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에서 한반도 전체를 둘러싼 큰 싸움 중에서 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은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인지만, 실제로는 고려 말 당시 나라 전체를 뒤흔들어 버릴 정도로 중차대한 전쟁이었습니다. 무려 40년간 이어진 왜구와의 싸움은 전라, 경상, 경기, 평안, 황해, 심지어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던 싸움이었고, 왜구들은 해안은 물론이고 내륙까지 마음놓고 진군해서 사람을 납치하고 국가의 조운선을 털어갔으며, 고려의 재정을 마비시켰습니다. 그 기세가 절정이던 시절에는 심지어 고려 왕이 왜구의 위협 때문에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무시무시한 고려 말 당시 왜구 침입 상황도.
이런 왜구 침입 관련된 부분은 이전까지는 별로 크게 대중에게 알려진 편이 아니라서, 왜구라고 해봐야 해적 나부랭이들이 해안가에서 좀 설치다가 간것 정도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은 왜구의 침입을 다룬 상황도 몇개 보더라도 알 수 있을만큼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래도 최근엔 여러 드라마로 인해 여말이 꽤나 주목받는 시기가 되면서 대중들에게도 당시 왜구의 침입이 초래한 심각함이 좀 더 알려진 편이긴 합니다.
그 왜구의 엄청난 규모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더 불필요한듯 싶고... 여기서 다뤄보려는 것은, 당시 왜구가 보여준 '전투력' 이라는 측면입니다. 고려는 어째서 왜구에게 쩔쩔 매었을까? 훈도시 한장 걸치고 다니는 도적때들이 쪽수만 많아서?
약해보이는데....
그런데 '고려사' 에 남긴 왜구의 전투 기록이나 여타 상황을 살펴보면, 왜구들의 전투력과 작전수행능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왜구는 숫자 뿐만 아니라 '전술, 계책' 으로 고려군을 신출귀물 뒤흔들어놓기 일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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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고을의 백성들은 혹은 드문드문 혹은 빽빽하게 촌락을 이루어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왜적들은 많으면 천 명이나 백 명의 무리로, 적으면 열 명이나 다섯 명으로 대오를 지어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요망한 간계를 꾸며 쳐들어옵니다.환한 대낮에는 그나마 왜구들의 침입로를 살펴서 부대의 규모를 조사한 다음 수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는 척후가 먼 곳을 조망하기 어렵기 때문에 때때로 불의의 기습을 자행하곤 합니다. 병력이 많은 경우에는, 허장성세를 부리면서 이리저리 횡행함으로써 우리 군사의 힘이 분산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몰래 기습을 가하는데, 어떤 때는 둔영을 지나쳐 바로 민가를 습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민가를 버려두고 먼저 둔영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병력이 적을 경우는, 미리 간첩을 보내어 어느 집이 부유한가 알아두었다가 은밀히 약탈하는데, 우리 관군이 그 기미를 알고 추격하여 올 때쯤에는 적은 이미 재물을 가득 싣고 멀리 달아나버립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정을 더 징발하면 백성들은 힘이 부치고 도적은 떠나버렸으며, 백성들을 돌려보내면 그들이 떠나자마자 왜적이 다시 침구합니다.
─ 고려사 설장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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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이야기한 당시 고려 관리 설장수의 상소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드러납니다. 당시 왜구들은 대낮에 싸움을 치루는 것은 가능한 자제하고, 밤을 노려 관군을 기습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때는 허장성세를 보여 뭉쳐 있던 고려군을 이리저리 흩어지게 한 다음, 고려군이 분산되면 그틈을 노려 다시 뭉쳐 고려군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병력의 기동과 집중을 강조한 나폴레옹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왜구.
