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항은 자가 유절(幼節)이며 그 유명한 육손의 차남입니다. 226년에 태어났는데 아버지 육손의 나이가 이미 마흔 넷이었지요. 거의 제갈첨에 비견될 정도의 늦둥이였던 셈입니다.
245년, 육항의 아버지 육손이 세상을 떠납니다. 사인은 화병이었습니다. 손권이 후계자 문제로 난동을 피우다시피 하자 육손은 몇 번이나 간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손권은 그런 육손을 오히려 경원시하였고, 심지어 몇 차례나 사자를 보내서 질책하기까지 합니다. 육손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지요. 이때 육항의 나이 스물이었는데 장남인 형 육연이 요절하여 육항이 아버지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손권은 그런 육항 역시도 고깝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수도로 돌아온 육항을 달달 들볶았지요. 그러나 육항은 젊은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게 대응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몇 년 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손권은 눈물마저 흘리며 육항에게 이때의 일을 사과합니다.
오나라에서 권세를 휘두르던 제갈각이 죽은 후 육항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257년에는 위나라 장수 제갈탄의 반란과 연계하여 수춘에서 전공을 올렸고, 259년에는 형주에 주둔하여 군사와 관련된 일을 관장합니다. 263년에 촉나라가 멸망하자 형주는 북쪽과 서쪽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됩니다. 육항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에 임명되어 그 중요한 임무를 떠맡았죠. 그리고 270년에는 형주 전체를 총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오나라에 거대한 위기가 닥쳐옵니다. 서릉(과거의 이릉)을 지키던 보천이라는 자가 진나라에 항복한 겁니다. 서릉이 넘어가면 진나라는 익주에서 삼협을 거쳐 서릉을 통해 다시 형주 북부의 양양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오나라를 압박할 수 있게 되지요. 그러니 이는 여간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육항은 실로 놀라운 대응을 보여줍니다. 서릉으로 급히 진격하여 성을 포위한 후, 뜻밖에도 본격적인 공성전을 벌이는 대신 그 포위망에서 또다시 바깥쪽을 향한 방어선을 구축한 거죠. 그 고된 작업을 얼마나 서둘러 재촉하였던지 병사와 백성들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부하들도 거세게 반발하였습니다.
“아직 진나라의 병사들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보천을 신속하게 공격한다면 구원병이 당도하기 전에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구태여 이런 포위망을 구축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괴롭게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육항은 대답합니다.
“서릉성은 지세가 견고하고 식량 또한 충분하오. 또 방비태세는 모두 예전에 내가 직접 갖춘 것들이니 쉽게 함락될 리 없소. 바로 공격한다 해도 빠른 시일 내에 함락시킬 수 없으니 북쪽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도달할 것인데, 그들이 왔을 때 우리가 미리 대비하고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감당하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은 돌격을 주장합니다. 육항은 완강하게 거부하죠. 단 한 번, 허락해 주기는 했습니다만 그의 예측대로 그 공격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육항의 말대로 진나라의 거기장군 양호가 이끄는 구원군이 서릉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육항이 미리 준비한 방어선이 워낙 튼튼했던 탓에 감히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지요. 양호는 여러 가지 계책을 써서 육항을 속이려 들기도 하고, 또 육항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강릉을 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육항이 적절하게 대응했기에 결국 양호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나라의 병사들이 물러난 후에야 비로소 육항은 서릉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외부의 구원병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서릉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성은 함락되고 배반자 보천과 그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목이 달아났습니다. 이렇게 육항은 실로 거대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그러한 공적으로 육항은 273년에 대사마(大司馬) 형주목(荊州牧)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지요. 향년 48세. 오나라를 지켜낸 명장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나라는 그가 죽은 후 6년 만에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육항의 삶의 궤적은 아버지 육손과 비슷해 보입니다. 특히 서릉 전투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지요. 육손이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동오를 지켜낸 바로 그 장소에서, 육항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배반자를 격파하여 나라를 수호했습니다. 또 여러 장수들이 반발했지만 그들을 억누르며 올바른 전술을 관철했다는 점도 비슷하지요. 상대가 뜻밖의 기책을 사용했지만 시의적절한 대응으로 오히려 승기를 가져왔다는 점도 같습니다.
육항은 아버지만큼이나 뛰어난 장수였으며 아버지에 못지않은 훌륭한 목민관이었습니다. 또 부자 모두 외지에 부임하여 국경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황제에게 상소하여 간언한 충신이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충언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요. 삼국지의 인물들 중 아버지만큼 훌륭한 자식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육항은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사례로 꼽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릇 부모란 자식이 자신보다 나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육손은 구천에서나마 자식의 활약을 지켜보며 뿌듯해하지 않았을까요. 육항이 아버지를 뛰어넘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그 아버지에 비견할 만한 활약을 보여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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