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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8/17 02:00:19
Name 글곰
Subject [일반] (삼국지) 이릉 전투 (5) -끝-
  이릉 전투 (1) : https://cdn.pgr21.com/?b=8&n=82020
  이릉 전투 (2) : https://cdn.pgr21.com/?b=8&n=82031
  이릉 전투 (3) : https://cdn.pgr21.com/?b=8&n=82061
  이릉 전투 (4) : https://cdn.pgr21.com/?b=8&n=82086
  이릉 전투 (번외편) : https://cdn.pgr21.com/?b=8&n=82106

  고백하건대 이릉 전투의 결말은 너무나 쓰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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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손의 선택은 불을 이용한 화공이었습니다. 당시는 윤6월. 음력이기에 대략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입니다. 날씨가 비교적 건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유비는 고지대를 점거하고 목책을 세워 방어하고 있었죠. 목책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공은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의의 묘사처럼 칠백 리에 걸쳐 늘어진 진영이 불 한 방에 잿더미가 된 건 아닙니다. 그런 무지막지한 길이의 진영이 애당초 있을 수 없음은 이미 지난번 번외편에서 말씀드린 바 있죠. 오서 육손전에는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동시에 공격했다(通率諸軍同時俱攻)고 묘사되어 있는데, 여러 요충지에 나누어져 있던 유비의 군사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각개격파를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리한 곳에 있는 적을 향해 무작정 들이받는 건 어리석은 일인데 그걸 보완하고자 불을 사용한 거죠. 불을 질러버리면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육손의 계략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여러 요충지에 배치된 40여개의 둔영이 순식간에 괴멸되었고, 유비의 대독 풍습과 선봉장 장남의 목이 달아납니다. 무릉만이를 이끌고 지원을 온 사마가도 함께 죽었죠. 두로와 유녕은 육손에게 항복하고요. 죽은 장수들의 직책만 보아도 유비의 본대, 그중에서도 이도 방면으로 돌출한 부대는 거의 박살나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 패한 유비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도에서 포위되어 있던 손환마저 그 동안 당한 원한을 갚고자 역공에 나섰습니다. 손환은 탈출로를 먼저 차단하고 유비를 사로잡으려 시도했는데, 유비는 험한 산을 넘어서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도망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뒤로 후퇴하다가 이릉 인근에 이르러 마안산이라는 곳에 병력을 집결시켰지요. 하지만 육손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흩어진 병력을 한데 모아 마안산을 포위한 후 맹공을 퍼붓습니다. 이미 사기가 크게 떨어진 데다 숫자마저 줄어든 유비의 병력은 도저히 그 공격을 감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진영이 와해되고 무수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비는 밤을 틈타 또다시 도망칩니다. 그러나 육손의 추격병들이 매우 가까이까지 육박해 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죠. 이 때 한 역참의 이름 모를 관리가 유비를 구원합니다. 그 관리는 역참에 보관되어 있던 군수물자들을 끌어내 길 한복판에다 쌓아 놓고 불을 질러 길을 차단했습니다. 그 틈에 유비는 간신히 몸을 피해 백제성까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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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단지 유비가 살아났을 뿐, 촉한의 손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무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이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지요. 비단 이도에서 죽은 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육손의 추격이 얼마나 급박했던지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지요.

  부융은 본래 별독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후퇴 과정에서 후미를 맡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미를 맡았다는 건 곧 사지로 들어갔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죠. 휘하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해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오나라의 군사들이 투항을 권유하죠. 부융은 욕설로 대답합니다.
  “한나라의 장군이 어찌 동오의 개자식들에게 항복할 수 있겠느냐!”
  그는 그렇게 유비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종사좨주로 유비를 수행하던 정기라는 자는 강을 거슬러 퇴각하다 동오의 배들에게 따라잡힙니다. 부하들은 배를 버리고 빨리 도망치자고 진언하죠. 그러나 정기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군문에 든 이래로 적 앞에서 도망치는 일을 배운 적이 없다. 하물며 천자를 수행하다 위험을 만난 때가 아니더냐!”
  그는 오히려 배를 돌려 직접 극을 쥐고 동오와 맞붙습니다. 부하들도 감명받았는지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오히려 동오의 배 몇 척을 가라앉히기까지 했죠. 하지만 중과부적인지라 결국 정기 또한 죽고 맙니다.

