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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1/04 00:34:57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이색을 통해 보는 고려 말기 성리학자들의 '유화적 불교관'


고려 말기에 중국에 유학을 했던 유학자들의 손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한반도에 유입되었고, 이는 기존의 패러다임인 불교와 대착점에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고려 말기의 사상계 쪽은 보통 '유불대립' 으로 설명되는데……



그런데 실제로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의 행적을 보면 오히려 불교계와의 접점이 꽤 많은걸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성리학의 지배력이 약했을 도입 초창기는 그렇다쳐도, 성균관 명륜당을 통해 육성된 성리학자들(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조선개국 당시까지 활동함)들도 행적을 보면 불교계나 불교계 인사들과의 접점이 꽤 많습니다. 



이숭인의 『도은집』을 봐도 불교계 인사와의 교류가 상당히 많고, 정몽주의 경우는 불교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불교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정작 행적을 보면 불교계 인사와의 접점이 아주 많습니다. 고려 불교계 뿐만 아니라 일본 불교계에서도 정몽주는 '한류스타' 급 대우를 받았고, 정몽주에게 시 한번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정몽주가 참살 당했을 당시엔 되려 일본 불교계에서 "큰 인물이 죽었다." 고 아쉬워하기까지…… 실제 『포은집』을 보면 불교계 인사와의 접촉 기록이 아주 많기도 하구요.



생각해보면,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 이라고 하지만 여말 성리학자 중 조선 개국에 당초 앞장 선 성리학자들은 극단적인 소수파 쪽에 가까웠다는 걸 생각하면(처음에 정몽주 파로 엮여 날라갔다가 나중에 돌아온 이들 빼면) 여말 당시에는 되려 저러한 기풍이 주류에 가까웠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여하간 당시의 사대부들과 불교계 인사들은 막연히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밀접한 관계였는데, 이들에게 골고루 영향을 끼친 이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색의 경우는 단순히 불교계 인사와 어울린 행적이나 시를 주고받은 껄 떠나, 『목은집』에서 이론적으로 불교에 대해 옹호적인 태도를 보여주는데, 지금 보면 재미있는 언급들이 있어 몇개만 소개해봅니다.







『……논어를 보면, “그림을 그리려면 바탕이 희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희다는 것은, 바탕에 무늬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 가지 채색(彩色)을 모두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의 성(性)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성(性)이란 동요되는 바가 없이 담연(湛然)하고 잡스러운 것이 없이 순일(純一)하여 오상(五常 인ㆍ의ㆍ예ㆍ지ㆍ신)의 전체(全體)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성을 우리가 마땅히 길러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가나 불가 모두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그 계(戒)로 말미암아 정(定)으로 들어가고 정을 통해서 혜(慧)를 발휘하게 되면, 성(性)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의 순수하고 깨끗함이 부처와 같은 것이다. 오히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 목은문고, 6권 설산기(雪山記) 中




고려의 '유종' 소리를 듣던 이색이 수양 방법 있어 '유가나 불가나 모두 다를 바가 없다' 고 선언하는 부분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깨끗하고 순수한데, 이를 유교에서 『대학』의 8조목을 통해 본성을 왜곡하는 물욕과 더러움을 끊는다면, 불교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고, 수양방법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두 파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문의 심학이 어찌 헛되이 전해졌으랴 / 聖門心學肯虛傳
주일의 공부는 마치 좌선과도 같다네 / 主一功夫似坐禪


─ 목은시고, 21권 '느끼는 바가 있어 짓다' 中



성문의 심학이면 성리학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주일主一, 즉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은 경敬을 공부하는 구체적인 공부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색은 이 경을 공부하는 공부법을 이야기하면서 승려의 공부방법인 좌선과 똑같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앞서 말한 것이 수양방법은 달라도 목표가 같다는 점에서 유교와 불교의 동일한 점을 구했다면, 이 부분은 수양방법에 있어서의 동일한 점을 짚은 부분입니다.




『'부처는 큰 성인이다'』


『'부처는 지극히 성스럽고 지극히 공정한 분이라 아무리 극진히 받들더라도 기쁘게 여기지 않고, 아무리 심하게 박대하더라도 노하지 않을 것이다'』

─ 고려사 열전 이색전




이색이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점에서 언급된 말들입니다. "어...폐단이라고?" 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의 말들이지만, 당시 이색의 논리를 살펴 보면 아주 재밌습니다.



