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지만, 제 글을 읽고 힘이 나실 수 있는 분들이 있을 거 같아 PGR21에 처음으로 글 남겨봅니다.
)을 보고 저도 힘을 얻어 글을 한 번 남겨보고 싶었습니다. 힘들었던 작년과 축복 같았던 올해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또 힘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일 것 같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커뮤니티인 PGR21에 제 이야기를 공유해 봅니다.
*맨 아래 남기려다가 글 읽다 오해하실 분이 있으실 거 같아 상단에 남깁니다.
- 개인적인 이야기다 보니 신상이 노출될 수 있는 부분은 살짝 수정하였습니다. (다 쓰고 나니 강아지 이름만 그렇네요..)
- 강아지 추모 장소로 뒷산 공원을 이야기 드렸는데, 사람들이 적은 곳이기도 하고 나무에 저희만 알아볼 수 있게 작은 리본 걸어둔 정도 입니다.
강아지 유골은 사람들이 작심하지 않는 이상 갈 수 없을 만한 곳에 뿌려두었습니다.
- 난임검사는 한 군데에서 밖에 안해서 정확도가 의심되긴 하나, 꽤나 유명한 병원이라 검사가 잘못됐을거 같진 않습니다.
0. 11월 29일 오후 2시 20분
작년 11월 29일 오후 2시 20분. 모니터 화면에 일거리들을 띄워놓고, 한편으로 2시 30분 있을거라는 전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헛소리로 혈압을 높일지 잔뜩 기대하고 있는 그때, 아내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는 제가 회사에 있을 때는 웬만해선 전화를 안 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도 카톡으로 "전화 가능해?"라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말이죠. 보통 아내의 연락과 다른 방식이라,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구나' 생각하고 전화기를 들고 옆의 회의실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11월 29일 오후 2시 20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제 3차 대국민 담화문 발표가 있기 10분 전이었습니다.
1. 아내의 전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통화기 너머로는 말을 못 이을 정도로 울먹이는, 아니 거의 오열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초지종에 대해 설명조차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그 사이로 몇 가지 단어가 들립니다. "단이"..."사고"..."병원..." 오열하는 목소리 사이로 저 세 단어는 명확히 들려왔습니다. 믿기 싫은 상황이 머리에 그려집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도 못한 상황인데, 어떡해야 할지 감이 안 오고 손이 떨립니다. 다행히 아내는 괜찮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갈게. 기다려"란 말과 함께 채 1분도 안 되는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 시간으로 통화를 한 회의실을 달려 나와 짐을 챙겼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노트북도 챙기고 집에서 업무를 볼 수 있는 잡동사니들을 챙기는데 손이 떨립니다. 그때 옆에 팀장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저희 팀장 좋은 분입니다. 바로 가라고 하십니다. 회사를 박차고 나와 바로 택시를 잡았습니다.
"xx 동물 병원으로 가주세요."
2. 두 번째 전화 그리고 담화문
택시를 타면 회사에서 집 근처 동물 병원까지 가는데 30분 정도 걸립니다. 상황을 모르니 애가 탑니다. 그렇다고 오열하던 아내한테 전화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라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인데, 이때 감정은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맞이했을 때 기분인거 같은데,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인지 상당히 차분해지면서도 무언가 아래에서 슬픔과 유사한 감정이 차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점점 차오르면서 뜨거워지는 느낌.
"국민 여러분, 돌이켜 보면 지난 18년 동안..."
2시 반. 택시 라디오 너머로 전대통령의 담화문이 읽어져 나옵니다. 딱 10분 전만 해도 무슨 헛소리 하나 기다리고 있던 건데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소리가 단어 단위로 들리는 게 아니라 음절 단위로 들려서 무슨 말인지 내용 파악이 안 되고 있는 그때. 아내의 두번째 전화가 왔습니다. 아까보다 더 오열하는 아내. 앞으로 살면서 그런 전화를 받은 날이 또 올까 싶을 정도로 슬퍼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보였습니다.
