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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1 17:14
갑신정변으로 변한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삼일천하라 뭐 변하고 자시고 할게 없었죠. 있었다 해도 그 후에 체결된 한성조약이랑 텐진조약 정도? 이걸로 변화라 하긴 어렵죠.
19/10/21 13:36
준비기간의 차이, 그 이전의 철학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에도시대부터 나가사키의 부분적인 개항으로 난학을 통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일본의 이이토코토리(좋은것을 취한다)에 부합합니다. 메이지유신과 갑신정변의 목적은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위에 말씀하신 부분들 다 맞는 말씀인데 그 바탕에는 그 변화를 견뎌낼 수 있는 역량이 있었냐고 봐야 할것 같습니다. 단순히 조선이 쇄국으로 스스로를 봉쇄해버린 것이 발전을 위해서 어리석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지나오면서 철저히 사상만으로 국민을 통치했던 왕조들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주입한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제 아무리 현명한 군주라도 선택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저는 메이지 유신을 가능케 했던 것은 조슈, 사쓰마 번의 정치적 결단도 영향이 있지만 그전에, 에도막부에서 이룬 경제적, 군사적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19/10/21 14:47
음.. 솔직히 갑신정변은 치기어린 젊은이들의 무모한 자살행위 아니었나 싶습니다. 20대 중반 청년 수십명이랑 일본 군사 200명 남짓으로 수백만에서 수천만이 사는 나라를 뒤집겠다구요? 무모해도 너무 무모했다고 봅니다.
19/10/21 15:00
솔직히 저게 정변으로 이어질 정도로 시스템이 허약했던 조선이 문제죠. 정상적인 국가였으면 깡패 몇명의 소요로 끝날 일 수준이라.
하기사 계유정난때도 저랬죠. 불과 불한당 수십명의 거사에 나라가 뒤집히고...
19/10/21 16:34
군사력은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을때 육성했던 군대(민씨쪽에서 지휘권은 빼앗아갔지만 장교들이 충의계에 가입하고있었죠) 500명 정도와 윤웅렬이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때 양성했던 군대 500명 정도(키워서 갑신정변 직전에 중앙군으로 편입)도 있었습니다. 국편위 자료에서는 일본육군학교에 파견했다가 귀국한 사관생도 14명과 충의계소속 43명까지 합쳐 1050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19/10/21 16:40
메이지 유신도 기적이었다 종종 말하곤 합니다만 그 기적도 디딜 땅이 있을 때 일어나는 법이죠. 성경에 오병이어의 기적이란 것도 다섯 병의 포도주랑 두 마리물고기가 있기는 한거잖아요. 기적도 뭔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저도 아우렐리우스 님처럼 내적문제가 더 컸다고 봅니다. 갑신정변이 혹 성공했다 할지라도 과연 그 개혁의 향후 흐름이 현대의 우리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고 봐요.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가 꼭 돈이 없어서, 외부조건이 나빠서 실패한 것이 아니듯이요. 한국 교육이 너무 "우리는 자체적으로 근대화할 잠재력이 있었지만 외부의 간섭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일본 때문에"라는 시각에 목을 매는 까닭에 이런 인식이 너무 강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외부적 요인이야 있었지만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일방적으로 문물과 정보만 제공받으면서 이권은 지키는, 그런 근대화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러일전쟁까지의 조선은 비교적 이권을 잘 지켜낸 나라라 생각합니다. 허나 그 나라(대한제국)가 추구하는 바가 대한민국 사람들이 보기에 옳은 근대화의 과정이었느냐. 그건 아니겠지요. + 해국도지의 내용이 번역되어 국내 출판된 것이 있나요? 해국도지의 영향력에 대해 말만 들었지 막상 내용이 어떤지는 잘 못봤네요.
19/10/21 17:11
뭐니뭐니해도 그냥 일본이 통수친게 제일 크죠.
도와준다고 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입 싹 닫았죠. 일본을 믿었던게 제일 큰 패배요인이라 생각합니다.
19/10/21 17:24
솔직히 그건 통수 맞은게 바보죠... 원래 서로 돕겠다 어쩌겠다 해도 불리하면 손절하는게 세상 이치죠. 이 세상 어디에도 뭐 얻는거 없이 끝까지 가는 동맹 같은건 없으니까요... 애초에 스스로가 왠만큼 힘을 가지지 못하면서 타국이나 타인에게 의지해서 난을 정변을 일으킨 것 자체가... 답이 없었죠...
19/10/21 20:56
일본을 믿은게 문제가 아니라 같은 편들조차 확실하게 포섭을 못한것부터 문제입니다.