  마량. 형주에서도 손꼽히는 재사(才士)이자 제갈량을 공공연히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그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릉만이들을 설득하러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기에 본대가 패하자 제때 몸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황권. 진북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장강 북쪽에 주둔해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서쪽으로 돌아갈 길이 끊겨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황권은 이끌고 있던 부하와 병사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가 위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조비는 그를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후 황권은 무려 거기장군이라는 높은 직위까지 승진합니다. 사마의 또한 그를 무척이나 중히 여겼다고 하지요.

  황권에 대해서는 약간의 여담이 더 남아 있습니다. 유비는 얼마 후 황권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항복한 이상 남아 있는 가족들을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내가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그가 나를 저버린 것이 아니다.”
  한편 황권 역시도 유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가족이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조비가 상을 치르라고 권했는데 황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은 유비, 제갈량과 성심으로 서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저의 진심을 알고 있을 것이니 그 소문이 사실일 리 없습니다.”
  
  유비가 패퇴하자 그와 호응하려 했던 형주의 옛 신하들도 차례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때 엄청나게 기세를 올렸던 영릉의 번주는 반준과 보즐에게 토벌당하지요. 영릉의 습진 또한 반준에게 패한 끝에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반준이 그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습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한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오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결국 그는 끝까지 싸우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자결하고 맙니다.

  그런 무수한 희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유비는 얼마 안 되는 잔여병력을 그러모아 어복현의 백제성으로 돌아갑니다. 동오를 정벌하기 위해 출발한 바로 그곳으로 일 년 만에 되돌아오게 된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유비는 성도의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요충지인 백제성에 그대로 주둔해 있기를 택했지요. 그리고 어복현의 이름을 영안현으로 바꾸고 백제성을 자신의 황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에 백제성을 영안궁이라고도 부릅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일차적으로는 요충지에서 육손의 추격을 막아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실제로도 적장 이이와 유아 등이 그의 턱밑까지 육박해 온 상황이었거든요. 백제성마저 뚫려버린다면 자칫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비가 백제성을 사수하기로 한 건 나름대로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도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일생에 걸쳐 가장 참혹한 대패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갓 건국된 나라의 국력 대부분을 이 싸움에서 소진해버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볼 면목이 없었기에 그대로 백제성에 눌러앉은 게 아닐지, 저는 그렇게 짐작합니다.