"단이 죽었대"
3. 단이와의 첫 만남
작년 6월 저희는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해 왔습니다.
수의사가 꿈이던 아내는 3년 전 저와 결혼하면서 수의사의 꿈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업무 때문에 출장이 잦았던 탓인지, 강아지를 너무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결혼 전에는 장인,장모님 반대가 심해서 키우고 싶어도 키우질 못했거든요. 결혼 후에도 이런저런 이유와 저희 상황 때문에 키우지 못하다가, 작년 6월 입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집에서 꽤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지만 단이의 엄마, 형제, 지내는 환경도 직접 보고 그렇게 데려왔습니다.
단이는 삼남매였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 단이 누나는 이미 입양되었고, 형과 단이만 남아있었습니다. 아내는 의젓한 단이 형과 낯선 사람에게도 친근한 단이 중에 누굴 데려올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 날 강아지를 만나보고 다른 일이 있어 몇 시간 동안 다른 곳을 갔다 왔는데 그 시간 내내 아내는 둘 사이를 고민했습니다. 저는 친근한 단이가 좋다고 했고, 아내도 그렇다고 했지만 의젓한 아이가 키우긴 쉽지 않을까라며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다 보고 단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단이를 데리러 간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때도 저희는 결정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낮에 봤을 때 전주인에게는 단이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계속 고민이 됐거든요. 그래서 데리러 가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를 만나러 내려오는 아이가 우리와 운명인 거니 그 아이를 데려가자"라고요. 그리고 전주인 분은 단이를 데리고 내려오셨고, 우리도 단이가 우리 운명이구나 하고 기분 좋게 안아서 데려왔습니다.
오는 내내 뒷자리에 앉아 강아지에게 계속 말을 걸며 아이 같이 행복해하던 아내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4. 우리 아기 단이 1
결혼 3년 차. 저희는 아이가 없습니다.
요즘은 결혼하고도 늦게 아이를 갖는 분들이 많다고 하고, 저희도 2년 동안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피임을 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여름쯤부터 아내가 아이를 원했고, 저도 그랬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거 같습니다.
처음 몇 달은 저의 잦은 출장과 비규칙적이던 아내의 주기 때문에 안 생기나 했습니다. 그래서 주기를 제대로 맞추어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대략 이쯤"이었다면, 몇 달 지난 뒤로는 "이날 하고 이날" 이런 식으로 정확하게 날짜를 박았습니다. 그때는 저도 제 일정과 컨디션을 맞추었고 아내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습니다. 몇 달...말이 몇 달이지 어느새 1년이 지났더군요.
아내는 초조해졌는지, 혼자 난임클리닉을 갔습니다. 물론 저와 이야기하고 갔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더군요. 결과는 이상 없음. 주기가 비규칙적인 게 문제이긴 하나 의사가 건강하다고 하더군요. 병원을 다녀온 아내는 자신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고 나서, 조심스럽게 저에게 저도 검사를 해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아이를 원하고, 문제가 있으면 같이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기에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작년 10월입니다.
그리고 저도 병원을 갔습니다. 검사가 저녁에 할 수 없어서 낮에 반차를 쓰고 다녀왔습니다. 처음 해보는 거지만, 성실히 검사에 임했습니다. 결과는 몇 시간 뒤 바로 나왔습니다. 양이 얼마고, 수가 얼마며, 운동성이 어떻다. "그래서 안 좋다는건가요?" 라는 저의 물음에 자기는 팩트만 전달하는 사람이니 언제 병원 방문해서 의사 선생님 설명을 들으셔라 라고 하시더군요. 전화를 끊고 바로 그 숫자들이 정상치와 얼마나 차이나는지 검색해보았습니다. 양은 괜찮은데 수가 문제더군요. 정상의 반정도 였습니다. 그래도 아직 의사를 만나기 전이니 긍정 회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휴가를 내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아내와 함께 병원을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 표정이 심각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기억이 안 나는데 그림으로 저희에게 설명해주신 부분들이 기억납니다. 의사 선생님은 큰 원을 그리셨고, 그걸 반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걸 또 반으로 나누셨습니다. 수와 운동성을 감안하면 정상 수치의 반의 반만이 임신 가능한 정자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또 정상적이지 않은 정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연 임신 퍼센티지도 말씀해주셨는데, 잘 기억이 안납니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거 같네요.
