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를 경험해봤다면 알겠지만, 백수들은 대부분 날짜를 잘 모른다.
20대 마라톤 코스의 디폴트라고 할 수 있는 대학과 군대, 취업을 연파한 나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꿈을 찾아 떠났으나, 현실의 벽에 그나마 타오르던 열정마저 사라지고,
솔직히 모든 게 막히자 꿈같은건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괴로운 현실에서 떠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가까운 성취를 얻는 것이였으니...
오랜만에 접속한 그곳에서 나는 거진 1년을 헤어나오질 못했다.
...
그 전날의 레이드는 왠지 순조로웠으며, 새벽까지 달렸는데도 무리가 없었다.
창문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고서야 잠들어버린 그날,
그날은 어버이날이였고, 오랜만에 휴일을 맞은 아빠가 쉬고있던 날이였다.
점심이 지나고서야 게슴츠레 눈떠서 한 일이라고는 핸드폰을 킨 것,
그리고 웹사이트 여기저기 장식된 카네이션을 보고서야 오늘이 어버이날임을 알았다.
거실에서 옷을 다리는 아버지의 인기척에 한시간을 더 자는척 했다.
'어버이 날인데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선물도 준비못한걸 알면 많이 섭섭해할까?'
온갖 생각이 머리속을 빠르게 지나다녔다.
평생 사랑한다 말 한마디 하지못한 경상도 사나이들끼리, 그것도 휴일 점심에 나눌만한
자랑스러운 사랑표현 대화라는건 너무나 찾기가 힘들었다.
선물하나 준비하지 못해서, 어릴적 지그재그 가위로 색종이를 잘라
카네이션을 만들어 드려도 됬던 5살의 나를 그리워하는 지금의 내가 너무 한심했다.
온 기를 집중해 아버지쪽을 신경쓰고 있을때, 컬러링하나 없는 아버지의 무뚝뚝한 벨소리가 들려왔다.
받기 꺼려하는건지, 아니면 모르는 번호라 보이스피싱이라도 걱정하는건지 한참을 머뭇거리다 아버지가 받았다.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모르나 "좋은날"이라는 언급을 한것봐선, 아버지도 확실히 어버이날임을 알고있는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혹시 아까의 머뭇거림이 백수아들을 둔 아버지의 난감함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자식만 느낄 수 있는 알수없는 죄책감이 조금 올라왔다.
아빠의 통화가 끝날 즈음에, 부스스한 머리를 머쓱하게 문지르며 일어났다.
아빠는 아무일 없었다는듯 밥먹어라했고, 나는 애써 같이 점심먹자고 했다.
... 아빠는 이미 먹었다고 한다.
밥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건지, 고등학생때 좋아하는 여자애를 쳐다보려고 눈은 칠판을 보면서 최대한
그녀쪽으로 봤던 그런 듯한 시선으로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끝날때 쯤이야 나는 말을 꺼냈다.
" 어버이날인데 뭐 받고싶은거 없어? "
...없다고 한다.
괜히 멋쩍은 분위기에, 아무것도 요구안한 엄마를 농담삼아 팔았다.
"엄마는 돈달라고 하던데." (팩트 : 실제로 엄마는 니가 선물이라고 했음 )
...아빠는 피식웃더니, 자긴 필요없다고 한다.
나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와서 이불속에 들어갔다.
아무도 눈치 안줬지만, 도저히 컴퓨터를 킬수가 없어서, 괜시리 몇년전에 공부했던 책을 쳐박아둔 책장이나 기웃거리며,
아무것도 준비한게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지만 뭐라도 하는척하려고 내 좁은 방을 기웃거리며,
그렇게 뭔가 맘구석 한곳이 답답했던 나의 어버이날이 괜히 기억이난다.
참고로 지금은 돈을 달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