  유비가 얼마 안 되는 병력과 함께 백제성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동오의 장수들은 공격을 허락해 달라고 손권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나 육손이 반대하죠. 조비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그 말에 따라 병력을 물립니다. 실제로도 조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오를 공격해 왔습니다만, 그 전쟁은 이번 이야기에서 따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한편 위급한 유비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강주에 주둔해 있던 조운은 유비가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병하여 백제성에 당도하죠. 다행히도 동오의 병력은 이미 물러났기에 더 이상의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파서태수 염지도 군사 오천 명을 급하게 징발하여 호독이란 자에게 맡겨 백제성으로 보냈습니다. 유비는 호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이렇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비록 황권을 잃었지만 대신 호독을 얻었다. 과연 세상에 현인이 부족하지 않구나!”
  이 호독이란 인물은 추후 이름을 마충으로 개명하고 촉한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이릉 전투는 유비의 대패로 끝났습니다. 그는 많은 인재와 병력과 물자를 잃었고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촉한이 몇 년에 걸쳐 쌓아올린 것들이 한꺼번에 증발해 버렸고 단지 얼마 되지 않는 병력만이 남겨져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유비의 이릉 공격을 어리석은 짓으로 폄하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릉 전투가 불가피한 것이었음은 제가 누누이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유비의 잘못은 몹시도 큽니다. 하지만 전쟁을 감행한 것 자체는 저는 잘못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패한 것, 그것도 실로 엄청난 참패를 당한 것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잘못이었지요. 오로지 결과에 따라 선행되는 판단의 옳고 그름이 결정지어지는 역설은 어쩌면 역사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비는 밀려오는 참담함을 이길 수 없었던지 병에 걸려 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지요. 한가태수 황원이 반기를 들었고, 예전부터 유비에게 적대적이었던 남중의 대호족 옹개 또한 반란을 일으킵니다. 장가군의 태수 주포와 월수군의 이민족 수령 고정까지 연계되어 무려 네 개 군에 걸쳐 일어난 거대한 반란이었죠. 촉한은 그야말로 몹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해가 지나고 이듬해인 223년 2월, 성도에서 유비를 대리하던 승상 제갈량이 부름을 받고 백제성으로 왔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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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7 02:05
수정 아이콘
아 이렇게까지 완패당하기도 쉽지 않은데, 왜 화공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요. 수십년을 싸우다보면 대충 감이란 것이 생길 텐데 말이죠.
딜이너무쎄다
19/08/17 20:49
수정 아이콘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만사 배제해야 할 것들이 결국에는 생기니까...
19/08/17 23:27
수정 아이콘
유비의 전략 자체가 요소요소의 지키기 좋은 거점을 확보하고 목책 등을 단단히 쳐서 방어하면서 눌러 앉는 것이었는데 화공은 여기에 완전 상극이었죠. 그렇다고 화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진영을 버리고 평지로 내려와 진을 쳤다면 오나라의 군세에 그대로 밀려 버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국 선택의 문제였고...... 육손의 판단이 매우 뛰어났죠.
밴가드
19/08/17 06:11
수정 아이콘
이릉전역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게 유비에게 촉군이 장강을 멀리 내려갈수록 위험할 수 있으니 자신을 선봉으로 내세우고 후방에 있으라는 황권의 조언입니다. 저 지역이 들어가고 나가는게 쉽지 않은 지형이라 수군 없이 따로 멀리 내려가지 말라는 경고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유비는 진식과 오반의 수군을 배후인 이릉에 상륙 배치 시켜버렸고 육손은 이 점을 유비의 큰 패착으로 보았죠. 황권전을 보면 "육의가 물의 흐름을 타고, 갑자기 포위하자 강남의 촉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라고 나와 다른 열전들에서의 언급이 없는 오나라 수군의 역활이 육손의 반격에 있어 매우 중요했던 걸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진식과 오반의 수군이 전진배치 되어있었다면 저렇게 총체적으로 무너졌을지 의문이 드네요.
