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que, 루나벨라, 바나나도너츠, 카루오스...이분들 PGR롤 채널에서 보는거만으로도 멘붕되는 후추통 데리고 열심히 멘탈 잡으면서 게임 해주셨죠.... 이참에 이분들에게 감사 드릴겸 해서 안그래도 쓰려고 했던 글을 바칩니다.
삼국지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많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일은 상당히 적고 그나마 초선은 여포와 사통한 시녀를 모티브로 한 가상 인물이고, 여성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적죠.
우리가 아는 삼국지 내에서의 여성은 초선, 손부인, 황부인, 견희 정도죠.
삼국지든 정사든 간에 여성들은 항상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평생에 걸쳐 크게 고생을 했던 여인이 있습니다.
채염입니다. 우리에겐 채문희로 잘 알려진 여성이죠.
채염의 아버지는 시중 채옹입니다. 채옹은 후한 말의 문학가로서 연주 진류군 출신입니다. 영제 시대에 언관에 해당하는 의랑직을 거쳤고 178년 궁궐 마당에 푸른색 무지개가 나타나자 탐관오리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중상시인 정황의 모함으로 하옥되었지만 같은 중상시인 여강이 채옹을 변호해서 삭방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189년 영제의 죽고, 소제가 즉위하면서 대사령으로 고향인 진류군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중상시 왕보의 동생인 오원군 태수 왕지의 원한떄문에 강해 지역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겨우겨우 돌아온 채옹은 또다시 고난을 만납니다. 동탁이 정권을 잡으면서 강직한데다 문장력이 뛰어난 채옹을 이용해 정권강화를 하려고 했죠. 채옹은 동탁의 부름을 거부하다가 동탁이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어쩔수 없이 출사하죠. 동탁은 채옹을 시어사로 등용했다가 사흘만에 지서어사, 상서직의 관직을 했다가 다시 파군태수가 되었다가 시중이 됩니다.
이후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되고 시체가 저자에 내걸리자 채옹은 동탁의 시체에 곡을 합니다. 이를 들은 왕윤은 채옹을 잡아다 죽이려 합니다. 채옹은 자신이 쓰고 있던 한서를 완성시킨 다음 죽여달라고 요청하지만 왕윤은 이를 거부하죠. 태보 마일제는 왕윤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왕윤이 오래가지 못할것이라고 말합니다.
채옹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한명은 채염이고 다른 한명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채염은 아버지 채옹이 낙양으로 돌아오자 하동의 위중도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갑니다. 하지만 위중도는 얼마 안가서 병으로 죽었고 마침 이각과 곽사의 삼보의 난이 일어나면서 채염은 고향인 진류로 돌아가려고 하죠. 하지만 채염의 비극은 다시 시작됩니다.
당시 삼보의 난 이후 이각과 곽사의 잔당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남흉노 선우 주천립은 우현왕 거비에게 천여의 기병을 주어 이들을 무찌르게 하죠. 당시 장안에서 낙양으로 돌아가는 헌제를 호위하기 위해서 흑산적이나 이락 등의 무뢰배까지 쓰는 등 헌제의 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흉노까지 가세하면서 각 지역에서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이러던 와중에 미색이 출중했던 채염 역시도 하동군 평양에서 이 기병에 붙잡혔고, 흉노의 좌현왕에게 바쳐집니다. 그리고 12년간 좌현왕의 첩으로서 1남 1녀를 얻게되죠.
그러던 채염은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권을 잡은 조조가 채염의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거금을 지불하고 채염을 돌아오도록 한 것이죠. 조조는 채옹과 평소 잘 알고 지낸 사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채염이 낳은 1남 1녀의 아이들은 데리고 돌아오질 못합니다. 그들은 좌현왕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에 흉노의 땅에 놓아두고 올 수밖에 없었죠.
한나라로 돌아온 채염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해피엔딩이죠.
..............이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나라로 돌아온 채염은 동사라는 사람을 새 남편으로 맞이합니다. 조조의 중매였죠.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서 모든 고난이 끝났을 것 같고, 새 남편을 맞이한 채염의 생도 행복하게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동사는 예전에 둔전을 관리하는 둔전도위직을 거쳤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둔전은 위나라의 경제력 근간이 된 제도죠. 그런데 동사는 이 둔전을 관리하던 중 범법행위를 한 모양입니다. 아마도 횡령죄였던 모양입니다. 동사는 이 일로 인해 처형당하게 되었고, 남편이 죽을 위험에 처해지자 채염은 조조에게 구명을 요청합니다.
조조는 그녀를 딱하게 여깁니다. 강력한 법가적, 패도적 정치 권력가의 표본인 조조였지만 하도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었던 채염을 본 조조는 그녀의 남편 동사를 사면시켜 줍니다. 하지만 무조건 사면시켜 줄리 없던 조조는 채염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조조 : 대신에 채염 니가 내 여자가 되어라!!!
이랬을 거 같죠?
조조 : 채염, 네 아버지인 채옹의 글이 많이 망실되었네. 내 동사를 살려주었으니 아버지인 채옹의 망실된 글을 기억해 내 써서 내게 바치게.
채염은 아버지인 채옹의 망실된 글 400편을 모두 기억해 내 조조에게 복원해 올립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끝으로 채염에 대한 기록은 없스비다.
채염이 쓴 글은 상당히 많습니다만, 대부분 아버지 채옹의 글을 복원 하는 것이고 그녀가 쓴 비분시는 후한서 권 84 열녀전 동사처전(채염)에 있습니다. 그리고 호가십팔박이라는 시 역시 채염이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송대 문인인 소식(소동파)가 호가십팔박은 의작(타인의 작품을 모방하여 만든 시)라고 주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호적, 정진탁, 유대걸 등의 후대 학자들까지 이를 뒷받침 하면서 호가십팔박은 채염의 시가 아닌 것으로 결정납니다. 호가십팔박에서 묘사된 지리와 환경은 흉노가 살던 태행산맥 등이 아닌 선비와 오환이 살던 음산산맥 근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채염의 생애는 송대 화가가 그린 "채문희귀환도"라는 그림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현재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죠.
1959년, 무덤마저 없는 채염을 두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호적, 정진탁, 유대걸의 호가십팔박 의작 논쟁이 벌어진 것이죠. 이 의작논쟁을 벌인 것은 당시의 정치가지자 역사가인 곽말약이었습니다.
현재 조조의 재평가론등을 주장한 사람은 이 곽말약입니다. 곽말약은 조조 재평가 운동 중 하나로 호가십팔박의 작자가 채염이라고 주장하죠. 그리고 그를 재평가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곽말약의 주장도 순진하지 않은 것이, 조조의 재평가는 황건 농민을 조직해 주력 세력으로 삼고 호족을 억눌러 약자를 구제하기 둔전제를 시행하였으며 건안문학을 중국 문학사상 최고조 경지에 끌어올린 사람이고, 조조야 말로 농민 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상과 부합한다고 한 것이죠.
하지만 곽말약의 채염의 호가십팔박 저작론은 수긍하는 사람이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곽말약의 행태를 본 채염이 어찌 말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삼국지의 여인들 중 무난한 생을 산 이는 상당히 적습니다. 하지만 난세의 풍파에 휩쓸려 비극적 인생을 살았던 채염이 2차 창작물처럼 온화하게 웃을수만 있었을까요.
중국에 채염이 있다면 한국에는 허난설헌이 있죠. 이 허난설헌에 대한 건 눈시님이 써주실거라 믿습니다.(씨익...)
마지막으로 비분시를 읽을수 있는 곳을 링크해드리겠습니다.
http://blog.daum.net/irkysum/4707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