'부처는 큰 성인인데, 자기 추종자들이 이렇게 추악한 짓을 하면 과연 기뻐하겠느냐' '전하가 부처를 섬기는데 지극 정성을 하는데, 낭비가 심할까 걱정이다. 부처는 성스러운 분이라 굳이 그렇게 기력을 낭비해도 크게 기뻐하시지 않을 거다' 라는 거죠. 



 기독교로 예를 들자면 보통의 성리학자들의 불교계 폐단에 대한 비판이 "허무맹랑한 사막잡신 어쩌고……" 하는 식의 극단적인 레파토리라면, 이색의 논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지금 막장이 된 기독교를 보면 과연 좋아하시겠느냐" 라는 식의 이야기 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색이 '유가의 조종'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 재밌는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윤이 활동했던 은(殷)나라 이전은 하(夏)나라요 은나라 이후는 주(周)나라인데, 주나라가 쇠해지면서 석씨(釋氏)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윤의 뜻을 살펴보건대, 평민 중에서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구렁 속으로 밀어 넣는 것처럼 여겼으니, 그가 천하의 일을 가지고 자임(自任)한 것이 지극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이윤의 풍도(風度)가 일단 중국 전역에 퍼지고 나서는 멀리 서역(西域)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는데, 이때 석씨가 홀로 그 풍도를 이어받아 더욱더 그 범위를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삼계(三界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말하고 삼세(三世 전생(前生)ㆍ금생(今生)ㆍ내생(來生))를 말하면서 “꿈틀거리는 뭇 생명들은 모두가 나의 분신(分身)이니, 물에 빠진 자를 구해 주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리고 부지런히 육신을 수고롭히면서도 정작 자기 몸은 조금도 돌보지 않았으니, 이렇게 본다면 석씨 또한 이윤과 그 뜻이 같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관면(冠冕)을 찢어서 훼손시키는가 하면 부자(父子) 사이의 인연을 끊고서 금수(禽獸)와 한 무리가 된 것은 이윤과 다른 점인데, 우리 유자(儒者)가 그 때문에 더러 배척을 가하게 된 것 역시 지나친 일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의 예교(禮敎)가 옛날과 같지 않아 인륜이 무너진 나머지 석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또 적지 않게 되었고 보면, 석씨가 비록 자신의 몸 하나만 선하게 유지하려는 것과 가깝다고는 하더라도 그 정도의 풍도만 가지고서도 쇠퇴한 세상의 기풍을 오히려 격려할 수가 있겠기에, 내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면서 이따금씩 그들과 왕래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더구나 석씨가 군상(君上)에게 축복을 기원하고 있는 그 뜻이 가상한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 목은문고, 6권 각암기(覺菴記) 中




 이 부분은 불교에 대한 이색의 입장이 가장 잘 설명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나라 시대의 전설적 인물인 이윤은 중국 최초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인데, 혼란에 빠진 천하를 구하면서 만약 자기가 알고 있는 '요순' 의 가르침에 따라 구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그 사람을 구렁텅이로 밀어버린 것 처럼 고통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윤의 풍도가 일단 중국 전역에 퍼지자 그것은 서역까지 퍼졌고, 석가모니가 이를 이어받았습니다. 석가모니 역시 이윤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고통받는 자들을 구하려 노력했습니다.


 즉 이색의 불교관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불교는 유가에서 추종하는 요순의 교화가 서역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유가와 불가의 원류와 궁극적인 이상은 크게 다를게 없습니다.



 다만, 유가의 입장에서 볼때 벼슬 안하는 승려들의 모습이 세상을 구하는게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만 구하는 듯 하고, 또 불교에 몸을 들이면서 유가의 중요한 가르침인 부모 사이의 인륜을 끊어버리는 것 같은건 배척받을만 하나, 지금 세상은 이미 혼탁해져서 예절이 무너진지 오래라 오히려 엉터리 유가들이 불자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경우도 있고,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비록 자기 자신만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하나) 그 정도만 가지고도 충분히 막장인 세상에 모범이 될 수 있기에 이색 본인도 그들을 인정하며 왕래한다는 점입니다. 