19/08/17 06:39
수정 아이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 삼국지를 못보겠는데...ㅠ
19/08/17 06:40
수정 아이콘
그냥... 한 5에서 10프로정도 병력손실입는 패배를 당하고 철군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유비는 물러날 타이밍을 놓쳤던것 같지만서도요
19/08/17 06:41
수정 아이콘
그 병력과 인적자원을 제갈량이 물려받았다면 가정에 마속대신 황권 부용 풍습같은 장수를 넣을 수 있었을텐데
BlackPink
19/08/1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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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유비가 성도로 돌아가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 자기때문에 자기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사인지 연의의 창작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에 신경쓰던 조조에게서 천자를 구하고자 섣불리 조조를 공격했다가 거의 모든 병력을 잃고 패퇴한 후 관우, 장비 및 다른 부하들에게 '너희들은 뛰어난 인재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니 다른 사람을 모시고 출세하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었죠. 조조나 원소였다면 자기처럼 병사들을 개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죠. 황권의 가족을 처형하지 않은 것은 자기때문에 황권이 죽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유비는 이릉에서 자기가 수만의 병사들과 장수들을 죽게 했다는 수치심에 성도로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부하들에게 더 뛰어난 군웅들을 찾아가라고 말했을 때처럼 자신이 아닌 더 현명한 사람, 어쩌면 제갈량만큼 현명했다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제갈량에게 유선이 못미덥다면 제갈량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라는 유언을 남긴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더치커피
19/08/17 08:45
수정 아이콘
전쟁에 패하더라도 사람은 보전했어야 했는데... 충신들을 너무 많이 잃었군요 ㅠㅠ
19/08/17 23:32
수정 아이콘
장수든 병사든 간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죠.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19/08/17 08:49
수정 아이콘
어느 매체든 백제성에서 숨을 거두는 유비의 모습은 그 누구의 죽음보다 슬프죠. 여보게 아우들 내 이제 감세
홍승식
19/08/17 10:24
수정 아이콘
동시에 여러 진영을 화공을 공격하려면 공격하는 쪽도 군을 나누어야 한다는 건데 그걸 유비가 놓친게 가장 큰 패착이 아닌가 싶어요.
육손이 계속된 지구전으로 웅크리고 있어서 정탐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까요?
다시한번 정찰의 중요성이 느껴집니다.
19/08/17 23:32
수정 아이콘
육손도 나름대로 눈속임 작전을 썼습니다. 일부러 유비의 진영 한 곳을 공격해서 눈을 돌리게 했거든요.
리자몽
19/08/17 12:15
수정 아이콘
유언대로 제갈량이 황제 됐으면 더 나았을까요? 아님 주변 반발로 반란 생기고 한나라 부흥 대의명문이 사라져서 더 꼬였을지?
그린우드
19/08/17 13:59
수정 아이콘
유선이 그렇게 최악의 왕은 아니었죠. 제갈량에게 국정을 전적으로 맡겼고 자신의 한게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차피 제갈량이 황제가 된들 북벌이 성공할리가 없고 죽고난 뒤로는 답없는건 마찬가지죠. 황제가 된다고 더 낫진 않았을겁니다.
카바라스
19/08/17 19:28
수정 아이콘
제갈량 죽을때 아들이 8살이죠. 한 20년쯤 일찍 망했을겁니다
19/08/17 23:33
수정 아이콘
촉한은 유씨의 나라이기에 비로소 존재가치가 있는 국가였습니다. 제갈량이 황제가 되었으면 왕망Ver2와 별다를 게 없는 결과였을 겁니다.
강미나
19/08/18 11:42
수정 아이콘
제갈량이 황제가 됐으면 그렇게 계속 수도를 비우고 몇십년간 북벌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전혀 자기 욕심부리지 않고 제갈량이 뭘하든 전폭적으로 밀어준 유선이야말로 제갈량에겐 최고의 황제에 가까웠을거라고 봅니다.