결론은 자연임신 불가. 인공수정도 쉽지는 않으니, 시험관 시술 권장.
5. 우리 아기 단이 2
그리고 집에 왔습니다. 아내는 담담합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전화했습니다. 첫 손자를 그렇게 기다리셨는데, 어떻게 말할까. 그래도 이런 건 정공법이 정답이고, 지금까지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두 분이기에 빨리 말씀 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 전화드렸습니다. 아무말 없이 쭉 들으시더니..."너희가 괜찮으면, 아빠도 괜찮다." 이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멈출 수 없을 정도로 터져나왔습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멈추어지지가 않더군요. 아버지한테 죄송할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송해요..."란 말이 계속해서 나왔고, 아들의 그 말을 듣고 아버지도 약간 울먹이셨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미안한 사람들이 많아서 인 것도 같고, 남자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저 자신이 미워서 인 것도 같고, 그냥 그렇게 한참을 울었던 것 같네요.
슬픈 일이었지만 해야 하는 일들과 시간의 흐름 덕에 우울함에 젖어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 앞에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공수정, 시험관 수술의 대장정을 시작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인공수정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것도 있고, 시험관 하기 전에 2-3번 정도 해보는 걸 병원에서도 제안주긴 했습니다.
결국 임신은 아내의 상태가 중요하기 때문에 아내는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었고, 병원과 정한 과배란 유도 주사를 맞기로 한 날이 계속해서 다가왔습니다. 매일 1~2시간, 때로는 저녁 시간 내내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실 인공수정도 그렇고 시험관도 그렇고 사실 힘든 건 아내이기 때문에 매일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대화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걱정 말라고 다 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내가 엄청 건강한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많이 걱정됐습니다. 그리고 병원 가기 하루 전, 저희는 결정을 했습니다.
이런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내내 저희 곁에 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힘들지만 단이때매 웃고, 단이한테 화도 내고. 같이 산책하며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신나게 공원에서 같이 뛰어놀고. 사람 만큼 소통할 수 없지만, 단이는 저희에게 정말 큰 행복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이를 우리 아이로 삼자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그 길을 걷지 말고. 단이와 함께 살며, 순리대로 가자고.
그래서 향후 몇 년간은 인공수정도 시도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6. 단이 보내기
그런 결정을 내리고 2달 후, 단이는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교통사고였습니다. 운동량이 많은 아이라 산책을 하루에 1시간 이상 시키는데, 그 날은 아내가 평소보다 먼 산책로를 선택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이 도서관 앞 삼거리, 아내는 단이의 목줄을 꽉 잡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호등이 초록불이 된 걸 확인하고 "단이야 가자" 하고 횡단보도에 첫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신호 위반 하고 달려오는 다마스 봉고차가 조금 더 앞에 있었던 단이를 쳐버렸습니다. 단이는 2~3미터 튕겨져 나갔고, 그 아픈 와중에도 쓰러지기 전 아내를 한 번 봤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고 지점 바로 앞에 동물병원이 있어서 바로 옮겼지만, 폐를 심하게 다쳐 10분을 채 버티지 못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동물병원에 도착해 단이 모습을 봤습니다. 눈을 반쯤 뜨고 있는데, 저와 아내가 정말 보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리 감아 주려고 해도 감기질 않더군요. 몸엔 상처 하나 없고, 왼쪽 가슴에 멍 자국만 좀 있을 뿐이었습니다. 몸도 너무 따뜻했고요. 마치 살아있는 거 같았습니다. 차 사고라고 하면 많이 다쳤을 줄 알았는데,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더 화가 났습니다.
