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스 연대기 Ⅳ : 제국의 역습
악마의 속삭임
박용욱Kingdom과 황제의 첫 만남은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조우한 것은 2001년, 황제의 로열로드가 완성된 바로 그 리그인 한빛소프트배 스타리그의 준결승이었습니다. 당시 임요환은 준결승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어마어마한 기세를 몰아 올라온 상태였습니다.
이 시절 박용욱은 한빛의, 김동수와 박정석을 배출한 바로 그 한빛의 프로토스였고, 그들이 보여주었던 불굴의 면모 또한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타리그 등장과 동시에 이미 악명과 위명을 떨치고 있었던 황제를 상대로 젊은 박용욱은 일말의 움츠러듦도 없이 당당하고 대담하게 맞섰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황제의 첫 패도를 어그러뜨리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적어도 박용욱은 전승 우승이라는 위업을 훼손시킬 1패를 황제에게 안기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임요환이 한빛소프트배에서 기록한 단 1패였으며, 스타리그 12년사 가운데 전승 우승에 가장 가까웠던 기회를 깨뜨린 1패였습니다.
하지만 이 한빛소프트배, ‘푸른 눈’ 기욤과의 3/4위전을 마지막으로 박용욱은 잠시 이 판을 떠날 것을 밝힙니다. 학업 때문이었지요. 박용욱은 우선 수능을 치룬 후에 다시 판으로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대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선택이, 프로게이머 박용욱의 선수 생활에 중대한 전환점이 됩니다.
학업 문제를 일단락하고 박용욱이 이 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결의했을 무렵, 불과 1, 2년 남짓한 시간 사이에 판의 세력 구도는 크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박용욱이 떠날 즈음 막 태동하고 있었던 황제의 시대가, 세 사람의 프로게이머에 의해 사실상 종결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첫번째는 이윤열이었습니다. 그는 임요환이 불러일으킨 게임의 패러다임을 다시 한 번 전환시킨 장본인이었고, 이제 당대를 자신의 시대로 만들어가는 중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한빛의 선배인 김동수. 지난 SKY 2001에서 그는 박용욱이 이뤄내지 못했던 승리를 만들어냈고, 첫 번째 가을의 전설을 이룩했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같은 한빛의 프로토스이자, 같은 부산 동향의 동료인 박정석이었습니다.
박용욱이 활약한 한빛소프트배, 박정석은 아직 스타리그에 발을 내딛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인 코카콜라배, 박정석은 16강을 뚫어냈고, 그 이듬해인 SKY 2002, 그는 황제의 전승 우승과 세 번째 우승을 동시에 저지하면서 ‘영웅’으로서 프로토스의 정점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프로토스의 필두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습니다.
박용욱이 한빛으로 돌아왔을 때 박정석의 존재감은 이미 너무나 커져있었습니다. 그는 김동수가 공언한 한빛의 정통 후계자였으며, 테란과 저그의 파상공세에서 꿋꿋이 홀로 종족을 지켜낸 프로토스의 긍지였습니다. 한때 마찬가지로 촉망받는 신진이었던 박용욱, 그 황제의 패악에 흠집을 냈었던 박용욱이지만 이미 박정석과 그 입지를 비교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악마는 박용욱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일격, 악몽과도 같이
사실 임요환과 박용욱은 기질적인 측면에서 꽤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불꽃같은 자존심을 가지고 있고, 지독하리만치 승리를 쫓는 집념의 소유자이지요. 그 중 전자, 그러니까 자존심이라는 측면에서 박용욱이 한빛을 떠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동양 오리온즈와 한빛 스타즈는 비교 대상이 못되었습니다. 한빛은 김동수와 박정석 – 물론 김동수는 이 무렵 이미 전력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따랐습니다만 - 두 프로토스를 제외하더라도 저그로는 박경락과 강도경이며, 테란으로는 변길섭과 나도현, 그 외 다수의 백업 멤버를 지닌 팀이었습니다. 임요환 – 홍진호 – 이윤열을 보유하고 있던 IS와 양대 명문으로 불리던 팀이었으며, 그보다 강한 조직력을 지니고 있었지요. 반면 동양 오리온즈는 IS가 공중분해된 이후 임요환과 주훈이 거의 급조하다시피 만든 팀이었습니다. 빈약한 선수층은 단지 하나의 위험 요소일 뿐, 그 외에도 불안정한 부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박용욱은 악마가 내민 손을 붙들었고, 한빛을 등지고 오리온에 합류했습니다. 프로토스 제일의 명문에서 영웅의 그림자로 남기보다, 미약한 신생 제국의 프로토스로 일단을 이끌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용욱의 선택은 최연성이라는 크랙의 등장과 맞물려 2003년부터 2004년에 걸친 제국의 대대적인 역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역습이 시작되자 과거 황제의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의 초석을 닦은 그 모든 것들이 잔혹한 보복에 휘말렸습니다.
