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육전대는 4시간의 행군 후 11시경 정족산성 근처에 도착합니다. 일단 정찰을 개시했지만, 800명이나 되는 병력이 존재할만한 흔적을 찾지 못 합니다. 덕분에 곧바로 들어가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죠. 참모들은 점심을 먹고 공격하자고 건의했지만 올리비에는 점령 후 전등사 대웅전에서 먹자고 결정합니다.
병력 150명을 3개로 나눠 2개조는 동문을, 나머지 1개조는 자기가 직접 지휘하면서 남문을 공격합니다.
양헌수는 이미 정찰병을 보내 이들의 이동을 파악했고, 바로 동남문의 상태를 점검하고 응전태세를 갖춥니다. 여기에 유인조를 차출해 곳곳에 매복, 프랑스군을 혼란시켰죠. 프랑스군은 이들을 쫓았지만 바로 숨어버렸고 자신들의 위치만 확실히 알려버립니다. 이쯤되면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성에서 300m까지 접근했지만 여전히 조선군의 대응은 없었습니다.
2시경, 프랑스군은 성벽 근처까지 접근합니다. 선봉은 이미 성 앞에 다다랐고, 본대도 100m까지 온 상황이었죠. 조선군의 공격은 바로 이 때 시작됩니다.
분명 프랑스군의 화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강하다고 언제나 이기는 게 아니죠. 조선군은 마구잡이로 대응하지 않고 양헌수의 명령에 맞춰 조직적으로 행동했으며, 군인으로선 부족하다 해도 총 쏘는데는 둘째라면 서러워 할 포수들이었습니다. 그 호랑이를 정면에서 상대하던 이들이었죠. 여기다 프랑스군에는 대포가 없었던 반면, 조선군은 화포를 가지고 있었구요. 고폭탄도 없고 약한 화포라 해도 맞으면 죽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온 이상 빗나갈 걸 걱정할 필요도 없었구요.
무엇보다 조선군에게는 정족산성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그저 좁고 험한 길을 올라오는 프랑스군을 올라오는대로 쏘면 되는 거였죠.
이렇게 말이죠 -_-a
전투는 불과 30분만에 끝납니다. 올리비에는 부상병을 후방으로 옮기면서 어떻게든 반격하려 했지만 조선군의 집중사격에 밀려날 뿐이었죠. 조선군은 딱히 무리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이 접근하면 집중공격할 뿐이었죠. 프랑스군이 할 수 있는 건 엄폐물을 찾는 것 뿐이었습니다.
30분만에 장교 5명을 포함해 35명이 부상당합니다. 전사자는 3명이었죠 결국 올리비에는 공격을 포기, 퇴각합니다. 의외로 아슬아슬했던 게 조선군 쪽에서도 탄약을 거의 다 쓴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그냥 보낼 순 없어서 칼과 화살로 무장한 추격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후방대비를 철저히 했고, 세 차례 밀고 나갔지만 다 막혔죠.
+) 양헌수는 프랑스군이 거의 50명은 죽은 것 같다고 보고했지만 신빙성은 낮습니다. 프랑스군의 퇴각하는 모습을 본 백성들이 전해준 정보라서요. 수레에 누워있는 병사를 다 죽은 걸로 쳤죠.
조선군이 철수하고 나자 프랑스군은 한숨을 돌립니다. 하지만 점심식사를 추진하던 말이 총성에 달아나버려 점심도 굶으면서 주둔지로 돌아가야 했죠. 그 때가 밤 9시, 올리비에는 이런 보고를 올립니다.
"정족산성의 조선군은 우리 선교사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완강하게 저항했다. 아마도 서울에서 강화도로 잠입한 정예군인 것으로 판단된다. 많은 무기고와 탄약고가 있는 강화도는 그 전체라 바로 조선의 군사기지다. 정족산성은 그 중 하나로 이 산성을 점령하려면 적어도 500여명의 병력과 야포병 1개 중대 규모의 병력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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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의 피해는 가벼웠습니다. 양평에서 차출된 포수 윤춘길이 전사했고 4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은 정도였죠. 여기에 프랑스군이 버리고 간 많은 무기와 장비, 의류, 말과 노새를 노획했구요.
