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19세기 일본의 조선침투는 "정한론"을 시발점으로 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정한론은 역사가 깊습니다.
사토 노부히로에서부터 요시다 쇼인까지 계승되는 사상적 계보로 이어지는데 요지는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도 반드시 동아시아 (조선, 만주, 중국) 에 침투하여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도막부 말기의 사상가들은 일본이 진정 "신국"이라고 믿었고,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국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약한 고리는 조선이었죠.
그런 사상적 전통과 맞물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에 "정변의 사실"을 통보하였는데, 조선이 일본의 국서를 거부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문서에 "황"이나 "칙", 다시 말해 황제국가가 제후국에 보내는 형식의 문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것을 핑계로 조선을 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게 됩니다.
한편 일본의 취약성 및 서양열강의 부강함을 알고 있던 지도층 중에서는 정한론을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대신 3가지 대안을 제출했습니다
(1) 국력이 충실해질 때까지 조선과의 교류를 중단
(2) 천황의 사신(기도 다카요시)을 파견하여 국서를 교환
(3)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와 대등한 조약을 맺어 이를 근거로 조선과 교섭
게다가 현실적으로 당시 일본이 조선에 대해 강경하게 나갈 수 없는 객관적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사할린 제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고, 또 대만에서 류큐인들이 살해당해 이에 대해 대응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일영국공사 해리 파크스는 사할린은 포기하고 홋카이도 경영에 매진하라고 권고하였고, 당시 홋카이도 개척장관이었던 구로다 기요다카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에 교섭하러 온 것도 이자입니다) 또한 이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대만문제 관련, 1874년 일본 정부는 일본인(류큐인) 살해를 이유로 대만인을 정벌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출병을 각의하였고,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청나라는 이에 대해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으며 일본은 따라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 관련 소요사태를 일으켜도 청나라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일본은 조선이나 대만 심지어 류큐 관련 행보를 결정할 때 줄곧 중국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계속 의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75년에는 상크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러시아와 국경문제를 일단락지었습니다.
아무튼 일본이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만출병 관련 중국의 무능한 대처, 그리고 러시아와의 국경갈등 종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당시 주일미국공사 존 빙햄은 일본에 이십 몇년 전 페리함대가 일본에 왔을 당시 페리가 직접 기록한 교섭내용인 "일본원정기"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페리의 교섭노하우를 아주 잘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고 얼마 안가 류큐마저 완전히 합병되자 청나라는 그제서야 뒤늦게 반응합니다. 류큐합병, 그리고 조선개국까지. 조공질서가 눈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하자, 리홍장은 1879년 조선에 다음과 같은 권유를 합니다.
"첫째. 조선의 군비를 강화할 것. 둘째. 구미(유럽)와도 개국조약을 체결할 것"
당시 조선은 첫째 권고에는 원론적으로 동의하였으나, 둘째 권고는 거부하였습니다. 아직 민중의 반서양감정이 강했고, 또 현실적으로 조약을 체결해서 교역할 수 있는 제도나 상품이 부족했던 것도 있으며, 류큐멸망을 예로 들며 구미제국이 류큐의 독립을 위해 힘써준 바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이 자력갱생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고, 결국 1880년 김홍집을 단장으로 하여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김홍집은 그곳에서 주일청국공사 황준셴을 만나 조언을 구했고 리홍장의 명을 받들던 황준셴은 "조선책략"이라는 문서를 건내줍니다. 그 문서의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다시 말해 중국과 동맹하고, 일본과 연대하며 미국과 친해져라라는 내용인데, 당시 중국 입장에서 가장 큰 위협은 러시아였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항하는 동맹블록'에 참여하라는 권유였습니다. 그리고 서양열강 중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과는 꼭 친해지라는 권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접근한 일은 1880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로버트 슈펠트 해군제독은 나가사키에 내항하여 조선과 국교수립을 위해 일본의 중개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고, 슈펠트는 다시 부산의 일본영사관에도 요청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리홍장은 본인이 직접 나서 조선과 미국 간 조약을 체결시키기 위해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슈펠트를 톈진으로 초청하여 회담을 합니다. 결론은 조선-미국과의 국교수립이었는데, 리홍장은 조선은 청나라의 부속국이라는 문구를 삽입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고 미국 측이 이를 계속 거절하여 회담은 결렬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약의 제1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3국이 체약국의 한쪽을 억압할 때 체약국의 다른 쪽은 사태를 통지받고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주선을 행한다"
이 조항은 조선이 멸망하는 그날까지도 조선인들에게 헛된 희망과 바람을 넣는 비극적 조항이 됩니다.
