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년 11월 25일, 5.16 정변이 터지고 1년이 조금 지나 전국이 아직은 혼란스러울때, 아버지는 경남 의령군 유수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댁은 여느 농촌마을과 크게 다를바없는 가난한 집안이었고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3살때 돈을 벌기위하여 군대에 자진입대해 2년간 베트남에 파병을 갔다오셨다. 덕분에 아버지는 유공자 자녀 인정을 받아 방위만 마치고 군복무를 끝냈다.
가난은 아버지로 하여금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벌어 잘 살겠다는 욕구의 근원이었고, 16살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큰할아버지 일을 도우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3년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때와 다름없이 큰할아버지의 방앗간 일을 도우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에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다시 농사를 하라고 하실줄 알고 미리 거절연습을 몇번이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그렇듯 할아버지는 전혀 예상과 다른 말을 꺼내셨다.
"희서야"
"예 말씀하이소"
"니 앞으로 뭐하고 묵고살끼고?"
"큰아버지 방앗간 일 물려받을까 그래 생각중임니더, 와예?"
아버지는 그때 할아버지 표정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저으며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을 본다는 그런 표정,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런 표정.
"안된다. 희서야 사내라면 모름지기 큰 회사에 다니야 된다. 방앗간하면 니 결혼이나 할거 같나?"
"방앗간갖고 돈잘벌면 된다 아입니꺼?"
"씰데없는 소리말고 이번에 어데고? 핸대? 아버지가 친구한테 들은긴데 거기서 일해봐라, 돈도 많이주고 사람도 많이 뽑는다더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3년 평생동안 아버지는 할아버지 말씀 한번 어긴적이 없었고 그렇게 아버지는 방앗간 일을 도우며 모은 돈 조금 들고 무작정 울산으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아버지는 정말 쉽게 생산직 취업에 성공했지만 나름 반항심이 생겼던지 딱 5년만하고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할 구상을 가졌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87'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기 전까지 노동자 대우는 그야말로 시궁창이었고 나름 한 끈기 하셨던 아버지도 더러워서라도 때려 치우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폭풍같던 87년이 지나가고 88년에 지금의 아내,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나름 가정을 꾸려가며 잘 살고 있던 와중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앉히시고 진지하게 한마디 꺼냈다.
"숙아"
"바쁜데 와그라는데예?"
"니한텐 말안했는데, 나 내년에 회사 그만두고 사업한번 할까한다. 괜찮제?"
같은 경상도 산골출신이지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정말 한성깔 하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한번 쳐다보고 고개들어 천장을 한번 보고는 단호하게 한마디 했다.
"택도없는 소리말고 다니소, 난 또 뭔소리한다꼬? 한마디만 그런말 꺼내면 알아서 하이소"
워낙 단호했기에 결국 한마디도 못 받아치고 그대로 아버지는 계속해서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이듬해 내가 태어나고 96년에 동생이 태어나면서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둘래야 도저히 그만둘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생각은 영원히 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던가, 98년도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국내 대기업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쓸려나갔고 현대차도 거기선 예외일수 없었다. 그때 난 7살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상태여서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땐 한치앞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말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만약 부도나서 잘리거나 정리해고당하면 퇴직금도 못챙기고 실업자가 된다. 하지만 명퇴처리라도 된다면 최소한 퇴직금으로 뭐라도 해볼수 있다. 이때 아버지는 정말로 그만둘 생각으로 말 그대로 형식적으로 어머니와 상의했다.
"숙아, 우얘야되노? 그만두면 퇴직금이라도 나온다."
하지만 어머니 성격 자식 둘 보고도 어디가던가, 10년전 그 모습 그대로 한마디 하셨다.
"씰데없는 소리말고 다니소, 그만두면 집에 못들어올줄 알고"
무썰듯 단칼에 말을 잘라버리고 장보러 나가신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는 그때처럼 한마디도 못하고 계속해서 회사에 몸을 담게 되었다. 다행이도 회사는 위기를 무사히 극복했고 정리해고자는 그대로 복직되었지만 명예퇴직자는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 말씀으론 그때 동기가 여러명 있었는데 다 잘되는 걸 못봤다고 하셨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지금, 정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나이가 되어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하신 아버지는 종종 나에게 한마디 하신다.
"균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속된 단체에 큰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아버지도 28년동안 현대에 일하면서 누구보다 우리회사가 자랑스럽고 멋지다. 너도 육군 장교로서 군에 대한 자부심을 항상 가져야 한다"
중대장에게 말로 피떡이 되도록 털리고 너무 서러워서 전화로 신세한탄을 했던 내가 얼마나 그때 그 시절 아버지를 닮았는지.. 하필 내 나이도 딱 24살, 자식은 부모님을 닮는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때만큼 그런 말이 공감된적이 없었다.
앞으로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아버지와 크게 다를것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이 때려치우겠다면 극구 만류하시겠지.
(차로 5시간 떨어져 있는 전라도에서 일하다 보니 울산이나 현대 이야기만 나와도 반사적으로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납니다. 공장은 냉방도 그렇게 많이 못틀어줄건데 휴가나가면 몸보신이나 제대로 시켜드려야겠어요. 집에서 떨어져보니깐 정말 부모님의 소중함을 알겠네요, 역시 말로 듣는것보단 몸으로 느껴보는게 최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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