 즉, 이색에게 있어서 불교는 최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가와 완전히 연결이 끊어진 것도 아닙니다. 보통의 성리학에서 보는 불교가 완전히 탈선한 길이라면, 이색의 사고방식에서는 불교는 '좀 비효율적이고 돌아가는 길인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목적지까지 가는 길' 에 불과할 뿐이라는 거죠.





『불교의 화복과 인과에 대한 설만 보더라도 거기에는 벌써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점이 있다……나는 불교를 심하게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호감을 가지고 어울리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에게서 취할 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 목은문고, 1권 '안각사 무무당의 기문' 中 






『천태 숭산사(嵩山寺)의 장로는 전의 이씨 가문의 우수한 인재로 태어났다. 그 집안에서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는데도 이를 버리고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조계(曹溪)에서 노닐며 사선(四選)에서 으뜸을 차지하였는데, 이것도 다시 버리고서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 부처의 정수(精髓)를 곧장 자기의 마음자리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부친이 강요하는 바람에 또 승과에 응시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천태의 선발에 뽑혀 상상품에 발탁된 뒤에 무량의처(無量義處)의 삼매(三昧)를 증득(證得)하기에 이르렀다.



신축년의 병란을 당해 산림이 거의 남김없이 소실되자 스님이 부모를 모시고 난을 피하였는데, 마치 집안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해 드렸으므로, 부모가 크게 기뻐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듣는 자들 역시 스님의 사람됨에 감복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모가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자 스님이 영구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으며 애통한 마음을 다했는가 하면, 묘소 옆에서 시묘하면서 삼년상을 제대로 마쳤다. 이는 비록 지행(志行)을 갖춘 우리 유자(儒者)라 할지라도 견줄 자가 드문 행동이라고 할 것이니, 스님이 마음속으로 지키고 있는 바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스님으로 말하자면, 이단에 속한 사람이다. 이것은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스님의 마음은 이미 보통의 승려가 아니다. 이미 부모에 효도했고 이미 군자를 사랑했다. 우리 유자들이 마땅히 나아가고, 또 나아가 따라야 할 것이다.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목은문고 제 5권 무은암기(無隱菴記) 中





유가의 입장에서 볼때 분명 불교는 이단이지만, 불교가 현실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색은 그 의미와 효용성을 거부하지 않고 인정하는 쪽을 택했고, 불교외에 도교 등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주자학이 일정부분 불교와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분명 불교와는 다르고, 여기에 불교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하지만 그 주자학을 핵심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불교에 대해 긍정하는 온건적 입장이었고, 이것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유교 지식인의 입장인이었다는 것이 무시할 수 없은 부분이라고도도 할 수 있겠스빈다.



고려사나 실록에서 보여지는 이색에 대한 평은, 이색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똑같이 이성계에 대항한 정몽주 등에 대해서도 훨씬 더 비판적인 편인데, (당장 고려사에서도 지적되듯이) 불교에 대해 이렇게 온건한 입장이었다는 점도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겁니다.




고려사, 특히 고려 말기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보인 정도전의 경우, 당시까지 국내에 있었던 그 어떠한 성리학자들보다도 배타적이었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정몽주와 교유 관계를 유지하던 시절, 정몽주가 불교 경전을 본다는 이야기가 있자 편지를 보내 우려하는 기색을 보이는가 하면, 『삼봉집』을 보면 정도전이 불교에 대해 보인 엄청난 증오심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이단을 깊이 파고들면 해로울 뿐이다' 고 하였으니, 해롭다는 한마디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든다…… 묵적은 남들을 사랑한다 하니 이는 인과 가까운 듯하다. 양주는 자기만을 위한다 하니 의와 가까운 듯 하다. 하지만 그들의 해악이 아버지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데 이르자 맹자가 이를 물리치고자 힘썼던 것이다.