오히려 유비가 칭제하자마자 죽고, 유선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이릉대전은 없었든가 있더라도 이렇게 최악의 결과를 낳지는 않았을거고
북벌에도 더 많은 힘을 쏟아부을 수 있었겠죠. 유비가 일찍 죽는 게 촉 입장에선 훨씬 나은 결과였을겁니다. 결국은 곳간 다 털어먹고 죽었고
제갈량이 아무리 용을 써도 끝까지 그걸 복구하진 못했죠.
지금뭐하고있니
19/08/17 12:15
수정 아이콘
이릉은 3형제의 의기와 우애, 도전 스토리의 비극적 피날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릉이 있어서 소설이 완성이 됐고 누구보다 유명하고 인기있는 위인이 됐죠. 그치만 이야기의 구성과 별개로 우리는 그렇게 알게 된 위인을 애정하기에, 그 스토리와 위인을 아쉬워하는 거겠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현12
19/08/17 14:51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대로 유비가 주둔하고 있던 효정-이도까지의 영채 40여개가 격파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비가 주둔시킨 후방의 수군은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없고 마안산에 가서야 수군의 장비가 일거에 손실되었다고 기록이 나오거든요. 풍습, 장남, 사마가, 두로, 유녕은 유비의 본대 4만명이 40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죽거나 항복한 것으로 봐야 할거 같습니다. 40여개의 영채를 세워 병력을 주둔시킨 것은 각지의 요충지에 기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 잘 연계할 수 있도록한 조치였겠구요. 황권전에 따르면 육손은 물의 흐름을 타고 공격하여 갑자기 포위했다고 나오는데 효정 상류에서 배를 띄우고 수륙양용으로 사방에서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의 본대가 격파되고 나서도 유비는 어느정도 병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포진시켰다.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오자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었으며, 죽은 자는 수만명이 되었다. 유비는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역참의 관리가 직접 남아있는 물건을 지고 군악기나 개(槪)를 길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적병의 추격을 끊었다. 유비는 겨우 백제성으로 들어갔다. 그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 번에 거의 손실됐고, 병사들의 시신은 장강을 떠다녔다.'라고 되어있는데 마안산 전투의 전사자만 수만명이었다면 유비가 마안산에 올랐을 당시에는 아직 상당한 병력을 보존해두었다고 봐야겠지요.
서현12
19/08/17 16:5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양양기에 보면 번주와 습진은 같이 봉기하기로 약속했는데 손권에게 격파되었는데도 습진은 7개현을 이끌면서 소릉태수를 칭하고 이민족의 경계를 두고 촉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양양기의 이후 기록에서는 손권이 반준을 보내 습진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보즐전을 보면 이릉대전 당시 보즐이 교주의 1만 군사로 익양에 주둔시켰고 유비가 패퇴하자 영릉과 계양이 소란하고 곳곳마다 병사로 막으니 보즐이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봐선 유비가 패퇴하고도 영릉과 계양은 저항했던 걸로 보이고 습진은 재차 침공해 온 반준에게 격파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8/18 13:22
수정 아이콘
잘 보았습니다. ㅠㅠ 마량이라도 살았더라면... ㅠㅠ
서현12
19/08/18 16:06
수정 아이콘
첨언하면 유비는 오에 비해 빈약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릉은 장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이 수군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으로 봅니다. 수군이 부족한 정황은 유비 입촉 이후부터 형주 공방전 결과를 상고해보면 대략적으로 추측이 가능한데요. 유비가 익주를 정벌할 당시 유비는 수전을 하지도 않았고 수군을 이용했다는 구절도 없어 수군을 가지고 왔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당시 촉한 진영 내에서 수군을 가장 잘 이용하던 장수는 형주에 진수하던 관우였는데 관우는 번성공략 당시 7군을 공격하고 면수라는 한 구역의 수로를 장악할 정도의 수군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문젠 형주에서 관우의 군세가 와해될 때 이 수군부대가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이죠. 유비 입장에선 나름대로 다시 수군을 편성한다고 했겠지만 1~2년 사이에 회복시킬 수준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고...육손은 손권에게 유비가 수륙병진으로 안 들어와서 다행이다라고 언급했지만 기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봅니다.

황권이 '촉의 수군은 물의 흐름을 따라 행동하므로'라고 언급하고 있으니 장강의 흐름에 맞추어 촉의 수군이 움직이고 있었을테고 수군을 이끌고 있는 진식, 오반이 이릉에 주둔하면서 효정에 주둔한 후방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촉의 수군은 보급로를 지키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마프리프
19/08/18 19:07
수정 아이콘
1차북벌때 호왈 20만을 끌고갔는대 이릉대전이없었으면 30만 뽑아갔으려나?
딴거필요없이 가정에 마속이 안갔겠지 ㅠㅠ
Concentrate
19/08/26 01: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조조빠?라 가슴 아프진 않지만 제갈량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유비의 인재풀의 안타깝긴 하네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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