첫 번째 제물은 바로 한빛이었습니다. 김동수와 박정석을 배출해낸 한빛, 두 번의 전설로서 황제를 몰락시킨 바로 그 한빛, IS의 해체 이후 판 최고의 명문으로 자리잡은 바로 그 한빛. 2003년 EVER CUP. 초대 프로리그에서 동양 오리온즈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당대 최고의 명문 한빛 스타즈를 결승에서 격침시켰습니다. 정면에서 짓눌러버리겠다는 태세로 준비하고 나온 한빛은 동양의 현란한 작전에 휘말려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잃었고, 이 패배 이후 급격한 몰락가도에 접어들었습니다.
수많은 선수들이, 특히 저 박용욱도 ‘이길 수 없다’는 절망을 토로한 상대였던 그 이윤열은 최연성이라는 뜬금없는 신예의 등장과 함께 지금껏 자신이 흩뿌린 절망을 되돌려 받았습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위압적인 장신, 그리고 거친 선의 외모를 지닌 이 시골 청년을 두고 임요환은 ‘세상을 놀라게 할 테란이 나타날 것이다’라며 폭풍을 예고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윤열은 언제나 자신의 장기였던 바로 그 물량으로 최연성에게 압도당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적으로서 두 명의 프로토스, 박정석과 강민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시대를 끝낸 이후 이미 오랜 시간 홀로 프로토스를 지켜온 박정석과, 새로운 바람을 몰고 종족의 도약을 위해 온 강민. 마침내 두 사람은 한 리그에 함께 발을 들였고, 프로토스에게 패권을 가져오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프로토스들의 시선이 그 두 사람의 행보에 집중되었을 때, 박용욱은 다만,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 리그에 발을 들였습니다.
때는 프로토스를 위한 계절, 세 번째 마법의 가을, 마이큐브배였습니다.
16강에서는 임요환의 기적적인 역전승이, 8강에서의 홍진호의 젠틀한 승부가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그 최고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단연 강민이었습니다. 이 리그, 맵 패러독스의 사용을 틈타 수많은 강자 프로토스들이 난립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강민은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이전의 그 어떤 프로토스보다도 화려한 손짓으로 전장을 지배했습니다. ‘세상은 몽상가가 바꾸는 것이다’, ‘꿈꾸는 자’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 때의 일이었지요.
