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2/11/11 04:55:52 |
Name |
쭈 |
Subject |
진열장에 놓인 베틀체스트 씨디를 보며 |
올해 가을부터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가게가 없기 때문에
장을 보려면 일주일에 한번씩 날을 잡아서
이웃에 사는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대형 할인점으로 갑니다.
살 것도 없으면서 가면 으례 들르게 되는 코너가 하나 있습니다.
새로 나온 게임들이 산더미 같이 진열되어 있는 게임소프트웨어 코너.
오늘도 물끄러미 쳐다 봅니다...
새로 나온 인기 게임들은 50불 가까이 하는데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여기 스타 베틀체스트는 박스로 조그맣게 만들어져서 지금도 팔리고 있습니다.
19.99불 (오리지날이랑, 브루드워까지 합해서 이 가격이면 굉장히 싼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값이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살것도 아니면서 괜히 만져보고 뒤집어 보고 한참을 보다 보면...
그 친구가 와서 잡아 끕니다.
"여기서 모해요? 한참 기둘렸잖아요. 가요. 가... 저런거 보면 공부 망친다니깐..."
집에 있을 때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랑 똑같은 이야기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날.
전 내 방에서 브루드워 씨디를 뽀겠습니다.
(혹시나... 앞으로 씨디 뽀게고 싶으신 분들 행여나 그냥 버렸으면 버렸지
뽀게서 버리진 마세요... 아주 끔찍합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니던 2년은
연구실의 버거운 생활 못지 않게 스타크래프트로 상처 받고 얼룩진 시간들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앞뒤 안가리고 거기에 맘껏 빠져들 수 있는 사람들이
난 참 부럽습니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게임을 하고 있노라면
"내가 미쳤지 지금, 내일까지 해가야 되는게 얼마나 남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교수님한테 야단 맞고 돌아와서 다시 맘 잡고 일하기 시작하면
지나간 시합의 아쉬운 장면들이 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곤 했습니다.
몇번을 내 컴퓨터에서 깔았다가 지웠다가 했는지 모릅니다.
제 성격에 맞지 않는 게임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하길...
그냥 게임인 걸 가지고, 한번 지고 나면 애가 너무 상처를 받는다나요...
우유부단해가지고,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도 공격타이밍을 놓치기 일쑤고
겁이 많아 가지고, 드랍이 한번 들어오면 침착하게 막아내면 되는 건데도
놀래서 우왕좌왕하다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망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지고 나면 망연자실해 가지고
그날 하루 아무것도 못하고 보내버리기가 또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대신에 친구들이랑 팀플을 하면
같은 편으로 곧잘 환영을 받곤 했습니다.
친구들이 시키는 대로만 따라 하면
적어도 한사람 역할은 충분히 해내곤 했으니까요...
컴퓨터랑 밖에 안하던 시절에...
자꾸 꽁수로 이겨 놓고 약을 올리던 친구가 미워서
이겨 보려고, 베틀넷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한테 난생 처음 보는 캐논 러쉬를 당했던 날엔...
컴퓨터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지워버리고
한달동안 게임을 안하고 지냈던 적도 있었지요...)
1승을 거두기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그러다가...
게임을 하다 보면서 느껴 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 오락에 빠졌구나...
으례... "빠졌다"라고 하면 나쁘게 해석하기 마련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때 일본 애니에 심취했던 이후로
무언가에 빠져 보는 것이 처음이라
더 이상 무언가에 빠져볼 일이 없을것이라 생각했던 저에게
그런 제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베틀넷에서 익명의 게이머들과 시합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연구실에서 친구와 게임을 벌일때와는 달리
감정이 상할 일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이기고 나서도 약올리지 않았으니까...)
매너 없는 게이머들도 많이 보아 왔지만
적어도 로템 1:1 방제를 보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매너도 깨끗하고 실력도 (제 수준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승률은 여전히 30% 이하를 맴돌았지만
이따금씩 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두고 나서 느낄 수 있었던 그 환희
절대로 잊을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멋진 전략을 고안해서 이기고 나면
상대방이 칭찬도 해 주고 그랬습니다.
이긴 경기를 저장해 놨다가 리플레이로 보고 또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게임은 재미 있으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스타 크래프트의 재미는 그냥 재미 이상의 재미인 것이...
힘든 고비를 수 없이 넘겨 가면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 가면서
그러한 고통을 다 감내한 다음에야 주어지는 것이
승리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정일훈 님의 추천게시판 글을 보면...
인용글이하나 나오죠... "내 인생에 GG를 치고 싶을때."
이렇듯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제가 게임 바깥에서 살아가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 거 같습니다.
전 요즘 딴 생각이 들 때면 학교로 뛰어가
운동장을 돌기 시작합니다...
숨이 턱에 차 닿을 때까지 뛰다가 여기서 그만 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면
아슬아슬한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GG를 치고 말았던
수많은 지난 경기의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리곤 또 몇바퀴를 더 돌고...
하지만,
이젠 정말로 당분간(?) 이 게임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끔가다 장에 가서 진열된 게임을 한번씩 구경하는 것으로
그리고, 여기와서 저와 같이 이 게임에 미쳐있는 다른 분들의 재미난 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당분간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또 모르죠... 그렇게 계속 구경만 하다가 어느날 덜컥 사서 오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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