불씨(석가모니)의 경우는 그 말이 아주 고상하고 미묘하여, 성명과 도덕을 넘나들어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 양주와 묵적보다 훨씬 심하다. 주자는 "불씨의 말은 듣고 있자면 이치에 가까운듯 착각하게 된다. 때문에 진리를 크게 어지럽힌다." 고 했다.』


─ 『삼봉집』 中




"석씨의 해악이 이제는 인륜을 헐어 버릴 지경에 이른지라 앞으로는 반드시 짐승들을 몰고와 인류를 멸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니, 명교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썬 마땅히 그들을 적으로 삼아 힘껏 공격해야 합니다. ……아직도 저들을 물리치지 못했으니, 결국은 끝내 물리치지 못할 듯 합니다. 그러므로 내 분을 참을 수가 없어, 먼 미래의 사람들이라도 이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지은 것입니다."

─ 1398년 여름, 권근에게 『불씨잡변』을 보여주며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입장은 이색과 비교하면 엄청날 정도로 배타적입니다. 때문에, 단순하게 이러한 사실만 보게 되면, 유불선의 종합한 장점을 취하려한 이색에 비하여 굉장히 저열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라는게 그렇게 단순한 프레임으로만 살필 수 없는 법이기도 합니다. 




『중원(中原)에 많은 일이 벌어진 이후에도 우리 동방만은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문치(文治)를 앞세우는 일을 태평 시대와 다를 것 없이 행하여 왔다. 그래서 주문(主文 은문(恩門))의 영광과 급제(及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중원에서도 따를 수 없다면서 모두 찬탄을 하고 있는 터이다.』


─ 목은문고 8권 '송자교에게 보낸 글' 中



『지금에 와서는 정치를 개혁하여 조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진 가운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떨쳐 일어나 생기를 띄고 있는데……』


─ 목은문고 7권 中




이색의 여러 글을 보면, 이색이 '태평성대' 라고 하거나 '생기를 띠고 있다' 고 하는 등, 굉장히 나이브한 시선으로 당대 고려를 보고 있는듯한 부분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수많은 외침과 사회병폐가 쌓이고 쌓인 당대 고려가 그렇게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이색도 혼란에 대해 걱정을 하거나, 여러 난리에서 자기같은 썩은 선비는 쓰여질 곳이 없다며 자조하는 글들을 쓰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입니다. 때문에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부분에 가까운 '낡아빠지고 모순된 제도를 바꿔야 한다' 는 의견보다는 '모두가 윤리도덕을 잘 회복하면 될 것이다' 라는 식의 (비교적) 가벼운 느낌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려에 대한 긍정입니다. 이색이 보는 세상은 아직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고, 충분히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환경입니다. 불교가 주류인 당대의 사회에 크게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니, 자연히 사상도 이를 굳이 크게 배척하기보다는 같이 조화를 꾀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가게 됩니다. 






십년 풍진에 전쟁도 너무 많아 / 十載風塵多戰伐
유생들은 영락해져서 구름처럼 흩어져버렸다 / 靑衿零落散如雲


해마다 가뭄 장마 혹독한데 / 不堪旱溢年來甚
아전 찾아와 토지세 독촉 심하여라 / 爭奈門前責地征


─ 『삼봉집』 자영(自詠) 中




군자들은 말하기를,


 ‘선생이 지닌 도(道)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데도 세상에 행해지지 못했으며, 선생의 학문은 고금을 꿰뚫을 수 있는데도 사람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였으며, 의로운 빛이 늠름하건만 소인들은 성을 내며, 충성스러운 말씀이 곧고 간절했건만 위에서는 듣지 않으셨으니, 이것으로 선생의 운명이 사납고 시대가 어려웠다고 의심한다.’ 하며, 


또 ‘선생의 선을 행함이 복록(福祿)을 오래 누릴 만한데도 그 수(壽)를 누리지 못했으며, 여경(餘慶)이 있어 후사(後嗣)가 있을 만한데도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선생의 불행을 의심한다.’고 합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저들의 의심이 모두 그르며 또 선생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곡(哭)을 하는가? 


그것은 이 백성들이 선생의 은덕을 입지 못함을 곡하고, 우리의 도가 의탁할 곳이 없음을 곡하고, 우리 무리가 본받을 데 없음을 곡하는 것이니, 결국 돌아간 분을 위해서 곡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를 위해서 곡하는 것입니다.