가해자 앞에 섰습니다. 경찰도 불렀습니다. 가해자가 착한놈인건지, 아니면 어차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건지 자기가 다 잘못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신호위반 한 것도 맞고, 아내는 목줄도 꽉 잡고 있었고 아무 잘못 없다고. 경찰이 따로 부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보험처리 해야 할 거다. 근데 사람하곤 다르다. 대물로 처리된다. 저 사람 벌주고 싶어서 신고해도 저 사람은 신호 위반한 거 딱지 밖에 못 끊어준다. 단이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때만큼은 정신 차려서 경찰분이 이야기해주시는걸 하나하나 빼먹지 않고 다 들었는데, 어떻게 하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가 가해자를 때려준다고 해서 단이가 돌아오는 게 아닌데.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세 명이었던 가족이 두 명이 되었습니다. 단이의 흔적은 곳곳에 있는데 단이만 없습니다.
너무 분하고 화났지만, 단이는 잘 보내줘야 했습니다. 화장할 곳을 찾아 다음 날로 예약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좋은 데서 해주시고 싶어 깨끗한 곳을 찾았습니다. 다 필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단이 가는 절차라 생각해 보험처리도 진행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단이를 보내주었습니다.
사고 당일보다 몸이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그래도 단이었습니다. 옆으로 누워 자는 거처럼 있는데,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많이 슬퍼하면 안된다고 하는데, 아이 대신해서 키우기로 했던 단이였기 때문에 원 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 시간을 내어 자주 가던 뒷산 공원에 단이를 추모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을 만들고 유골을 뿌려주었습니다.
난임부부인 저희에게 아이 같았던 단이는 그렇게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7. 추억의 시간
11월 29일부터 근 한 달간, 아내와 매일 저녁 산책을 했습니다.
집 뿐 아니라 동네 전역이 단이와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라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저희는 오히려 더 추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일 저녁 단이와 산책하던 길을 아내와 손잡고 돌아다니며 단이를 추억했습니다. 울고 싶을 땐 울고 웃고 싶을 땐 웃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잊으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말이면 추모 장소에 가서 아내와 단이 이야기를 한참하고 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에게 아이였던 단이를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저는 기존에 하고 있던 운동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땀을 흘렸고, 체중도 많이 감량했습니다. 아내가 우울해질까 봐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러 다녔는데, 그러면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여행도 많이 갔습니다. 단이가 조금 더 크면 가려고 했던 펜션도 가고, 단이 봐 줄 곳이 없어 가지 못하고 있었던 해외여행도 짧게나마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저희 부부에게 충만했던 12월, 1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8. 또 다시 걸려온 아내의 전화
1월이 지나면서 단이 이야기를 즐겁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설 연휴 때도 양가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힘든 한 해를 보낸 저희 부부를 양가 부모님은 많은 덕담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설 연휴도 즐겁게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단이가 떠난 뒤, 매일이 허했지만 점점 저희 부부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단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가끔 아침에 일어나서 단이의 흔적들을 치우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아내와 나누곤 한바탕 웃으며 "단이야 미안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저희 부부는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와 2월 1일 회사 출근을 하였습니다. 오전에 한창 일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이번에도 작년 11월 29일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전 연락도 없이 전화가 왔습니다. 문득, 겁이 났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들고 회의실로 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뭔가 상기된 듯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립니다.
"오빠, 어떡하지"
"왜 무슨 일 있어?"
"오빠, 우리 아기 생긴 거 같애.."
