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과, 난생처음보는 항구와, 난생처음보는 여객선과, 실제로는 처음보는 컨셉의 여자 앞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소레와 저승행 티켓에 당첨된 레이디스 앤 젠틀맨들을 위한 초호화여객선의 승착장데스~"
"그 말투 당장 그만 안두면 블랙컨슈머의 참뜻이 뭔지 이 자리에서 보여드립니다?"
남자는 실제로 나이가 많을 것같은 사람이 이런류의 자본주의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힝~ 난데~ 도우시떼~"
"......진짜할까요?"
"..힝."
대화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시무룩해진 그녀의 모습 따위는 남자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가 바로 그 진짜 삼도천이라고
한다면 남자 본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니까.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남자라고 그걸 쉬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바로 좀 전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는 중이었고, 자신이 기억 못하는 시간 동안에 납치되었다고 하면 이렇게 멀쩡히 누군가와
만담을 할 수 있을리도 없기 때문이다.
"흠.. 굉장히 생생하긴 하지만 역시 그래도 이건 아무래도 꿈인 것같은데.."
"에 아닌데~ 꿈 아닌데~."
"그걸 어떻게 믿어요?"
“이렇게 대낮에 과도한 업무와 상사갈굼에 시달리고 있지 않다는거?”
“음… 꿈에서라도 있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경우가 아주 가끔 있기는 했기 때문에 해당안됨.”
"아니면~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하고 이정도 거리에서 눈마주치며 대화하고 있다는게 그 증거가 아닐까나~하고 얘기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찡끗거렸다.
"꽤나 짜증날 정도로 신빙성이 있기는 한데 현실에서든 꿈에서든 몇번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은 만나본적 있으니깐 그 뒤에 미사카는 미사카는 붙여야 될 것같은 말투는 그만두시죠?"
"시무룩..."
"입으로 그런 표현쓰지도 말아요!"
그러나 여자는 이내 다시 있는 힘껏 귀여운 척하며 빙그르르 돌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알겠다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통하고 내리쳤다. 남자는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혹시 머리를 한번 만져보실래요?"
"머리? 누구 머리?"
"그야 아조씨 머리죠. 설마 제 머리를 만지려고 하신건가요? 어머 야해라~."
"하아.. 벌써 지치는 기분이야.. 하여튼 하라니깐 하겠는데 머리 만지는거랑 증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다소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만져 본 남자는 매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머리숱이.. 풍성해졌어?!!"
그동안 일생을 살면서, 심지어 꿈 속에서조차도 단 한번도 풍성해진 적 없는 머리카락이 이렇게 수북하게 존재한다니. 그로서는 매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펀치 한방이면 지구반대편에 있는 구름까지 가르는 남자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는 분명 민두노총 신인드래프트 1픽 수준의 유망주였기에 매일밤 자라나라 머리머리라고 주문을 외우고, 사악한 정원사를 물리치기 위해 온갖 미신을 다 실행해보았더랬다. 그럼에도 그 어떤 방법도 그를 풍성함의 세계로 인도해주지 못했는데, 바로 지금의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수북청년단이 된 것이었다.
......
이제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아....... 사인은?"
"과로사입니다~"
"...그렇구만.."
남자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외라면 의외랄지, 저승하늘은 꽤나 푸르고 화창했더랬다. 이런 하늘을 본게 얼마만인지, 푸른 하늘은 제쳐두고 우중충한 하늘이라고 근래에 보기는 했었는지 생각해보니 거의 없었구나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7일 근무에 밤낮 가리지 않고 작업 갈굼 작업 갈굼. 끼니는 제때 챙겨먹은적이 있나, 잠은 제대로 편하게 자본적이 있나. 어찌보면 근 몇년간의 반복된 생활은 이런 결말을 위해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나마 학자금에, 그간 개인적으로 빌린 돈에, 밀렸던 공과금 같은건 다 처리하고 죽었으니 가족들한테나 지인들한테나 폐는 끼치지 않고 떠나는구나.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이런 생각을 잠깐 한 뒤, 남자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아줌마 하나 질문이 있는데요."
고개를 다시 내린 그는 여자에게 물었다.
"어라? 여기에 아줌마가 어디 있다는거죠? 어레~ 도통 알수가 없네~."
여자는 능글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하.. 그럼 아가씨. 됐죠?"