저녁이 되자 주변에서 전투를 구경하던 주민들이 몰려와 승전을 축하합니다.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저녁식사를 하고 야습에 대비했죠. 한 차례 이겼음에도 분위기가 좋진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의 화력을 직접 보기도 했고 탄약도 떨어졌으니까요. 양헌수는 이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힘썼죠.
자정이 되면서 평양 유격장 최경선 등이 이끄는 관서지방 포수 88명이 입성합니다. 여기에 종친으로 전쟁에 자원한 이규한 등 9명도 들어왔죠. 원군만큼 사기 올리는데 좋은 게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양헌수는 다음 작전을 구상하죠. 강화성 탈환이었습니다.
일단 병력이 더 필요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지금도 각도의 포수들이 모이고 있었고, 대군이 상륙한다면 이들로 강화성을 공격하려 했죠. 여기에 주민들을 모아 근처에서 횃불과 북소리로 적을 혼란시키며, 서남북을 공격해 적이 동문으로 탈출할 경우 이들을 괴멸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 에 솔직히 될 것 같진 않습니다만 -_-;
다음 날 양헌수는 주민으로 위장한 정찰병을 보냅니다. 헌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죠. 프랑스군이 강화유수부를 파괴한 후 철수했다는 거였습니다.
올리비에가 돌아와서 보고를 하자 로즈는 바로 회의를 엽니다. 그 날 밤 곧바로 철수를 결정하죠. 다음날(10일)내에 승선을 완료한 후 11일 새벽 만조를 이용해 염하(강화해협)을 빠져나간다는 거였습니다.
조선군에게도 의외였고 프랑스군에게는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얕봤던 조선군에게 제법 아픈 타격을 입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총병력은 1500여명, 배를 움직일 수병들을 빼면 수적으로는 절대 우위가 아니었죠. (수병과 육전대의 비율에 대해서는 다 말이 다르군요 - -a) 육전대가 천명쯤 된다 하더라도 성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절반을 투입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강화부를 점령했을 뿐 강화도 전체를 점령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은 절대 우호적일 수 없었고, 조선군은 프랑스군 몰래 염하를 건너고 강화도 내에서도 마음대로 움직였죠. 이들을 그대로 두고 본토를 칠 수도 없었고, 강화도 건너편에도 조선군이 계속 증원되고 있었습니다. 정족산성 전투의 피해를 생각한다면 어느 쪽이든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죠.
애초의 계획도 강화도 점령 후 한양으로 가는 수로를 끊고, 본토에는 견제만 하면서 한양을 압박한다는 거였습니다. 때문에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었죠. 하지만 로즈는 이대로 가면 장기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겨울이 와 염하가 언다면 조선군이 쉽게 강화도로 증원될 수 있었고, 프랑스군은 보급을 걱정해야 됐죠. 조선 조정이 타협이라도 시도한다면 모를까, 대원군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예 고립을 걱정해야 했죠.
로즈는 철수를 결심합니다. 10일부터 병력과 물자, 온갖 노획물들을 배에 실었고, 분노 때문이었는지 조선군의 기습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강화부의 공공건물 및 주변의 민가를 무차별 방화합니다. 조선군이 올만한 남문 일대는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갔죠.
정족산성 전투는 프랑스군 병력의 일부에 피해를 준 것에 불과하고, 병인양요는 조선군이 절대적인 승전을 거둬서 이긴 전쟁은 아닙니다. 일단 프랑스군의 준비가 부족했고 투입한 병력 역시 너무 부족했으니까요. 피해 역시 조선측이 훨씬 컸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돌아간 건 조선의 승리이고 그걸 가능하게 한 건 바로 정족산성 전투 덕분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원래 계획대로 몇 개월이고 강화도에 틀어박혔다면 얼마나 더 큰 피해가 일어났을지 모르는 거니까요.
"이 갑작스러운 출발은 도주나 다름없었다. (중략) 우리의 갑작스러운 철수에 대하여 작약도에 잔류하고 있던 병력들은 크게 놀랐다. (중략) 우리는 모두 비통한 실망에 빠지게 되었으며, 제각기 원통한 심정을 거친 말로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 리델 신부
프랑스 함대는 11일 새벽에 강화도를 떠납니다. 이 때 강화도 남단에서 조선군이 기습하기도 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죠. 함대는 계속 남진해 작약도에 이르렀고, 12일 밤에 천주교 신자 6명에게 조선 내의 정황을 듣습니다. 그리고 곧 철수하죠. 이렇게 프랑스군은 아무런 성과 없이 떠납니다.