왜구는 교전을 치룰때는 아무렇게나 교전을 치루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털어먹을 곳인 민가를 공격하기 전에 관군이 모인 둔영을 먼저 공격할떄도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형세를 보고 민가를 공격한뒤 둔영은 재빨리 지나가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왜구가 상당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왜구는 아무렇게나 공격해 오지 않았습니다. 미리 정보를 수집해서 부유한 지역을 기습, 고려군이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달아나고 없는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줬습니다. 때문에 기껏 왜구 침공 → 고려군 출동과 동시에 현지에서 징발 실시를 해봐야 이미 왜구는 떠나간 뒤고, 망연자실하며 징발한 백성들을 다시 돌려보내면 왜구가 또다시 나타나 기습을 감행 해오기 일쑤였습니다.
초한전투, 항우에게 일부러 잘못된 길을 알려주는 노인의 모습.
1377년.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은 수원부사 박승직은 재빨리 부대를 이끌고 왜구를 막기 위해 출동합니다. 작전지역에 거의 도착한 그는 왜구가 어디로 숨었는지 정보를 얻기 위해 주변을 수소문 하다가, 근처에서 밭을 갈던 노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박승직은 노인들을 불러 물었습니다.
"왜구는 어디로 간거냐? 안 보이는걸 보니 물러간거냐? 그리고 조정에서 왜구를 막기 위해 3명의 원수를 보낸다고 들었는데, 혹시 보았느냐?"
그러자 농부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적은 이미 물러간지 오래요. 삼 원수가 그들을 쫒아갔소이다."
그 말을 들은 박승직은 이미 전투를 승리했다고 여겨 안심하고 근처의 안성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속임수 였습니다. 박승직에게 대답을 해줬던 농부들은 사실 진짜 농부도 아니었고, 그 정체는 왜구였습니다. 왜구들이 농부로 분장하고 있었던 겁니다.
무슨 엉클드류도 아니고....
거짓 정보에 속은 박승직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안성에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안성은 인기척이 전혀 없고 폐허가 된 상태였습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될 찰나, 갑자기 사방에서 왜구의 복병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미 안성은 왜구들에게 장악된 죽음의 장소가 된지 오래였고, 이제는 꼼짝없이 거기에 갇혀 퇴로조차 막히게 된 겁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고려군이 왜구에게 추풍낙엽으로 쓰러지고 일부는 포로가 되는 찰나에, 박승직은 죽기 직전에 혼자 포위를 어떻게든 뚫고 달아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부대가 이렇게 전멸할 정도였으니, 현재의 경기도 수원 ~ 안성 부근은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 왜구의 지상낙원이 되었고, 고려 백성들의 지옥이 되었습니다. 가히 삼국지연의에서나 볼만한 계책이지만, 엄연히 '고려사절요' 에 남아있는 기록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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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적이 안성에 들어와서 삼[麻]밭에 복병하고, 포로 3ㆍ4명을 시켜 밭두둑 위에서 농부인 체하고 밭을 매어 속이게 하였다. 수원 부사 박승직(朴承直)이 세 원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밭매는 자에게 묻기를, “적이 물러갔느냐. 세 원수가 어디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적은 이미 물러가고, 세 원수가 쫓아갔다." 하였다. 승직이 그 말을 믿고 곧 안성 관사로 들어갔다. 적의 복병이 뛰어나와 포위하니, 승직이 단기(單騎)로 포위를 뚫고 빠져 달아나고, 군사는 많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수원(水原)에서 양성(陽城)ㆍ안성에 이르기까지 쓸쓸하여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 고려사절요 13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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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들은 심지어 일반적인 '전투력' 만으로도 고려군에 뒤진다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병종' 이라는 측면에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는데, 왜구들은 알보병 외에도 기병 전력을 운용했습니다. 심지어 상당한 대규모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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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왜적의 기병 7백과 보병 2천여 명이 진주를 침범하니, 양백연이 우인열ㆍ배극렴(裵克廉)ㆍ한방언ㆍ김용휘ㆍ경의ㆍ홍인계와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싸워 13급을 베었으므로, 물건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고려사절요 1379년
왜적 2백여 기가 괴주(槐州) 장연현(長延縣)을 침략하니, 원수 왕안덕ㆍ김사혁(金思革)ㆍ도흥(都興)이 적과 싸워 3급을 베었다. ─ 고려사절요 13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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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어떤 전투에서는 왜구가 2천명의 보병을 움직이며 700이나 되는 기병을 따로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아예 기병으로만 편제된 200명의 왜구들의 존재도 포착됩니다.
