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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21 12:24
고대 전쟁에서 모사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이었죠.
제갈량이 유비에게 귀의하기 전에 유비군의 모사 역할을 관우가 했다는 얘기가 많은 걸 생각해보면 관우는 현장 지휘관 뿐 후방 보급까지 맡고 있지 않았나 싶네요.
18/09/21 16:16
유비군의 규모를 감안하면 전부 다 도맡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정말이지 군사를 먹이기 위해 사람 고기를 납품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무시무시한 시절이라, 당시 보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18/09/21 21:26
그런면에서 투자자에게 입터는 미축(본인도 투자)과
후방의 내외정을 관우와 같이하는 간옹. 사절로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는 손건. 유랑의 사병집단이 군벌로 성장하는데 간손미 트리오의 공이 지대한걸로 판단됩니다 크크크
18/09/21 12:38
관우의 맹공은 어메이징하네요.
형주의 일부만 이끈 관우에게 백전노장 조인이 이렇게 몰리다니... 관우가 어떤면에서 괴력을 발휘한걸까요
18/09/21 12:43
완의 반란진압은 전예가 뒷마무리했으니 번성에 주둔한 조인의 병력은 관우북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 맞춰 전군이 내려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18/09/21 16:20
그게 타당한 추론이죠. 후음이 죽은 건 1월이고 조인은 완으로 돌아갈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조조가 서쪽으로 갈 때 형주 군사 일부분을 빼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말 그대로 상상의 영역일 뿐이죠. 그래서 저는 두 가지 가능성을 봅니다. 1) 무슨 이유에서건 간에 형주의 병력 일부를 다른 곳으로 돌렸기에 조인의 병력이 부족했다. 2) 관우가 야전에서 조인을 개발살내고 진격하여 양번을 포위했다. 두 번째 가설을 채택하고 싶은 건 제가 촉빠라 그렇습니다.
18/09/21 16:34
위나라는 수군의 존재가 번성공방전 내내 보이지 않습니다, 번성방어에 있어 수군의 존재는 필수불가결, 조인이 바보가 아닌이상 수군의 존재가 중요하다는걸 알고 있었을터, 그럼에도 관우의 수군만이 번성에 존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라고 봅니다.
18/09/21 16:39
청니 대치의 사례를 보더라도 관우와 조인이 강릉과 양양 사이의 어디에서쯤엔가 한판 붙었을 가능성은 분명이 있습니다. 그 때 조인의 수군이 함께 박살났다고 가정한다면 이해가 가는 일이죠. 병력이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배들은 그럴 수도 없으니까요.
18/09/21 16:51
온회가 조인이 강물이 불어나는데 적진 깊숙히 들어가 이에 대비 못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위나라 수군의 수가 벼르고 있던 관우군 수군의 숫자에 못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봅니다.
18/09/21 12:51
관우의 평가에 대한 추정이 인상적이네요
기록엔 없으나 기곡전투에서 조운이 한 일을 여러번 해냈다고 추정하면 당대의 평가가 이해가 갑니다
18/09/21 13:45
관우 역시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괴리감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 중 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촉의 자료는 현재 많이 남아있지 않고 승자인 위와 진의 기록 위주로 보게 되는데 여기엔 막상 이렇다할 큰 전공은 없거든요 그런데 또 당대 사람들의 평가는 매우 높습니다 명성은 높지만 눈에 띄는 전공은 없다보니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를 엮어 과대평가라는 말들이 많지만 기록이 소실되어 우리가 모르는 기록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게 아니면 당대의 평가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갈량도 관우랑 비슷하죠 현재 제갈량의 평가도 뛰어난 정치가일뿐 이다 라는 말이 많습니다 문묘(문선왕 공자)에 비하면 격의 차이가 심하지만 그래도 황제와 주요 재상들이 제사를 지낸 무묘(무성왕 강태공)의 기록을 보면 당 760년에 진秦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 한漢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 촉蜀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 당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이세적) 한漢 태자소부太子少傅 장량張良 제齊 대사마 전양저(사마양저司馬穰苴) 오장군吳將軍 손무孫武 위衛 서하수西河守 오기吳起 연燕 창국군昌國君 악의昌國 를 배향합니다. 