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연의 반란이 끝난 239년 3월 손권은 사자 양도와 정주장군 손이를 파견해 요동을 공격합니다. 위장 장지와 고려를 격파하고 남녀를 포로로 잡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손권이 뒤통수를 친 공손연을 치려다가 너무 멀어 포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추측컨대 공손연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 사마의는 포로와 주민들의 목을 베 전승기념비를 만들었고, 이러한 사마의의 폭압통치를 피해 많은 요동주민들은 베트남의 보트피플처럼 탈출했고, 장지와 고려는 이들을 붙잡으러 간 위의 수군 장수인 듯 합니다.
겨울인 10월에는 장군으로 있던 장비라는 사람이 교주 지역의 이민족 반란을 진압하러 갑니다. 그런데 이 장비 아래의 도독 요식이라는 자가 임하태수로 있던 엄강을 비롯한 이 지역의 관리들을 죽이고 평남장군을 자칭하면서 동생인 요잠과 함께 형남의 영릉, 계양과 교주의 교지, 창오, 울림군을 공격하죠. 이 지역은 반오 성향이 다분했던 지역이어서 요식과 요잠의 반란군에 반오성향을 지녔던 이민족들과 주민들이 가세합니다. 이 반란군의 병력이 수만에 이르렀죠. 거기에 항구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해 자신이 죽인 임하태수 엄강대신 자파인사인 비양을 임하태수로 삼고 각 지역에 자신을 따르는 이들로 관리를 채웁니다. 오나라의 상황이 금방 진압할수 없었던 것이, 하필이면 형남의 오계만이 반란을 진압했던 반준이 죽는 바람에 반란을 진압할 장수마저 별로 없었습니다. 당시 육손과 여대는 무창에 있으면서 각지역을 안돈하고 있었는데 여대의 나이는 무려 80살이었죠.
교주 문제로 인해 후대인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에게까지 욕을 풍성하게 먹었던 여대는 80세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정력적이고 힘이 넘쳤다고 합니다. 장소의 아들인 분위장군 장승은 그를 추켜올리는 편지를 보내죠.
손권은 여대와 당자를 보내 이 반란을 진압하게 합니다. 하지만 반란군의 세력이 강해서 1년여간 진압작전을 통해 겨우겨우 진압했고, 요식과 요잠 뿐만 아니라 비양을 비롯한 반란군 아래서 관리를 했던 사람들까지 붙잡아 모두 죽입니다.
240년 손권은 한가지 조서를 내립니다.
손권 : 대체로 군주는 백성이 없으면 국가를 세울 수 없고, 백성은 곡식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 근래 이래로 백성들의 납세와 복역이 너무 많았고, 해마다 또 수재와 한재가 있어 한 해의 곡물 수확량이 감소하였는데, 관리들 가운데 어떤 자는 좋지 못하여 백성들의 농번기를 빼앗아 굶주림의 고통에 이르게 하고 있다. 지금 이후로 독군과 군수는 관리들의 법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를 삼가 살피고, 농사와 양잠을 해야 할 시기에 부역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는 적벌하여 보고하라
...........매번 전쟁하면 그냥 갖다 때려박는 주범이 저런 소리하는게 웃길 뿐이죠.
그리고 11월 오의 전 지역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서 관고를 열어 구휼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자연재해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발생하죠.
241년 봄 1월, 대폭설이 내려서 평지에 3척이나 되는 적설량을 보였고, 야생동물 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4월에 위장군 전종에게 회남 공격을 명령하고 위북장군 제갈각에게는 이를 뒤에서 지원하도록 합니다. 전종은 작피현을 공격해 점령하고 안성의 군량고를 불태운 뒤에 백성들을 붙잡아 오로 이주시킵니다. 제갈각은 후방인 육안현을 공격하죠. 하지만 만총의 뒤를 이어 정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로서 남동전선을 지키던 왕릉이 달려와 반격해 중랑장 진황을 비롯한 장수 10여명이 전사하고 전종은 박살이 나서 겨우겨우 퇴각합니다. 이동안 남군을 지키던 주연과 제갈근은 번성과 사중을 공격하지만 사마의가 달려와 주연과 제갈근을 격파하고 번성을 구원합니다. 그러던 와중 241년 5월 황태자 손등이 요절해버리죠.
그리고...........지옥문이 열리게 됩니다. Open the Hellgate.
뭐..손권 자체가 저거 자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