그 중에서도 클라이막스는 4강, 저 박정석과 벌인 외나무 다리에서의 일전이었습니다. 이미 지난 회에 말씀드렸듯, 프로토스의 두 정점이 벌인 이 빅뱅은 다크아칸과 캐리어 등 하이테크 유닛들이 난립한 명승부 끝에 3:2 강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승자인 강민은 물론 패자인 박정석도 눈부신 싸움을 펼쳤고, 지금껏 프로토스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던 박정석을 넘어섰다는 상징성 덕분에 이미 대회 최고의 주목 대상이었던 강민은 이 결전으로 완전히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4강의 반대편에서도 성큼성큼 한 명의 프로토스가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박용욱. 그는 8강에서 치열한 재경기를 벌여 ‘마법의 가을’의 또 다른 주인인 황제로부터 결승의 자리를 양도받았고, 프로토스의 또 다른 계보인 임성춘의 적통으로서 서서히 그 이름을 떨치고 있던 전태규를 추락시켰습니다. 4강에서는 저그의 삼걸, 조진락의 일원인 박경락을 3:0으로 몰락시켰습니다. 그 결과 이미 박정석이라는 프로토스의 정점을 꺾어낸 강민은, 결승에서 또 다시 박용욱이라는 프로토스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스타리그 사상 최초의 플플전 결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이 결승에서 박용욱은 강민을 여지없이 완파했습니다. 이날 결승에서 박용욱이 보여준 프로토스는 강민의 것과도, 그렇다고 박정석의 것과도 닮지 않은, 차라리 그 마인드적인 측면에서는 임요환이나 최연성의 것과 닮은 그러한 프로토스였습니다. 초중후반 모든 타이밍에서 있어 어떻게든 크고 작은 이득을 긁어모아, 결코 그 이득을 다시 잃지 않고 철저하게 마무리했습니다.
냉혹. 실리. 집념. 일찍이 pain님은 박용욱의 그러한 성향들을 ‘이기기 위한 프로토스’라고 정의 내리신 바 있습니다. ‘악마의 프로브’라 불린 그 잔혹한 견제, 동 수 유닛 싸움에서는 패배하는 법이 없다는 극한의 백병전, 그리고 유려한 운영까지. 세심함과 집요함을 앞세운 박용욱의 프로토스는 극한의 완성도를 내보이면서 강민의 ‘꿈’을 산산이 깨뜨렸습니다. 결국 마이큐브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강민이었으나, 우승은 박용욱의 몫이 되었습니다. 결승 후 시상 소감에서도 강민은 못내 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제국을 선택한 프로토스 박용욱은 그렇게, 마치 기습처럼 프로토스의 핵심부로 진입했습니다.
위대한 삼각
그러나 강민이란 게이머의 그릇은 그와 같은 한 번의 실패로 방향을 잃을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음 시즌인 NHN 한게임배, 강민은 2시즌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베히모스’ 전태규를 완파하고 마침내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스타리그 12년사, 김동수부터 허영무에 이르는 그 모든 프로토스를 통틀어 오직 강민만이 가지고 있는 기록, ‘프로토스의 양대리그 우승’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후 프로토스는 박정석, 강민, 그리고 박용욱이라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테란과 저그들에게 맞서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이 이른바 3대 프로토스, 프로토스 역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삼각 연계를 이룬 멤버들입니다.
12년사를 되돌아보면, 프로토스의 역사 속에도 여러 팀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되기로는 김동수 – 임성춘 – 송병석의 구 3대 프로토스일 것이고, 또 So1을 찬란하게 수놓은 오영종 – 박지호 – 송병구의 신 3대 프로토스가 있을 것이며, 역대 최강의 파괴력을 보여주었던 투톱 ‘택뱅’과, 대 프로토스 패권의 시대를 이룩한 ‘6룡’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들 중 그 어떤 그룹도 위대한 삼각, 3대 프로토스와 같은 연계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박정석과 강민. 김동수의 두 후계자. 한 사람은 김동수가 공언한 ‘적통’으로서 과거 러셔(Rusher)로서의 그 성향과 프로토스의 혼으로서 그 포지션을 이어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황제를 몰락시킨 수라도인 그 전략가적 기질과 새로운 바람을 몰고 전황을 타개할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강민은 박정석과 전혀 다른 논법을 가진 게이머였고, 그랬기에 고단했던 박정석의 숨을 돌릴 활로를 뚫어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조악하게나마 요약해보자면 박정석에게 있어 전투는 승부를 시작하는 지점이지만, 강민에게 있어 전투는 승부를 마무리하는 지점입니다. 즉, 설계의 시작으로서의 전투와 설계의 마무리로서의 전투의 차이입니다. 박정석의 자질은 전투의 재능에 있습니다. 하지만 강민의 자질은 판 전체의 변화를 관측해내는 드넓은 시야에 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전투의 용볍을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강민이라는 프로토스의 출현은 박정석의 방식, 곧 전투로부터 시작되는 변수에만 집중하고 있던 저그와 테란의 뒤통수에 통렬한 일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이들이 황망히 뒤로 물러나 넓은 전장을 바라보려 하면, 이번에는 박정석이 예의 그 저돌적인 전투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저 단 하나가 새로이 발견된 것에 지나지 않지 않느냐,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발견은 설령 단 하나일지라도, 마치 수학에 있어 0의 발견과도 같은, 그런 하나의 발견이었습니다.