애초에 일본군은 인계철선같은 존재고 주력은 함경남도 군대인데 온건개화파들까지 주살할 계획을 세우니 함경남도 군대가 가담을 못하게 되고, 그렇게되니 실전경험 전무한 사관생도 백여명과 일본군 150명 갖고 거사를 하자는거니 독박을 쓰는 셈인데 그걸 누가하겠습니까. 그리고 끼긴 꼈어요. 나중에 입을 닦았을 뿐. 엄밀히 따지면 그런 조건을 다 달성했어도 결국은 실패했을 운동이긴 합니다. 일본이 문제라면 애초에 일본을 낀 개화운동을 구 지식층과 민중들 그 어느 쪽도 지지를 안했을거라는게 크죠. 민중의 지지는 커녕 고종이 가만 놔둬도(?) 일가들이 민중에 의해 끔살당할 정도였으니까요.
19/10/22 13:32
의견에 동의합니다만, 그런데 물론 이 일이 복합적인 결과지만 저는 그 중에 제일 큰 것이 일본이 갑신정변 전에 개혁자금으로 차관 빌려준다고 했다가 통수친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차관만 약속대로 제대로 빌려줬어도 갑신정변은 안일어날 수도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19/10/22 14:41
사실 그부분도 일본이 통수친게 아니라 김옥균이 조선 정부를 대표할만큼의 신임을 얻지 못한거에 가깝죠... 애초에 우리쪽 수구파가 일본공사관에 위임장 위조됫다는 식으로 흘린거라...
19/10/22 14:55
그렇죠. 뭐 너무 상황이 복잡해서 전부 맞는 의견이라 문제점을 다 집기도 어렵네요. 그 때는 진짜 상황이 개판이라 너무 복잡했어요. 국내적으로도 그렇고 국외적으로도 그렇구요. 그냥 전체적으로, 소수의 생각이 짧았던 어디선가 뭔가 듣긴 들어서 바꾸기는 바꾸고 싶은데 행동하기에는 무모한 행동을 직접 행했던 사건으로 요약하면 될까요?
19/10/22 15:00
그렇지 않을까요... 바꾸고는 싶은데 하려는 방식도 손을 잡는 방법도 본인들의 세력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인 무모한 행동이었으니... 사실 당장 보면 어찌됫건 아에 개혁을 하지말자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무리하게 일을 일으킨거니까요... 어디서 본 비판에선 개혁 자체보다 본인들 입지때문에 일으킨거다 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름 납득이 되는 이야기더라고요... 솔직히 갑신정변은 주동자와 같이 하겠다고 손잡은 쪽 세력 구성을 봐도 그렇고 한쪽에 엎혀가는 수준이면 제대로된 꼴을 못보는건 필연이죠... 역사 보면 저런식으로 누구에게 의존해서 뭔가 하려고 하면 좋은 꼴 본 적이 없죠... 뭐랄까 일본 전국시대의 무로마치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요...
19/10/21 18:58
민영익 같이 같은 편에 속했던 사람도 설득 못했는데
그들이 시도하는 개혁이 성공하는게 웃긴 것이죠. 일본 믿고 차관도입 시도하다 실패하고 정치적 입지가 밀리자 준비 없이 정변을 일으켰다가 정답이라 봅니다. 그들이 정변과정에서 죽인 인물 상당수가 온건적이긴 했으나 개화정책을 펴던 사람들임을 감안하면 젊은 양반 자제들이 본인들의 입지 축소를 견디지 못하고 일으킨 설익은 정변이었다고 봅니다.
19/10/21 19:47
1,2,4 모두 인식의차이로 퉁칠수 있을거같네요 대부분 인식이 뒤떨어지니 군사도 없고 명분도 없고
3번이 젤큰이유같긴한데 독립협회가 활발할때 정변이 일어났으면 어느정도 통했을지도?
19/10/22 18:48
그게 힘들었죠. 왜냐하면 독립협회 활발할 때 바로 직전 을미사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해져서 의병이 일어났거든요.
당장에 개화파들 상당수가 을미의병 이후 단행된 아관파천으로 갈려 나갔습니다. 정치적 입지가 없었고, 정변 자체를 시도할 수가 없었죠.
19/10/21 23:45
이런저런 차이가 있겠지만 해국도지는 결국 정권의 여태까지의 무능함을 확인하게 되는것이라
조선과 중국,일본의 기존 권력층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테지만 -아편전쟁을 실정끝에 찾아온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그저 가끔있던 변방오랑캐의 침략정도로 생각하고 싶었을겁니다- 일본의 유신파에게는 강력한 명분과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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