이렇게 기병전력을 갖춘 왜구는 이게 '왜구의 침입' 이 아니라 '대몽항쟁' 인지 착각이 되는 모습도 보여주는데, 기병 전력을 이용해 기동력을 살려 치고 빠지는 전투를 수행한겁니다.
기병을 운용하며 날개를 얻은 왜구의 기동력은, 그들이 타고 다니는 함선의 존재로 인해 더욱 더 무시무시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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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배 50척이 김해 남포(南浦)에 이르러 뒤에 오는 적에게 방을 써서 “우리들은 순풍을 타고 황산강(黃山江)까지 거슬러 올라가 바로 밀성(密城)을 칠 것이다.”라고 알렸다. 박위가 정탐하여 그것을 알아낸 후 강 언덕 양쪽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자신은 배 30척을 거느리고 적을 기다렸다. 방을 본 적선 한 척이 먼저 강 어구로 들어오자 복병이 일어났으며 박위도 돌진해 적을 차단하고 공격하였다. 낭패한 적은 자결하거나 물에 빠져 거의 섬멸되었다. ─ 고려사 박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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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에 나오는 왜구들은 배를 이끌고 하천을 타 내륙 깊숙히 침공해, 낙동강 하구에서 30km를 더 들어가야 하는 밀성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비록 해당 기록에 나오는 왜구의 침공 자체는 어떻게든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해 낸 박위의 첩보력에 의해 매복작전으로 실패하게 되었지만, 말과 배를 이용한 왜구들의 기동력 자체는 주의해볼만 합니다.
해안 지대에 사는 백성이라면 어떻게든 왜구의 침공을 대비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구는 함선을 이용해 해안에서 수십에서 수백킬로미터까지 떨어진 내륙 깊숙히 까지 침공한뒤 말을 타고 다니며 기습을 가하니, 아닌 밤중에 자다가 홍두깨로 왜구 침공을 당해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도망칠때도 말과 배를 이용해 바람처럼 사라지니 소탕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쥐새끼 마냥 도망치는 왜구를 어떻게든 잡아놓고, 대규모 한번 싸움을 벌이게 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규모 전투, 특히 대규모 함대전에서 왜구는 고려군을 전략 전술에서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어떻게보면 이것이 왜구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패전, 이작도 해전
1364년, 사방에서 들끟는 왜구로 인해 전라도 지역의 조운이 전혀 수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자, 공민왕은 위기감을 느껴 전선을 80여척이나 동원해 지방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을 이 80여척의 함선으로 수비하게 하며 어떻게든 조운을 안전하게 걷어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80여척의 함선으로 보호받는 조운선을 약탈하기 위해 왜구는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이 당시 왜구 함선의 숫자는 총 50여척. 숫자로는 고려군이 30여척이나 더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로 참담할 정도였는데, 왜구는 먼저 두 척의 함선을 전면에 내세워 고려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그들을 유인했습니다. 아군은 무려 80여척이나 되는데 눈 앞에 있는건 두척의 왜구 함선이자, 고려군 장교들은 전공을 욕심내어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포진이 흩어졌고, 이후 나타난 50여척의 왜구 함선은 자신들보다 숫자가 거의 두 배나 되는 고려군 함선을 역으로 포위했습니다.
난데없이 포위된 고려군은 상당한 숫자의 장교들이 초전에 순식간에 전사했고, 장교들이 죽자 어찌할바 모르고 당황하던 일반 장병들은 맧없이 학살되다가 급기에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난장판 속에 최고 지휘관들은 "어딜 가십니까, 끝까지 싸웁시다" 하며 울부짖는 장병들을 버리고 도주했고, 고려군은 문자 그대로 거진 전멸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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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조선이 왜적에게 막히어 운행되지 못하므로 왕이 동북면의 무사와 교동(喬桐)ㆍ강화(江華)ㆍ동강ㆍ서강의 전선 80여 척을 뽑아서 우도병마사(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 이선(李善)에게 명하여 나누어 거느리고 가서 엄호하게 하였다. 변광수의 배가 대도(代島)에 이르니 내포(內浦) 백성으로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도망해 와서 고하기를, “적이 이작도(伊作島)에 군사를 매복시켰으니 경솔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선이 듣지 않고 북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먼저 나아가니 적이 배 두 척으로 맞아 싸우다가 속임수로 물러가더니 조금 후에 적의 배 50여 척이 포위하였다.