"로즈 제독은 자신의 지휘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보았을까? 그는 베이징의 문호를 개방시킬 때 프랑스측에서 입었던 손실과 최근의 조선 원정에서 자신이 겪은 손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본 후 그래도 청국 원정이 더 유리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 마르탱
병인양요 당시 마르탱은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관소속 의사였습니다. 그는 1883년에 이에 대한 글을 쓰며 병인양요를 혹평하죠. 외교부와 군부가 따로 놀았고, 다들 조선의 상황에 관심없이 툭 치면 문이 열릴 거라면서요. 외교관인 벨로네는 천주교 탄압의 주체도 몰라서 고종을 쫓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히면 될 거라 여겼고 (...) 로즈는 너무 준비없이 갔으며,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거였습니다.
가장 큰 건 역시 프랑스가 얻은 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는 이걸로 동아시아에서 프랑스의 위세가 추락했다고 평가했으며, 1870년의 톈진 교안 역시 이 후폭풍이라고 평가합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애들을 유괴 등 잔혹한 짓을 한다는 소문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서양인들이 많이 죽고 교회와 영사관이 불탄 사건이죠. 뭐 열강들은 그걸 핑계로 배상금을 요구하고 청을 압박했지만요.
오히려 프랑스가 원한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뭔가 미지근했던 공친왕은 확실히 조선 편을 들었고, 조선의 국법에 따라 선교사 처형은 정당하다고 결론이 났죠. 조선 내의 천주교 탄압은 더 심해졌구요. 애초에 원정을 요구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인들의 바람과도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요구가 더 큰 탄압을 낳았을 뿐이었죠. 조선은 더더욱 문을 닫아버렸구요. 그들이 얻은 건 조선과 중국의 미움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복수"를 꿈꾸는 이들이 없진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개입한 게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대외원정에 대한 여론이 더 식기도 했고, 갈수록 커가는 프러시아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보불전쟁이 1870년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입장이 어떻든, 네 뭐 열강이 문 열라 하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민간인에게도 피해를 주고 문화재를 약탈해 간 건 절대 좋게 볼 수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정말 대민피해를 최소화 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욕할 것을 당시 조선에게나 지금 우리에게나 소중한 것들을 털어서 갔는데 좋게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 이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도서들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협상을 시작, 지난 정권 때 돌려받습니다. 뭐 형식상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어쨌든 받긴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많이 양보했구요.
대원군은 이걸로 척화에 대한 정당성을 듬뿍 얻습니다. 여기에 피해를 입은 강화도민들을 위로하고 투입된 병력들을 격려하면서 많은 돈을 뿌리죠. 중국에게 이 전쟁에서 조선의 정당함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천주교 박해의 정당성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와 함께 강화도의 방어력도 높입니다. 진무사를 종2품에서 정 2품으로 승격시키고 강화 유수 및 삼도 수군 통어사의 직무를 겸임하게 해서 강화도의 군, 정 기능을 일원화 합니다. 적이 다시 강화도를 칠 경우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했죠. 참모의 경우에도 그 지역 출신자를 앉히게 했구요. 병력과 무기에 대해서도 많은 지원이 이루어집니다. 노획한 프랑스 총으로 면제배갑이라는 방탄복을 만들기도 했죠.
하지만 역시 문을 조금이라도, 최소한 국방 부분이라도 열려는 시도를 안 했다는 게 아쉽기는 하죠. 조선 내에서 아무리 방비를 해도 부족할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조선 내에서 강화를 해도 열강과 조선의 무력차이는 더 벌어질 뿐이었고, 천얼마 정도가 아니라 정말 대군이 왔다면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니면 일본처럼 바로바로 조선에 쳐들어올 수 있는 나라가 침략해 온다면 말이죠. 승리에 만족하고 이대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승리는 참 작은 승리였고, 대응하는 방법 역시 갈수록 커지는 외세에 저항하기엔 너무나도 약한 것이었습니다.
참 오래 걸렸네요. 병인양요 얘기는 여기서 맺겠습니다. 다음은 신미양요입니다.
... 좀 많이 실망하실 겁니다.
... 언제 쓸지는... 일단 조광조부터 쓰구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