강민과 박용욱. 마이큐브의 결승에서, 스프리스의 준결승에서, 프로리그 그랜드 파이널의 마지막 게임에서, 번번이 몽상가에게 악몽을 안겨준 만남. 이 둘은 마이큐브에서의 첫 만남부터가 지독한 악연이었습니다만, 상호 보완이라는 측면에서는 3대 프로토스 안에서도 이 둘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없을 것이고, 프로토스 진영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것도 이 둘의 관계일 것입니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큰 줄기들을 보는 것이 강민이라면, 작은 것까지 세심하게 하나하나 짚어 내가며 완성도를 추구하는 것이 박용욱입니다. 강민의 주특기인 번뜩이는 발상은, 박용욱의 손 안에서 차곡차곡 논리성을 획득하며 완성된 모양새를 갖추게 되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가면 이들의 자질과 프로토스라는 종족 내에서 수행한 역할을 이와 같이 단순하게 정리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박용욱 역시 강민 정도는 아닐지라도 나름의 전략적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 프로토스였으며, 후일 수비형 프로토스의 일례에서도 알 수 있듯 강민도 하나의 전략을 완성시키기 위한 집념을 가지고 있는 프로토스입니다. 다만 큰 차원에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는 이야기이지요.
박용욱과 박정석. 박용욱이 보기에, 아마 박정석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게이머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정석은 김동수가 극찬한 전투와 매크로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면승부라면 그 어떤 적을 상대로도 절정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게이머였으며, 그를 바탕으로 한빛과 프로토스의 간판을 꿰찬 게이머였습니다. 박용욱 또한 재능이 없는 게이머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나 박정석의 신들린 듯한 그것에는 미치지 못함이 있었지요. 비록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천재와 수재의 차이, 기적을 일으키는 전투와 계산을 수행하는 전투의 차이, 영웅의 전투와 군인의 전투가 갖는 차이라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석은 박용욱에게 거대한 벽이었고, 박용욱은 그를 바라보며 키운 집념을 가지고 완성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자신의 플레이를 만들어냈습니다. 박정석의 미학이 천혜의 아름다움이라면, 박용욱의 미학은 그에 비견될만한 극한의 인공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은 박정석에게도 새로운 방식의 전쟁을 요구했으며, 강민이 고안하고 박용욱이 완성한 수많은 결과물들은 그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두 사람은 서로를 완성시켰다 할 수 있겠지요.
상대 전적으로는 박정석 – 박용욱 – 강민 – 박정석으로 물고 물리며, 판이한 스타일과 포지션으로 서로를 보완하는 프로토스의 세 필두. 그들은 처해있는 상황도 거기서 내린 선택도 그리고 그 끝에 추구하는 바도 모두 달랐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프로토스에게는 행운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너지를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이들의 지휘 하에 프로토스 진영은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급속의 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임요환 – 이윤열이라는 두 테란 군주와 홍진호 – 조용호 – 박경락의 조진락 저그 트로이카를 상대로 프로토스는 고전을 면치 못했겠지요. 비록 세 사람은 각기 한빛, Greatest one, 제국의 일원으로서 서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종족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제 프로토스는 적어도 다른 적들과 대등하게 맞설 전력을 얻은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정한 시대는 프로토스에게 찰나의 영광과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허락했을지언정 패권은 허락지 않았습니다. 한 명의 테란과, 한 명의 저그. 마이큐브의 영광이 이루어진 2003년은 빠르게 저물어갔고, 이제 2004년과 함께 두 개의 재앙이 동시에 프로토스를 옥죄기 위하여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두 재앙
2003년 말의 TG 삼보배. 2004년 초의 센게임배. 연속된 두 시즌의 MSL에서, 한 명의 신진에게 당대 각 종족의 정점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의 게이머가 연달아 무너집니다. 저그의 홍진호, 그리고 테란의 이윤열. 일컫기를 ‘네 개의 하늘’, 종족과 팬덤 양쪽에서 정점에 머물렀던 집단인 4대 천왕(天王)의 두 사람이 나란히 패퇴한 것입니다. 물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최연성의 소행이었습니다.