"어명을 내리시옵소서~"
"내가 죽은걸로 그 사장삐리리포함 상사삐리리놈들 엿은 먹을 수 있는건가요?"
"그게 될 것 같아서 물어보시는건가요?"
"아닙니다. 괜한걸 물어봤네요."
여기로 바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지상에서 원혼으로 남아 원수같은 회사놈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매일 24시간 동안 귀에다가 저스틴 비버의 베이비를 틀어주리라고 생각한 남자였다. 물론 이제와서는 불가능한 꿈이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 저기서 배를 타면 되는겁니까?"
"네 뭐 그렇기도 합니다만~"
여자는 팔짱을 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소신에게 세가지 방책이 있사옵니다."
"서촉정벌 때의 방사원처럼 말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네요."
숫자 3은 벙커링 할 때나 쓰는거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그녀 나름의 퍼포먼스를 급히 제지했다.
"아잉 일단 들어보시옵소서~"
딱히 별다른 얘기는 나오지 않을 것같았지만 그는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첫번째는~ 그냥 이대로 저승행 호화여객선을 타고 쭉 직행하는 것입니다. 가다보면 생전의 업보에 따라 지옥과 천당 중 한군데에 가게 됩니다."
"부모님보다 먼저 삼도천에 왔으니 뭐 천당 쪽 욕심은 버려야겠네요."
"음~ 살짝 비밀을 말씀드리자면 생전에 편히 산 사람에게나 지옥이지 지옥이지, 헬조선 온라인을 하드모드로 즐기고 오신 분들이라고 하면 살짝 편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뭐, 태릉선수촌 선수들이 해병대캠프에 간다 한들-이라는 겁니까."
"네~ 대충 비슷하네요~."
남자는 한편으로는 좀 안도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무섭기도 했다. 안도라고 함은 생전에 들은 그런 무자비한 형벌들은 없겠구나 하는데에 대한 안도, 씁쓸함이라는 것은 생전에 밥먹고 살겠다고 했던 행위들이 진짜 지옥레벨이었구나-라는 것, 무서움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기간 동안 살아서 했던거랑 똑같이 지낼 수도 있다는데 대한 무서움이었다.
“그럼 두번째는?”
“이세계로의 환생!”
“하아..”
한국인들은 소드마스터 해먹으러가서 예쁜 여자 만나고, 일본인들은 용사에 장사에 아무튼 이것저것 해먹으면서 예쁜여자 만난다는 그곳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사실 몇살의 몸으로 돌아갈지, 성별은 어떻게 될지, 어떤 장소에 떨어질지 같은게 다 랜덤이기 때문에 ‘이세계 로또’가 터지는 분들은 소수라는 사실!”
“그거야 그렇겠죠.”
치트다 싶어서 여신 데리고 이세계전생했더니 여신이라는 양반은 뻔뻔하고 무능력한 바보고, 파티라고 있는 사람들은 필살기 한번 쓰고 뻗어버리는 마법사랑 딜이 안되는 마조히스트 탱커라 혼자 개고생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이 시궁창이라 마왕간부는 커녕 고블린 하나 잡는데도 파티 전체가 쩔쩔매다가 파티장 저세상 보내고 멘탈붕괴를 겪을 수도 있다. 현실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라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지막 세번째는~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다시 원래세계로 되돌아가 소원풀이 하는 것."
"흠... 역시 다시 살아난다는 선택지는 없는거군요."
'”그건 일단 삼도천을 한번 건너가서 천당이든 지옥이든 한번 겪고 와야되는 거라서요."
"하기는."
죽어도 그냥 멀쩡히 다시 부활할 것같으면 애초에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게 있을리 없지,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점점 죽음 그자체에 대해 실감을 하게 된 남자는 있을리 없는 담배갑을 찾느라 잠시 방황하다가 이내 체념했다.
“대신 이쪽은 소원성취 시 아예 혼이 산화해버리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환생에 미련이 있으신 분들께는 추천드리지 않는답니다~.”
“흠~ 지옥행이 유력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게 더 나을 수도 있긴 하겠네.”
“그럴수도 있지만 지옥행 VIP고객분들은 어차피 리스트가 따로 존재하므로 이런걸로 피해갈 수는 없답니다~.”
저승도 의외로 꼼꼼하구나라며 남자는 조금 놀랬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적용되는지 아닌지가 훤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는 선택할 수 있는겁니까, 없는겁니까?”