병마판관 이분손(李芬孫)과 중랑장 이화상(李和尙) 등이 앞서 적과 싸우다가 모두 적에게 살해되자 여러 배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넋을 잃어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자가 10에 8, 9명이나 되었다. 변광수와 이선 등이 형세를 관망하면서 싸우지도 않고 물러가니, 싸우던 병졸이 크게 부르짖기를, “병마사는 어찌 사졸을 버리고 물러가시오. 조금만 머물러 국가를 위하여 적을 격파하십시오." 하였으나, 광수 등이 끝내 구원하지 않았다. 병사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어 크게 패하였다. ─ 고려사절요 13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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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전투 수행 능력으로 고려군을 완전히 압도한 왜구들은, 심지어 기만책에도 능숙했습니다.
왜구의 침고 당시 거듭된 공격으로 강화도 지역은 거의 왜구 소굴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왜구들은 이 강화도에서 양광도, 즉 지금의 경기 남부, 강원 일부, 충청 지역을 자주 공격해 왔습니다. 당연하게도 양광도 해안은 왜구를 막기 위한 고려군의 방비가 철저한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양광도 해안에 고려군의 함선 50여척이 나타났습니다. 해안 지역의 장병들은 왜구를 막기 위해 나타난 아군을 보고 안심했고, 당장의 싸움은 이들 수군에 맡겨놓을 생각을 품고 경계를 느슨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조차도 속임수였습니다. 50여척의 고려 함선들은 갑자기 썰물이 갈라지듯 갈라졌고, 그 사이로 왜구 함선이 나타나 기습을 가하자, 마음을 놓고 있던 고려군은 문자 그대로 때죽음을 당했습니다.
실상은 이렇습니다. 기습 공격을 가한 왜구의 숫자는 총 22척의 함선에 탄 왜구들로, 당초 숫자만 보면 고려군이 해볼만 했습니다. 그러자 왜구는 일전의 숱한 싸움에서 노략질한 고려군 함선 50여척을 앞세워 위장을 펼쳤고, 이 위장 작전이 성공적으로 먹혀들면서 큰 피해를 엽혔던 겁니다. 무슨 정사도 아니고 연의의 제갈량이나 할법한 작전이지만 이 역시 엄연히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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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강화(江華)로부터 양광도(楊廣道) 바닷가의 고을을 쳐서 함락시켰다. 처음에 적선(賊船)은 겨우 22척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 전함을 빼앗아 그 수가 50척에 이르니, 보는 자가 우리 군사로 오인하여 피하지 않았다가 살상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 고려사 왕안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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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왜구의 이런 기만책 중 하나는 만약 성공만 했다면 그날로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을 수 있었던 작전조차 있었습니다.
왜구가 그야말로 미친듯이 쏟아져오던 1377년, 왜구를 공격하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패배한 왕안덕은 본인조차 부상을 당하고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패전을 감수하고라도 교전을 한 성과가 없지 않았는데, 이때 잡은 포로를 심문하다가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그 정보란, 지금 양광도 지방에 대한 왜구의 공세는 사실 철저하게 기만적인 목적을 가진 '조공' 이고, 실제 타격을 줄 '주공' 으로 막대한 전력이 고려의 수도 개경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였습니다. 즉, 양광도에 압력을 크게 가하면 고려 조정은 버티지 못하고 다름 아닌 '최영' 에게 군을 맡겨 토벌하러 내려올텐데, 그럼 최영과 주력군이 빠진 개경으로 왜구가 진군하면.....