황제가 예고했던 그대로 최연성은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뿐만 아니라 판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고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자연히 이미 시대의 중심이었던 이윤열과의 대결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두 번의 MSL을 우승하는 과정에서 최연성은 이윤열과 총 세 번 만났습니다. TG 삼보배의 16강, TG 삼보배의 패자조 결승, 센게임배의 결승. 그리고 이 중 단판제였던 TG 삼보배 16강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의 상위리그 다판제에서 최연성은 이윤열을 각각 3:1, 3:2로 무너뜨렸습니다.
최연성이 데뷔하고 나서 처음으로 MSL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9개월입니다. 거기에 센게임배 우승까지 치면 약 14개월. 겨우 14개월 만에 최연성은 전대의 최강자인 이윤열과 두 번이나 다판제를 치렀고, 완승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2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이론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쾌진격으로 최연성은 이윤열의 시대를 끝맺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또 하나의 걸물을 내어 최연성의 쾌진격을 잠시 늦추었으니, 그는 곧 ‘투신(鬪神)’ 박성준이었습니다. 이 악귀 같은 저그의 신성은 2004년 질레트배 스타리그에서 전대미문의 테란 사냥을 시작하는데 듀얼 토너먼트에서는 황제 임요환을, 16강에서는 후일 ‘아티스트’라는 별명을 갖게 되는 바이오닉의 대가 한동욱을, 8강에서는 테란의 일급 제후였던 서지훈을 차례로 연파하는 놀랄만한 행보를 보여줍니다.
다만 마침내 그 행보가 4강에 이르자 사람들은 박성준의 파란도 여기까지일 것이라 단정지었는데, 그 이유는 MSL을 연패하고 이제 온게임넷에서 로열로드에 도전하는 최연성이 그 상대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그의 정점인 홍진호를 압도한 최연성, 이제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될 것이라 모두가 의심치 않던 최연성. 이러한 예측은 프로토스 진영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프로토스는 오직 최연성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4강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던 게 프로토스의 영원한 ‘영웅’, 박정석이었기에, 이미 홍진호와 이윤열을 연파한 최연성에게 자신들의 천왕마저 무너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파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타크래프트 12년사 가운데 세 번의 가공할만한 충격이 있다 합니다. 하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삼연벙이고, 다른 하나는 물론 3.3이며,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이 질레트의 4강입니다. ‘저그는 나의 라이벌이 될 수 없다’며 자신만만했던 최연성을 상대로, 박성준은 시종일관 공격의 고삐를 놓지 않고 몰아치고 또 몰아칩니다. 최종 경기 스코어는 3:2 박성준 승리. 하지만 그 두 번의 패배조차도, 박성준이 홀로 공격을 몰아치다가 그만 두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5:0이나 다름없는 경기 내용이었습니다.
위대한 박정석은 극심한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흑마술사’ 나도현에게 마인 역대박을 안기며 결승에 진출했지만, 그 결승에서 박성준에게 여지없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프로토스는 좀 더 박성준에게 신경을 썼어야 했습니다. 당시 프저전 승률이 70%에 육박하며, ‘저그들을 질레트 면도기로 싹 밀어버리겠다’며 호언했던 그 ‘베히모스’ 전태규가 참패했을 때부터 박성준을 좀 더 주목했어야 했지요. 저 황제의 시대부터 파란의 주인공은 언제나 프로토스였습니다. 이제 등장한 파란의 저그에게, 프로토스는 테란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빼앗겼지요. 더욱 무거운 소식은 박성준이라는 프로토스 대 재앙의 행보는 이제 막 시작이었을 뿐이라는 점이었고요.