9. 부모의 길
놀랐습니다. 아니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불과 4개월 전에 '자연 임신' 불가 판정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지. 아내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주기가 되어도 그 날이 찾아오지 않았고, 가끔 그럴 때가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답니다. 근데 예전에 한창 아이 가지려고 노력할 때, 사두었던 임신 진단기가 눈에 보였다더군요. 그래서 한 번 테스트해 봤답니다. 선명한 두 줄. 자기도 자기 눈을 의심했다고 합니다. 정말 아무런 기대가 없었으니깐요.
그러니 너무 의심이 돼서 바로 약국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진단기 문제 일수도 있으니까요. 약국에서 제조사가 다른 2개의 진단기를 사가지고 왔고 바로 테스트를 해봤다고 합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선명한 두 줄. 그걸 확인하고 저에게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도 안 믿긴다면서.
다음 날, 저희에게 난임 진단을 했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이 병원이 저희 지역에서 꽤나 유명한데, 산부인과이기도 합니다. 가서 접수를 했습니다. 병원 기록이 있다 보니, 접수를 하고 나니 접수처에서 난임 클리닉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니시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자연임신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도 사뭇 놀라는 느낌이었는데, 그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담당 선생님을 배정받고 진찰을 받으러 들어갔습니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초음파 화면을 보여줍니다. 부채꼴 모양의 회색 영역에 검은 점 하나가 있습니다. 손톱만 하다고 할까요. 그게 아기집이랍니다. 이리저리 크기를 재보더니 임신 4주차라고 하더군요. 눈으로 다 봤는데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손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둘다 너무 믿기지 않는다며, 이상하다는 이야기만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둘 다 싱글벙글.
집으로 와서 양가 부모님께 전화드렸습니다.
당연하게도 너무 좋아하십니다.
이렇게 저희도 저희 부모님과 같이 부모의 길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 단이가 보내준 선물
다시 또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희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단이가 우리를 생각해서 보내준 선물 같은 아이라고. 물론 저희가 저희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거겠지만, 저희 부부에겐 너무나도 기적적인 일이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단이는 저희에게 정말 행복만 주고 간 아이였습니다. 잔병치레도 안 하고 사고도 안 치고, 말도 잘 듣고. 매일이 즐겁고 신나는 아이였습니다. 사람도 너무 좋아해서 밖에서 단이를 만나는 사람 중에 단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런 단이를 보고 아내는 매번 천사라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저희 부부에게 행복만 주던 단이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이렇게 선물을 주고 간 거라고 지금도 저희 부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단이와 아기가 함께 커가는 건 볼 수 없지만, 단이에게 주었던 사랑, 다 주지 못한 사랑을 이제 10월에 곧 태어날 아이에게 주려고 합니다. 단이는 곁에 없지만, 저희 부부의 아이였던 단이를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거 참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저도 아빠가 되네요.
# 에필로그
예전부터 써서 남겨두고자 했던 글인데, Avari님 글에 힘을 얻어 인제야 글을 써봅니다. 처음에는 간단히 적으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어떻게 보면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런 글 공개적으로 쓰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거처럼 친한 친구들에게도 말하는 게 망설여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이니까요. 그래도 제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힘이 나실 분들이 있을 거라 믿고 글을 써보았습니다.
위 이야기 처럼 정말 기적적인 일인건지, 그저 때가 맞아 운이 좋았던 건지, 제가 열심히 한 운동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어떻게 아이가 저희 부부를 찾아온건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자연임신이 되고 나서 따로 그걸 분석하기 위해 난임클리닉을 가서 문의하거나 한 적은 없으니까요. 무엇이 효과가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면 같이 이야기 드리면 좋을 텐데 이 부분은 저도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진짜 긴 글을 마무리 해야겠네요. 쓰다 보니 정말 길었졌는데 끝까지 읽으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단이 사진 추가해봅니다. 단이가 세상 떠나기 전, 주말에 찍은 사진이네요.
저 날 눈이 참 많이 왔는데... 보고 싶네요. 우리 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