그야말로 소름돋는 작전이었지만, 어떻게든 사전 파악에 성공하게 되면서 고려군은 이 작전에 낚이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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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첩자를 사로잡아 신문했더니 첩자가, 양광도(楊廣道)의 각 고을을 침공하면 최영이 필시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올 것이니 이 때 빈틈을 타서 곧장 개경을 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노라고 자백했다. ─ 고려사 왕안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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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려 말의 왜구는 실제적인 전투력도 강력하고, 조직화가 되어 있으며 함선과 기병을 이용해 우월한 기동력으로 고려를 급습하며, 거기에 계책까지 써가며 고려군을 농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왜구의 강력함보다 더 큰 문제는....
1선발 : 소주먹다 말아먹은 소주패
○ 이전에 원수 김진(金縝)이 한 도의 창기 중에 얼굴 예쁜 자를 모아다가 날마다 부하들과 밤낮으로 취하게 마시니, 군중에서 소주패라고 불렀는데 김진이 소주를 즐기기 때문이다. 군졸과 부장들이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때리고 욕하기 때문에, 온 군사가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였는데, 적이 이르니 군사들이 물러서서 싸우지 않고 말하기를, “원수는 소주패를 시켜 적을 치라. 우리들이 무엇하리오." 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패하였다.
2선발 : 술먹고 잠자다 군대 전멸시킨 손광유
○ 왜적이 밤에 착량(窄梁)에 들어와 군함 50여 척을 불태웠는데, 바다가 낮과 같이 밝았고,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만호 손광유(孫光裕)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검선(劍船)을 타고 간신히 면하였다. 이전에, 최영이 광유를 경계하기를, “착량강 어귀에서 군사의 위엄만 보이고, 바다에는 삼가 나가지 말라." 하였다. 이날 광유는 착량을 떠나자마자 크게 취하여 깊은 잠이 들었는데, 적이 갑자기 이르니 드디어 참패하였다. 경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3선발 : 병사 5천명 전멸시킨 김횡
○ 왜구가 합포에 침입해 군영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군사 5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자 왕은 조림(趙琳)을 보내어 김횡을 처형한 후 사지를 찢어 각 도에 조리돌렸다. - 고려사
○ 김횡이 처음에 나주에 거주할 적에,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재산이 넉넉하였다. 일찍이 왜적을 목포(木浦)에서 쳐서 관직과 상을 받았는데 이것을 통하여 권세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서 해마다 포왜사(捕倭使)가 되고, 도순어사(都巡禦使)가 되어서 백성의 재물을 가혹하게 벗겨먹으니, 전라도의 백성이 이를 고통스러워했다. 대호군 송분(宋芬)이 죽었는데, 그 아내가 상복을 벗기도 전에, 김횡이 관사(官事)를 핑계하고 끌고 가서 대낮에 강간을 하고 첩을 삼았으며, 또 관하 군졸에게 지급하는 관의 양곡을 감하여 반만 지급하고, 또 여러 주의 녹전선(祿轉船)에서 세를 받아 모두 제 집에 싣고 갔으니, 그의 탐하고 악함이 이와 같았다.
이런 상태에서 왜구가 하고 다니던 말 -
“無人呵禁, 誠樂土也.”
"막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이 땅이야말로 참으로 낙원이 따로 없구나!"
왜구를 막기는 커녕 소주 먹고 술 먹다 자고 남의 아내 상 중에 강간하는 막장들 데리고 왜구 막던 최영의 심정 -
최영이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경천역(敬天驛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에 숙영하면서 방어 작전을 짜다가,
“倭寇肆虐如此, 元帥擧何顔乎"
"왜구가 이처럼 잔악하게 활보하는데, 원수로써 (이를 막지 못해) 면목이 없다."
라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 고려사 최영 열전
최영이 눈물을 줄줄 흘릴떄 같이 왔던 다른 장군의 멘탈 -
元帥石文成, 但問歌妓來否, 觀者歎崔·石憂樂不同.
(최영과는 달리)원수 석문성(石文成)이 노래 잘 하는 기생이 왔는가에만 관심을 가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의 태도가 완연히 다름을 보고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