아무튼 그렇게 로열로드를 빼앗긴 최연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세가 바뀌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최연성은, 그리고 최연성을 앞세운 제국은 더욱 광포하게 미쳐 날뛰며 판을 장악해나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임요환. 최연성. 박용욱, 동양 오리온즈부터 4Union을 거쳐 이 무렵 SK Telecom T1이라는 대 제국을 완성시킨 이들 트로이카, 삼기사의 기세는 질레트배 이후를 기점으로 하여 그야말로 정점에 달했습니다. 무려 양대리그 결승 네 자리를 한 팀이 전부 점령해버리는 사태가 발발하고야 만 것입니다.
3대 프로토스의 일원이지만, 또한 동시에 제국 삼기사의 일원으로서, 박용욱은 다시 한 번 강민을 무너뜨리고 스프리스배 MSL 결승의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제국의 주인이자 삼기사의 일원이며, 또한 전설의 대적자로서, 임요환은 친우 홍진호를 무참하게 베어버리고 EVER 2004의 결승 한 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최연성은 두 리그의 결승 모두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했습니다.
찢겨나간 하늘, 무너진 전설
결과적으로 말해, 이 두 리그는 모두 최연성의 우승으로 끝맺었습니다. 최연성은 MSL에서 세 번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마침내 온게임넷의 우승까지 거머쥐며 총 4회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바야흐로 이윤열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고 최연성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할 만한, 그런 성과였습니다. 이 가운데 프로토스는 좌절과 참패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EVER 2004의 충격이 컸습니다. 물론 스프리스의 결승에서도 3대의 박용욱이 무너졌지요. 하지만 EVER 2004를 최연성에게 빼앗긴 것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EVER 2004는, 2004년의 ‘가을’에 치러진 리그였기 때문입니다.
2001년, 김동수가 황제의 패도를 무너뜨렸습니다. 2002년, 박정석이 황제의 꿈을 불살랐습니다. 2003년, 3대 프로토스가 4강에 집결한 끝에 박용욱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마법의 가을, 가을의 전설은 이미 프로토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약속처럼 되돌아오는 그들의 의례였습니다.
그것을 두 명의 테란, 그것도 전설의 대적자인 임요환과, 그의 제자인 최연성, 제국의 테란들에게 유린당하고 만 것입니다. 더군다나 최연성이 4강에서 무너뜨린 것은 박정석이었습니다. 이 전설적인 테플전 5전제에서 박정석은 마지막 전설의 수호자다운 분투를 펼쳤지만 결국 3:2의 치열한 승부 끝에 최연성에게 패배했습니다. 언제나 프로토스의 혼, 그들의 마지막 방벽이었던 박정석을 짓밟고 제국의 테란들이 전설의 무대를 빼앗았다는 것은 단순한 패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TG 삼보배의 셧아웃과, 에버 2004의 3연속 벙커링은 확고부동한 저그의 ‘하늘’이었던 홍진호를 훼손시켰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 있던 또 다른 ‘하늘’, 이윤열은 최연성에게 수 차례에 걸쳐 완파 당했습니다. 프로토스의 ‘하늘’, 박정석은 질레트와 에버2004에 걸쳐 박성준과 최연성에게 패배했습니다. 가을의 전설은 무너졌고, SK Telecom이라는 후원자를 얻은 제국은 전방위적인 대공세를 시작했으며, 박성준과 최연성은 이미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제 네 사람의 하늘, 4대 천왕의 시대는 가파르게 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3대 프로토스가 이끌던 영광의 시대에도 황혼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최연성. 박성준. 그리고 제국. 그것이 새 시대의 질서로서, 판의 구도를 예편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하늘이 찢겨나가고, 전설은 무너졌을 때.
하지만 그 때 문득, 멀리서 온 새로운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음을, 아직은 분명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 5편에서 계속
다음 글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Pain님의 「박정석, 강민, 박용욱에 관한 단상」 (
http://judaspain.tistory.com/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