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놀란 듯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다 결국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그곳은 회사 근처 카페였고 그녀는 내 전 여자친구였다. 취업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나는 그녀를 만나 사귀었다.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그럭저럭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대학교를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취업시장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였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던 때와는 달리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딘가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게 우리가 사귀게 된 이유였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공채 공고를 찾아보고 자기소개서를 썼다. 존재하지 않는 실적을 만들어내고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을 창조해 냈다. 식사시간이 되면 고시원 옆 싸구려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먹었고, 저녁이면 얼굴을 맞대고 그날 하루 동안 쌓아올린 좌절과 허탈함을 서로 공유했다. 그리고 밤에는 헤어지기 전에 섹스를 했다. 얇디얇은 고시원 벽 너머로 신음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어 서로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부끄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옆방 사람에게서 항의가 들어와 고시원에서 쫓겨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고시원 주인은 일흔 살쯤 된 노인이었는데, 실제로 남녀혼숙을 이유로 입주자를 쫓아낸 적이 있다고 했다. 바닥에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고 벽에는 누런 습기자국이 벤 그 고시원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세가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남들처럼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는 데이트는 사치였다. 우리가 매일 섹스를 한 것은 오직 그것만이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유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 년 반 만에 그 생활을 탈출했다. 내가 합격한 곳은 대기업치고는 급여가 적고 일은 많다는 평을 받는 곳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대기업이었다. 합격자 발표를 확인한 순간 눈물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마음이 덤덤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나 합격했어.
그녀는 한동안 침묵만을 지키다 전화를 끊었다.
나는 대기업의 사원이었고 그녀는 취업준비생이었다. 나는 사 주간 신입생 합숙 교육을 들어갔고 부서에 배치받자마자 일주일에 다섯 번씩 회식에 시달렸다. 그녀를 만나기는커녕 전화 한 번 하기가 쉽지 않았다. 헤어짐에 애틋함 같은 건 없었다. 그건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어느 날 3차까지 끌려간 회식자리에서 나는 여자 동기를 택시로 바래다주게 되었다. 심하게 취한 상태였지만 거의 한 시간이나 택시를 타다 보니 대강 술이 깨었다. 그녀도 나처럼 자취를 하고 있었다. 고시원이 아니라 거실 하나에 방이 둘 딸린 그럴듯한 집이었다. 욕실도 있었다. 혼자 쓸 수 있는 욕실을 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마음을 정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 집을 부모님이 얻어 주셨다고 말했다. 와. 부자네. 나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동기의 깨끗한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옷을 벗기고 몸을 섞었다. 그날 밤 나는 옛 여자친구의 이름을 휴대전화에서 지웠다. 취업 후 새로 산 최신형 스마트폰이었다.
동기와 결혼하는 데는 반년이면 충분했다. 상견례부터 결혼식까지 모든 일을 나는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일 년 후에 아내는 임신했고 다시 아홉 달 후에 아들을 출산했다. 이 년 후에는 딸이 태어났다.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는 육아휴직 기간을 꽉 채운 후 사직서를 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서른네 평짜리 아파트는 처가에서 해 온 것이었다. 그녀가 돈을 벌어야 할 의무 따윈 없었다. 의무가 있는 사람은 나였다.
매년 월급은 쥐꼬리만큼 올랐고 출근시간은 줄어들 기색이 없었다. 나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식빵을 먹은 후 여섯 시 사십육 분 버스를 탔다. 그리고 일곱 시 삼십 분에 회사 정문 앞에서 내렸다. 퇴근시간은 대중없었지만 빠르면 아홉 시고 늦으면 열두 시였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컸지만 나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뿐이었다. 아들은 아내의 오른쪽 팔을 베고, 딸은 왼팔을 베고 잠들었다. 세 명이서 침대를 차지하였기에 내 잠자리는 언제부터인가 거실 소파 위로 바뀌었다.
그나마 주말에 운이 좋을 때면 깨어 있는 아이들과 얼굴을 맞댈 수 있었고, 운이 나쁠 때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일을 했다. 대리로 승진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월급이 조금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쥐꼬리 두 개.
그날도 마찬가지로 출근해야 했던 어느 토요일 낮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들른 회사 앞 카페에서 나는 옛 여자친구를 만났다. 오 년만에 만난 그녀는 계산대 맞은편에서 유치찬란한 색상의 아르바이트 복장을 입고 있었다. 촌스러운 모자 아래로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가 한 꺼풀 내려앉아 있었다. 받은 주문을 익숙한 솜씨로 포스기에 입력한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알아본 그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머.”
일요일에도 나는 출근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밥을 먹고, 전날과 마찬가지로 카페에 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한 후 어색하게 한 잔을 도로 내밀었다.
