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에게
엄마 전 이제 떠나요.
☆☆랑 ☆☆가 너무 괴롭혀서
학교에 가기 싫어요.
죄송해요.
언젠가 다시 뵙겠습니다.
딸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 아빠에게 남긴 편지였어요. 사실 저요, 아무렇게나 주워 읽은 책 덕분에 굉장히 뜬금없는 문어체 말투가 튀어나오곤 하거든요. 일학년 때, 짝꿍이랑 다투고 일기장 말미에 ‘내 너에게 언젠가 복수하리’라고 적었어요. 그 일로 두고두고 얼마나 놀림을 당했던지.
하여튼 그 편지를 남기고 저는 터벅터벅 걸었어요. 수중에 돈은 이천오백원. 밤이 오면 다이시처럼 어딘가 폐건물이나 수풀 사이에서 잘 생각이었죠. 제가 이상한 쪽에서 겁이 없는 애였거든요. 뭐 그리고 거창하게 글을 남기니 괜히 더 용감해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직 점심도 안 된 시간이었고, 최대한 돈을 아끼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그때 생각난 게 지하철이었어요.
그때 지하철 요금이 오백원이었나, 사백원이었을 거예요. 엄마 뒤를 따라 종이로 된 지하철 표를 끊고 여러 번 지하철을 탔었지요. 지하철을 타면 어디든 갈 수 있었어요. 오백원으로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주위를 둘러보며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어요. 엄마랑 같이 걷던 거리를 혼자 가려니 왠지 떨렸어요. 그런데, 창문이 열린 빌딩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얘, 꼬마야!”
혹시 엄마가 벌써 잡으러 온 걸까요? 엄마랑 아는 사람이면 어떡하죠? 전 뒤돌아보지도 않고 달렸어요. 이제 모험이 시작인데요. 학교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고요. 게다가 얼마나 야단을 맞을지, 생각하기도 싫었으니까요. 아주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저를 불렀고, 저는 너무 궁금해서 돌아봤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아주머니랑 이야기할 용기는 없으니 그대로 지하철역으로 갔죠. 등이 축축해진 건 땀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전철역으로 들어갔어요. 그 전에도 혼자 타 본 적은 있었죠. 하지만 오늘따라 매표소에서 표를 사면 아저씨가 제 정체를 알아낼 것 같았어요. 그래서 동전을 넣고 표를 뽑았어요. 가운데 마그네틱 선이 있는 노란 전철 표. 저는 그걸 꼭 쥐고 들어갔죠.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요.
평소에도 조금 무서웠던 지하철 불빛. 터널에 있는 하얀색 불빛이 그렇게 무서웠어요. 전철이 역에서 떠날 때는 시커먼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기분이었고요. 게다가 오늘 또 무서웠던 건, 어른들이요. 같이 전철에 탄 어른들이 금방이라도 왜 학교에 안 갔냐고 물어볼 것 같았어요. 그럴 때는 엄마 회사에 가는 거라고 말할 거라고 몇 번 속으로 연습을 했죠. 하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책을 보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냥 멍 하니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전 의자 가장자리에 있는 봉을 꼭 잡았어요.
전철이 엄마 회사가 있는 역을 지나갔어요. 여기서부턴, 정말로 가본 적이 없는 역인 거예요. 2호선을 타고 계속 가다가, 4호선 환승 역에서 내렸어요. 엄마가 차를 태워줘야만 가는 멀리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었거든요. 아까까지는 벌벌 떨고 있었지만,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았어요. 전 용감하게 다른 전철에 탔죠. 사실은 사람이 없을 때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전 종점까지 전철을 타고 갔어요. 차에서 내리라는 안내메시지가 들릴 때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어요. 그리고는 펄쩍 뛰어 매달렸지요.
전철에 보면 동그란 손잡이가 천정에 있잖아요. 전 거기 매달려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옛날에 우리 모두 예의를 지키는 문화시민이 되어 달라나 뭐라나 하던 캠페인을 할 때, 문화시민은 하지 않는 행동으로 나온 그림이 있어요. 꼬맹이가 전철에서 손잡이에 매달려 장난을 치는 그림말이에요. 그걸 보고 나서 전철에 탈 때마다 저기에 매달리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느꼈어요. 상상도 못한 거였는데, 굳이 하지 말라고 알려주니까 진짜 무지무지 하고 싶었거든요. 그걸 지금 해낸 거예요!
