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시끄러웠지만 별 일 없이 태풍이 지나간 후에 혹시 편의점이 열었나 싶어 나와보았다. 역시 편의점도 전부 문을 닫아서 마침 집 앞에 피난대피장소로 지정된 학교가 있길래 궁금해서 들러보았는데, 1층에는 자원봉사자들 여럿이서 예보를 틀어놓고 밤을 새고 있었다. 그 중 한 아줌마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난 편의점도 닫혀있고 해서 물 한잔만 얻을 수 있을까 와 보았다고 했더니 아저씨들이 아 그러냐고 물 한병 들고갈래? 하면서 아리수같은 디자인에 구청에서 뿌렸을 것 같은 페트병을 들어보였다. 난 그냥 한 잔이면 됐다고 하자 그 분은 종이컵을 주고 물을 따라 주셨다.
배고프면 밥도 있으니까 먹어도 된다고 해서 보니까 아저씨들이 야참을 만드는 중인지 물 부어서 만드는 즉석미역밥같은게 있었다. 뭐가 들었나 이리저리 보고있으려니 왠 하이바를 쓰고 있는 할아버지가 모처럼인데 다 경험이라고 이런 밥도 한번 먹어보라면서 미역밥 한봉지 해 주길래 먹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어려보여서 그렇게 말했겠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난 재해 피난소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카고시마에서 태어난 한 아저씨는 그 동네에선 태풍이 정말 일상이었다고 했다. 거의 태풍 전문가였는데, 태풍들의 수치나 주의사항, 경험등등을 얘기해주셨다. 자긴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정말 바람이 셀 때는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걷지 않으면 뼈대째로 날아간다 뭐 이런 듣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태풍이 막 올 때는 비가 엄청나게 내리거든. 그러다 갑자기 비도 멎고 바람도 멎고 소름돋게 고요해지면 그게 태풍의 눈에 들어온거야. 몇 분 정도 지나면 아까보다 더 센 바람이 몰아치는데.. 그러니까 태풍이 올 때는 비를, 갈 때는 바람을 조심해야 돼. 그런데 말이야, 눈 안에 있는 순간은 정말 파란 하늘이 보인다니까? 그럼 아저씨네 농사짓던거 비닐 걷어서 다 날라가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그냥 뭐.. 희생해야지 어쩔수 없다고 했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왔는데 한국은 지진도 별로 없고 태풍도 이렇게 큰게 계속 오진 않는다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응? 한국사람이라고? 그래그래.. 일본을 거쳐서 가니까 좀 약해지겠지. 일본도 수도권에 이렇게 큰 태풍이 오는게 많지는 않아. 무서웠겠구나. 하면서 또 세금물을 따라주셨다. 이제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난 그냥 넙죽넙죽 또 받아마셨다. 이번 달부터 2% 더 내니까 한잔정도 더 마셔도 괜찮겠지.
피난해온 사람이 있나요? 하고 묻자 위엣 층에는 200명정도 피난해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 동네는 사실 별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중이었고 실제로도 별 일이 없었는데도 200명이나 와 있다니 하고 좀 놀랐지만, 어찌됐든 피해가 예상이 된다면 차라리 호들갑을 떠는 편이 낫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재해가 생활인 일본이라 험한 꼴도 많이 겪어봤을테고... 지붕이 날아가고 땅이 꺼지고 집에서 수영하는 걸 겪어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이게 호들갑이니 뭐니 하는 생각조차 굉장히 무엄한 잘못을 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계획이 없는데. 어제밤에 집 근처 마트가 다 털린 다음에 암것도 없길래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하나 사온게 다였는데.
그걸 본 헝가리 친구는 나에게 그거 전기나가면 어떻게 먹을거냐며 자기는 칩스를 사 두었다고 웃었었다. 그래, 다 계획들이 있구나.
난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한 20분 앉은 의자를 돌려다 놓고 수고하세요~ 하고선 3분거리 떨어진 집에 돌아왔다.
오늘차 롤드컵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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