문묘나 무묘는 황제가 개인 빠심으로 배향할수 있는 곳도 아니고 당대 주요 신하들과 논의 해서 위폐를 모시고 같이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다가 당나라는 삼국시대 이후 진정한 통일국가(진 수 는 너무 짧았죠) 라고 할 수 있는데 당대 주류 인식은 제갈량을 역대 명장 10명 중 한명으로 보았다는 소리입니다. 이 후 송나라에서도 기록이 보이는데 1123년 선화 5년에서도 무묘에 배향될 72명의 역대 명장을 뽑는데 전상 - 장량 서향 - 관중, 손무, 악의, 제갈량, 이적 동향 - 전양저, 범려, 한신, 이정, 곽자의 를 먼저 뽑아 제후에 봉하고(제갈량은 순흥후) 뒤에 따로 62명을 뽑는데 삼국지 시대 인물로는 관우, 장비, 황보숭, 등애, 주유, 육손, 여몽, 육항, 두예, 장료, 양호, 왕준이 포함됩니다. 원나라 1283년에도 무묘에 단 10명을 제사를 지내는데 제갈량이 포함됩니다. 삼국지연의가 원말명초에 나온 책임을 생각해보면 제갈량이 정치가일뿐 연의빨이라는 말은 잘못된거죠. 이미 삼국지연의 나오기전에 명장이 주류 인식이었고 이는 조선실록에서도 나옵니다 오히려 현대에 오고 이미지가 반전된 케이스입니다 관우 역시 삼국지연의에 의한 신격화에 대한 반발로 저평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네요
18/09/21 16:26
관우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이 너무 없어요. 백마+번성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제갈량을 까면 사살입니다. 어딜 감히...(엄근진)
18/09/21 13:54
저도 뒤에 관우가 우금군과의 싸움에서 세운 공과 별개로 조인을 몰아붙인 것 자체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후음의 반란에서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북을 총괄하는 조인의 병력이 고작 형주 3군 정도만 관할하는 관우의 병력보다 크게 적을 것같지는 않거든요. 물론 관우가 더 우세하니 쳐들어간 거겠지만 적벽대전 직후 리즈시절의 주유도 조인에게 고전했던 걸 생각하면 양번을 함락시키기 직전까지 간 것도 관우의 상당한 전과라 봅니다.
18/09/21 13:57
적벽대전(208) 당시 유비 군세가 2만 명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후 남형주를 차지하면서 군세를 증강시켰지만 유비 입촉(212~214) 당시 관우를 제외한 대다수 장수들이 입촉한 것으로 보아 당시 관우에게 남은 병력은 정말 얼마 안 되었겠죠.
그리고 번성전투가 219년이니 관우는 유비가 적벽전 이후 한번 병력을 빡세게 뽑아 익주 올인한 형주에서, 5년만에 다시 병력을 양성하여 - 도중에 위와 오의 공세도 틈틈이 막아가면서 - 군대를 만들어 치고 올라갔다는 말이 되죠. 그것도 익양대치 후에는 강릉, 공안, 무릉만 남은 상황에서요. 어떻게 보면 프로토스의 로망 시기에 한방러시로 유명했던 임성춘의 전투스타일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그런 느낌이기도 합니다. 결국 대권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 무너졌다는 점에서도 비슷할지도요.
18/09/21 16:33
영릉도 있긴 했습니다. 남군+무릉군+영릉군이죠. 의도군도 있지만 사실상 남군 일부를 떼어다 만든 군이니 큰 의미가 없고...
여하튼 목민관으로서 관우의 능력은 출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혼자서 그 병력을 양성해냈다는 건 누가 봐도 어마어마한 성과죠. 그런데 비겁하게 본진에 럴커드랍이......!!!!
18/09/21 14:06
지도를 보면 양양도 중요한데 완까지 먹히면 장안과 허도 낙양이 모두 사정권에 들어오는군요
양양이 털리면 완으로는 지형으로 방어할 대책이 안보이기도 하네요 완을 털어내면 주변 주요도시들이 전시체제로 바뀔테니 산업도 파괴될 것이고 한중 상용 강릉 라인이 완성되서 원하는 출구로 치고 나갈 수 있으니 정말 큰 일이 맞네요 조조 입장에서도 섬뜩할 상황인것 같습니다
18/09/21 16:36
양양만 차지해도 한중-상용-양양-강릉-강주-성도-한중으로 이어지는 동그란 순환선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략적으로 군사를 운용하기에도 훨씬 편해지죠. 완까지 차지한다면 정말 허도가 눈앞이고요.
