관계의 전형인 불평등한 고용계약 관계의 굴레에서 직업성 질환이 발생한다.
서로의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
지금 사회엔 소비자로서의 정당한 권리와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 권리 사이의 적절한 합의가 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도 하듯 조금이라도 약한 이에게 “갑질”을 하는 서로 미워하는 폭발 직전의 사회이다.
모든 노동이 가치 있고, 어떤 노동을 하든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
항공기 승무원 업무의 핵심은 미소와 서비스가 아니라 안전이다.
과로가 미덕이고, 직장인의 모범이자, 아버지의 전형이 아니다.
휴가는 내는 것이 당연하고, 주말에는 쉬어야 하고, 정시퇴근이 기본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업무량이 많아 추가노동이 필요하면, 인력충원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사건의 핵심은 화학물질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환경이다.
작업환경 설계의 원칙은 “일에 사람을 맞추지 말고 사람에 일을 맞추라”는 것이다.
오로지 취업률 제고를 목표로 흘러온 현장실습을 통해, 철이 들면서 순응하는 근로자가 된다.
책은 쉽게 읽혔지만, 책을 덮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역사책에서나 나올 일들이 아직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고, 뚜렷한 해결책도 보이질 않습니다.
노동문제? 저도 비정규직이지만, 잘 모르고,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관심할 수록 이러한 현실은 더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병가는 고사하고, 1년에 휴가 1주일 내기 어렵고… 인력보충은 커녕; 재계약 걱정하며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제 서로가 좋은 직업환경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자식들에게는 저보다 조금 낳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여러분께도 이 책을 소개해드립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안녕하십니까?
이제 조금 용기 내서 물어봐야겠네요..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