“거기에 매달리면 안 돼!”
채 일 분도 못 매달렸는데. 이번에는 어떤 아저씨였어요. 전 깜짝 놀라서 손잡이를 탁 놔버렸어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균형을 잡았지요. 제복을 입은 전철 기관사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는 손잡이는 매달리는 곳이 아니다 잔소리를 몇 마디 하더니 주머니에서 껌을 꺼냈어요.
“이거 하나 먹어라.”
아저씨는 왜 벌써 학교에서 나왔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아저씨가 준 껌은 쥬시 후레시였는데요, 껌을 하나 꺼내 주고는 휘파람을 불었지요. 은박지를 벗겨 껌을 입에 넣었어요. 그제서야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저씨는 다음 차 오면 다음 차를 타라고 하더니 기관사실로 들어갔어요. 주변을 살펴 보니 아주 낯선 곳이었어요.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논밭이 보였어요. 누런 논밭을 보고 역 이름을 봤는데, 전철을 거꾸로 탔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친구 집은 정확히 반대편이었죠.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뭐, 그러고 의자에 앉아 대롱대롱 다리를 흔들며 전철을 기다렸어요.
친구네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어요. 나는 외톨이였어요. 학교에서처럼요. 팥죽이 급식으로 나온 점심시간이었어요.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는데, 도저히 못 먹겠는 거예요. 한참이 지나도 식판을 비우지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왔어요. “그거 다 먹을 때까지 내 수업에 들어오지 마.” 선생님은 내 책상을 뒤로 밀어버렸어요. 선생님은 풍금을 치며 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들은 책을 펼치고 노래를 불렀고요. 나만 차갑게 식은 팥죽을 앞에 두고 서 있었어요.
막상 친구네 집이 있는 역까지 왔는데. 내리고 보니 가고 싶지 않았어요. 거기엔 엄마가 있을 수도 있고요. 가면 잡혀서 야단맞을 것 같고요. 아, 친구한테 옷장에 숨겨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나니아 시리즈’처럼 새로운 세계로 갈지 누가 알아요? 안 그렇더라도 거기 숨어서 친구가 주는 밥도 먹고, 학교도 안 가고, 잔소리도 안 듣고. 그렇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내일 학교에 가면, 가출했다고 선생님이 야단칠 거예요. 아니, 모를지도 몰라요. 하지만 엄마랑 아빠는 알겠죠. 편지까지 써 두었으니까요. 나도 다이시처럼 잘 하고 싶었는데. 왠지 모르게 걸음이 집으로 향했어요. 모험은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전철을 타고, 한바탕 멀리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니까 문 앞에 엄마랑 할머니가 있었어요. 야단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그냥 날 꽉 끌어안았지요. 할머니는 어이구, 했어요.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딸기를 먹었어요. 엄마가 말했어요.
“그래서 어디 갔다 온 거야?”
“지하철.”
“지하철?”
“○○이를 만나려고…….”
“○○이가 만나고 싶었어?”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만나고 싶어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죠. 엄마가 한숨을 쉬며 내 가방을 열었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어요.
“구두 닦으려고 했어?”
“돈 벌어야 하니까…….”
“으이구, 옷 좀 봐라.”
아까부터 등허리에 축축하게 젖어있는 건, ‘제대로’ 뚜껑을 닫지 않은 김치통에서 새어나온 김치국물이었어요. 하얀 체육복이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그 아주머니, 김치국물 나온다고 나를 불렀던 걸까요? 나는 뺨을 긁었어요. 왠지 난감해져서요.
“얼른 씻고 자.”
엄마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나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침대에 누웠어요. 다이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모험을 한 게 아닐까요. 아주 멀리도 가 봤으니까요. 학교에는, 다시 가야만 하지만요.
모험은 싱겁게 끝났지만 그 후부터 왠지 아이들은 다시는 저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학교 도중에 뛰쳐나가서 퍽 불량학생처럼 보였나 봐요. 그건 꽤 좋은 일이었고, 난 어떻게든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어요. 그 해, 우리 반 문집에 선생님이 쓴 서문엔 내 이름만이 쏙 빠져있었지만, 괜찮았어요. 선생님에게 보여주지 않은 나만의 수첩에는 모험이야기를 가득 썼으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비장하게 써 두었거든요.
‘나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
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