18/09/21 21:05
정말로 유비가 안타까운 상황이지요. 길이 이어진 이상 한중의 병력을 몰고 양양으로 진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늘 가시질 않아요.
도리어 맹달의 병력만큼 관우의 병력에서 뺀 결과가 되어버렸죠. 유비가 상용으로 병력을 전개하고 상용의 유봉 맹달이 양양에 구원군으로 출진하면서 장비가 검각을 막아버리면 되었을 것이 아닌가 거기에 황충 법정의 예비군을 활용했다면 양양과 번을 점령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18/09/21 15:03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속도네요. 계속 이 속도를 유지해주실거라 믿습니다.
관우가 양번을 무사히 취했다면 정말 삼국지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항상 생각합니다.
18/09/21 18:40
상식적으로 제갈량이 기산에서 깔짝거린게 아니라 형주에서 치고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쓰마이식 닥버가 통할리가 없지요.
당대 군벌들을 바른 조위의 에이스가 쓰마이였는데 그 쓰마이를 바른게 제갈량이이었지요. 주유와 노숙의 통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잘 드러납니다. 노숙은 몰라도 주유는 유비를 싫어했지요. 그래도 주유는 촉오동맹의 필요함에 대하여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여몽과 손제리는 진짜 저능아에요. 지방군벌로 만족한다면 몰라도 중원을 노리려면 정말 절대 하지말아야 할 실수였습니다.
18/09/21 20:11
사실 저는 여몽과 손제리가 바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 둘은 실제로 목표가 지방 할거였을 거라고 보거든요. 그런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유비 등에 칼을 꼽아서라도 장강 방어선을 갖추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근데 그래도 미운 건 똑같아요 하하하
18/09/21 23:44
사실 그게 목적이었다고 해도 문제인게 양번을 동오가 취했어야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장강방어선이 갖춰지는 것이었죠.
양번을 결국 위가 장악한 상태라면 동오에게는 전혀 지리적 이점을 살릴수 없는 육지를 통해서 남군과 형주 4군이 모두 공격 사정권에 들어오게 되는데 동오 입장에선 전선만 더 복잡해지는데 상식적으로 관우타도를 목적으로 위에 협력하는 관계에서 위의 영토였던 양번을 위나라로부터 뺐는게 가능했을까요. 전 그래서 여몽이란 인물 자체가 군략에는 뛰어날지 몰라도 대국적인 안목은 별로 없는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한중에서 조조를 격파한 촉이 그 기세를 타고 형주 북부까지 장악해서 유비가 세력을 확장해버리면 맨날 합비 방면으로 올라가면 깨지기만 하는 동오 입장에서는 그 뒤부터는 관우라는 난적을 도모하고 영토를 확장할수 있는 기회는 없을것이라는 판단하에 일단 땅 늘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래도 촉나라보단 늦게 망하는 선택지를 골랐다고 봅니다.
18/09/22 00:00
뭐 결과적으로 촉나라 보다 늦게 망하긴 했으니까요... 말씀하신대로 유비의 세력이 더 커지면 동오는 정말로 답이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요.
18/09/22 17:35
여몽이 고른 선택지는 결국에는 "망하는" 선택지인데 저는 먼저 망하냐, 좀 더 늦게 망하냐는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애초에 대세에 대한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망하지 않기 위해서 고민을 해야 된다고 보구요.
애초에 연합이라는것 자체가 훨씬 강한 상대에게 맞서기 위해 하는건데 오나라는 괴랄하고도 가장 강한 나라와 연합을 해서 가장 약한 나라를 무너트렸죠. 이건 진짜 그냥 촉보다 늦게 망하는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선택이라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손제리를 까는거죠.
18/09/22 12:59
관우가 의리와 수염 빼곤 별로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재를 알아보는데 탁월한 인물들이 관우를 평하던 걸 모아서 보니까 무신 대접을 받는 이해가 되는군요 (스포츠로 치면 강팀들이 노리는 약팀의 에이스라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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