“선택지가 없는 분께 제가 굳이 이렇게 이런거 저런거를 떠벌떠벌 거릴 이유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휴- 죽은 와중에 그건 참 다행이네요.”
은근 바로 지옥행이 아닐까라는 걱정을 했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이미 생을 마무리한 상태에서도 이런 걱정을 해야하는 점에 다소 우울한 감상을 갖게 되었다. 생전에 하기에 따라 천당도 갈 수 있고, 그게 아니라 다른 생을 가질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역시 죽음은 그냥 완전한 휴식인 편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그였다.
“자~ 그래서 선택은?”
"음~ 첫번째는 유감스럽지만 제가 천당씩이나 갈 것같지는 않아서 각하."
지옥행 VIP가 되지는 않을지언정 그렇다고 천당행 익스프레스를 탈리는 없고, 둘다 애매하다고 하면 지옥 쪽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 남자였다.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건 염두해두지 않으시는건가요~?"
"뭐- 천당에서 다 함께 만나는게 베스트긴 하겠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미미할 것같고. 뭐라 표현하긴 그렇지만 뭔가 다시 만날 염치도 없네요."
어려서는 덕질한다고 부모님 속썩이고, 나이먹어서는 결국 번듯한 직장을 잡지못해 부모님 속썩이고, 결국은 부모가 자식장례를 치르게 하는 불효까지 저질러버렸으니 이거 여러모로 참 볼 낯이 없구나-라고 생각한 그는 머리를 잠시 긁적였다.
"네~ 뭐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두번째는요?"
"뭐 그쪽도 각하. 별로 저한테 용사적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딱히 그쪽 사람들한테 환영받을 것같지도 않고, 거길 간다고 하하호호하며 잘지낼 수 있을 것같지도 않네요."
"그럼 남은건~."
"마지막이죠 뭐."
소거법 마냥 되기는 했지만 세 선택지를 모두 들은 시점에서 이미 남자의 마음은 마지막 선택지에 기울어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소원'을 푸는 것이지 '원망'을 푸는게 아니에요~. 원한관계분야는 소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뭐 제대로 듣고 있었고, 그 정도 단어의 의미차이는 알고 있으니깐 굳이 설명안하셔도 되요."
"설명충 캐릭터한테 설명을 하지말라고 하시다니 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분이신가~. 이미 들을건 다 들어놓고~ 아~ 슬프다 슬퍼~."
남자는 거짓울음 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양손으로 눈물 닦는 척하며 훌쩍훌쩍 거리는 것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에 귀여운 척이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이나. 하지만 이 사람이 자신의 결정을 실현시켜줄 사람이니만큼 남자는 잠시 참기로 했다.
"에휴.. 여튼 이제 뭘하면 되는거죠?"
"거기 가만히 계셔도 되요. 제가 손가락으로 살짝 밀기만 하면 되거든요."
잠시의 열연을 펼친 여자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왔다.
"아 예 알겠습니다."
남자는 다소 어정쩡한 차렷자세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 모습이 웃겼던 여자는 그가 그녀에게 선사했던 네거티브만큼 있는 힘껏 비웃어준 후
그의 바로 코 앞에 섰다. 남자는 이유모를 기분나쁨을 가슴속에서 삼켜 눌렀다.
"근데 다시 돌아가면 뭐하실건가요?"
"일한다고 미루고 미뤄둔 덕질이나 한번 시원하게 하려구요."
남자의 대답은 꽤나 즉각적이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소원? 아마 살아서만큼은 못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뭐 지금으로선 딱히 그거 말고는 생각나는 것도 없고 말이죠."
"그래요 그러시다면야."
여자는 남자의 이마에 검지손가락을 가만히 가져갔다. 한껏 풍성해졌다는 머리를 거울로 확인 한번 못하고 다시 이승에 돌아가는 것이 다소
아쉬워진 남자였지만 이내 저승까지 와서 무슨 후회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자신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덕질할 때가 최고의 순간이었는지, 그 덕질을 통해 무엇을 보고 싶어했고, 하고 싶어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여튼 여기 업무도 나름 빡셀텐데 여러가지로 고맙게 됐네요."
"별말씀을~ 죽기 싫다고 살려달라고 땡깡쓰는 진상들에 비하면야 아름다운 고객상이라도 하나 드리고 싶은 심정인데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