─ 『삼봉집』 박상충에 대한 제문 中




반면, 정도전 등의 눈에 보였던 세상은 이색의 눈에 보였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였던 세상은 도(道)가 조롱받는 더할 나위 없이 지옥같은 세상이었고, 망가져버린 현실이었습니다. 안그래도 불같은 성격에 과격파에 속하던 정도전은, 여기에 오랜 유배 생활을 겪으며 밑바닥을 보고 세상에 대한 실망과 내면으로부터의 분노도 극심해졌습니다. 이 무렵 정도전이 쓴 도깨비에게 사과하는 글[謝魑魅文 ] 같은 글은 거의 '멘탈 붕괴'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감정 표출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여기에 정도전 - 조준 - 남은 등은 유배 생활이나 지방관 생활을 통해, 당시 고려 민중들의 삶을 거의 파탄 수준으로 망가뜨려버린 왜구로 인한 피해를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대 고려 사회에 비해 비교적 온건하고 긍정적이고, 그 고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에 대해서도 온화하던 이색에 비해, 훨씬 강렬한 사회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던 정도전이 불교에 대해 더욱 더 적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이해 못할 일도 아니고, 그러한 의식이 왕조 교체라는 초유의 상황에 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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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love
16/01/04 00:48
수정 아이콘
불교에 대한 입장은 둘째치고,

[이색의 여러 글을 보면, 이색이 '태평성대' 라고 하거나 '생기를 띠고 있다' 고 하는 등, 굉장히 나이브한 시선으로 당대 고려를 보고 있는듯한 부분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 이색의 입장이 정말 현실감각이 저렇게 없을 수가 있군요;;

[수많은 외침과 사회병폐가 쌓이고 쌓인 당대 고려가 그렇게 긍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이색도 혼란에 대해 걱정을 하거나, 여러 난리에서 자기같은 썩은 선비는 쓰여질 곳이 없다며 자조하는 글들을 쓰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입니다. 때문에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부분에 가까운 '낡아빠지고 모순된 제도를 바꿔야 한다' 는 의견보다는 '모두가 윤리도덕을 잘 회복하면 될 것이다' 라는 식의 (비교적) 가벼운 느낌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 저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시스템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사람은 안 바뀐다, 라는 주의이기 때문에(그리고 그게 사실이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먹고 입고 살기도 바쁘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실감나지 않는 사건은 아무리 큰 일이라도 꿈쩍도 안 합니다. 착한 사람들 역시 이타적인 생각보다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시간이 더 길 거라고 보고요.) 어떻게 저런 나이브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참...;;
Re Marina
16/01/04 00:53
수정 아이콘
하긴 고려를 남기려고 했던 성리학자들 입장에서 고려의 중심 사상이던 불교를 굳이 몰아붙일 이유는 없었겠네요. 고려시대에도 유불이 공존한걸 생각하면 그 정도면 되었겠다 여겼을테고...
공유는흥한다
16/01/04 01:53
수정 아이콘
생각보다는 오픈마인드군요
몽쇌통통
16/01/04 03:31
수정 아이콘
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저 신경쓰여요
16/01/04 03:43
수정 아이콘
확실히 조선을 만든 성리학자들이 당시 시점에서 개혁적이긴 했네요. 저는 그런 개혁이 필요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보수적 유학자의 시각을 알게 된 것은 재밌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카시우스.
16/01/04 08:22
수정 아이콘
역시 기득권은 조화, 화합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피지배층은 급진, 투쟁을 좋아하는 것은 유구한 전통이군요.크크
치토스
16/01/04 10:09
수정 아이콘
유일하게 기득권이면서 급진,투쟁을 좋아했던 사람은 조광조가 유일하지 않았을런지..
공유는흥한다
16/01/04 11:59
수정 아이콘
조광조도 처음부터 기득권은 아니었으니까요...
나이트해머
16/01/04 13:29
수정 아이콘
중종시대면 공신이 기득권이지 조광조가 기득권은 아니죠.
카롱카롱
16/01/04 15:19
수정 아이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혁명 이론의 제공자들은 피지배층보다는 지배층 내지 중산층 이상이 더 많았죠... 그라쿠스 형제부터 시작해서 엥겔스...레닌까지...
진짜 피지배층은 지배관계 자체를 인식조차도 못하는게 보통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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