(1904년 대한제국의 각료 이용익은 영국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조항을 근거로 대한제국은은 안전하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882년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태가 발생합니다.
"임오군란"
조일수교 이후 조선의 쌀과 대두 금 등이 일본으로 유출되었고, 특히 수출의 8할을 차지한 쌀 가격이 2~3배 폭등하자 조선 민중의 생활이 매우 궁핍해졌습니다. 게다가 모든 자원이 신식군대에 우선적으로 배급되었기에 다수를 점하고 있던 구식군대는 1년 이상 봉급미를 받지 못했고, 가까스로 받게 된 봉급미에는 모래가 섞여있었습니다. 이것이 트리거가 되어 구식군대가 신식군대를 습격하는 사건을 발생했고, 이들은 대원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악의 근원에는 일본이 있다는 생각 하에 일본공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들을 죽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보복을 하기 위해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중국 또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행보가 더욱 빨랐고 규모도 더 커서 사태는 신속히 종결되었으며, 반란 주모자들을 처형되고 대원군은 체포되어 중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중국의 영향력은 크게 강화되었으며, 일부 청국군은 아예 조선에 주둔하여 조선을 감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주둔 청국군은 철수하여 본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의 배경에는 청불전쟁이 있었습니다. 청불전쟁을 계기로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 달리 일본은 지원군을 보내오지 않았으며, 중국은 예상보다 신속하게 전투병을 파병하여 개화파 정권을 전복시켰습니다. 하지만 중국도 일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양국은 톈진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소요사태 발생 시 양국은 서로에게 통보하고 출병한다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류큐에서의 실패 또는 베트남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조선에 대해 전례없는 수준의 강압적 감독을 실시합니다. 위안스카이가 감국대신으로 파견되어 조선의 정사 하나하나에 간섭하였고, 조선이 외국에 보내는 사절단에도 관여했습니다. 심지어 워싱턴에 파견되었던 조선사절단은 주미청국공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비밀리에 접촉하였고 밀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선과 러시아의 접촉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영국은 선제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하였고, 한편 한러밀약설이 돌자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시키려고 했습니다. 다만 리홍장은 고종폐위에 반대하였고, 고종은 가까스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강압, 서구열강의 침투, 일본의 압력 등,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더해져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정부는 스스로 동학을 진압할 수 없었고, 이에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도 출병하게 되는데, 일본은 처음부터 이를 계기로 중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일본의 우위를 확고히 점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일본이 서구열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수용할 수 없는 안을 계속 제시하면서 일부러 중국을 자극하였고, 한편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의중을 살폈고, 이들의 중립을 보장받기 위해 계속 전보를 보내고 협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측과 달리 일본은 전쟁에서 완벽히 승리하였고, 중국의 천하관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자만했습니다.
조선인을 학살하거나 조선의 왕비를 살해하는 등, 그리고 중국에서의 학살 등.
과연 서구가 모두 눈감아주리라 생각했던걸까요?
게다가 중국에 요동반도 할양 등 지나친 요구를 늘어놓게 되면서 러시아/독일/프랑스가 합심하여 일본에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라 알려진 열강들의 개입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서구열강 3국을 상대로 전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중국이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한편 조선으로서는 러시아 주도의 압력으로 일본이 주춤하는 것을 보자,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은밀히 접근하게 되는데....
이후의 일은 다시 또 정리해서 공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