“자.”
그녀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갔지만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날의 일을 파하고 다시 카페로 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작정 기다렸다. 그녀는 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후 일곱 시에 그녀는 계산대 뒤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십 분 후에 사복차림으로 내가 앉은 테이블 옆에 섰다. 내가 말했다.
“저녁 먹으러 갈래?”
“뭐 사주냐에 따라서.”
그녀가 대답했다.
내 선택은 일식집이었다. 작은 룸에 들어온 그녀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가장 비싼 코스를 주문했다. 그녀는 많이 먹지 않았다. 대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주로 말했고 나는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다. 이 년 동안 탈락을 거듭하다가 간신히 작은 출판사에 취업했다고 했다. 직원이래야 모두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을 수 있을 만한 작은 회사였다. 그 규모만큼이나 월급도 적었기에 주말에는 따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장소가 하필이면 내 회사 앞 카페였다. 그녀는 내 직장에 대해 물었고 나는 어떤 부서에서 일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했다.
“결혼했구나.”
그녀가 내 왼손가락의 반지를 보며 말했다. 나는 목구멍으로 모래가 넘어가는 듯 껄끄러운 느낌을 받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부러 쾌활한 척 꾸며대어 말했다.
“넌 애인 없어?”
“없어.”
그녀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녀가 물었다.
“밥은 왜 사 준거야?”
“미안해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또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문득 낯설었다. 우리가 사귈 때는 단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사라지고 대신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
“다음에 또 사 줄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주말 출근이 조금쯤은 더 즐거워졌다. 출근하면 일을 하다 나가서 점심을 먹고 항상 카페에 들려 커피를 마셨다. 얼마 후에는 그녀의 식사시간을 알아낸 후 점심시간을 앞당겼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그녀와 항상 점심을 함께 먹었고 대체로 저녁도 같이 먹었다. 아내에게는 회사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불평으로 핑계를 대신했다. 아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돈 많이 벌어 와.”
“알았어. 오늘 많이 늦을 거야.”
나는 어린 딸을 안아 올려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집을 나와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한 잔 하러 갈래?”
우리는 십 분쯤 떨어진 오성 호텔의 바에 들어갔다. 나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나는 그녀의 것까지 같이 골라주었다. 나는 보드카 마티니였고 그녀는 테킬라 선라이즈였다. 붉고 노란 빛의 칵테일을 받아든 그녀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예전에 너랑 사귈 때는 이런 데 올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잔을 들어 단숨에 절반쯤 마시더니 캑캑대며 기침을 했다. 나는 웃으며 물을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내젓더니 다시 잔을 집어 들고는 남은 걸 한꺼번에 목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놀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술만 마시려고 굳이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니지?”
호텔방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살짝 몸을 빼더니 손가락으로 내 코를 살짝 눌렀다.
“샤워부터.”
나는 상의와 바지를 대충 벗어 바닥에 집어던진 후 욕실로 들어갔다. 어릴 때 이후로 그렇게 빨리 샤워를 마친 건 처음이었다. 몸의 물기를 대충 닦아낸 후 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가 내 휴대전화를 들고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새 거네. 산 지 얼마 안 됐나 봐.”
“두 달 됐어.”
“최신형?”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잽싸게 그녀를 따라 뛰어들었다. 그녀의 이마부터 발가락 끝까지 애무한 후 나는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감각. 익숙한 감정.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와이프랑은 자주 해?”
일이 끝난 후 한동안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던 그녀가 물었다.
“아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한 지 한참 됐어.”
“왜?”
“글쎄. 어쩌다 보니.”
나는 대강 대답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에 아내에 대한 질문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나의 결혼생활. 나의 아내. 나의 아이들. 나의 삶.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그만 물어봐.”
그날 집 현관문을 열며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나는 욕실로 가 손과 발을 비누로 씻었다. 속옷을 벗어 빨래바구니에 집어던지고 새로운 속옷을 꺼내 입었다.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켜고 소리를 묵음으로 전환했다. 화면에는 연예인들이 나와 일상사를 주워섬기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멍하니 TV를 보았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 회사에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카페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넘어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계산대로 가 낯선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다.
“저, 여기 원래 근무하던 분 어디 가셨나요?”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도 잘 몰라요. 오늘부터 근무하는 거라서.”
전화를 해도 그녀는 받지 않았다. 전화기가 아예 꺼져 있었다. 월요일에도, 화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초조해졌다. 업무시간에 계속 전화를 걸다가 상사에게 한 소리 듣기까지 했다. 그렇게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지나고 금요일이 지났다.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출근했지만 역시 그녀는 카페에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도 여전히 꺼져 있었다.
그녀가 그녀의 방식으로 연락해 온 것은 그 다음 월요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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