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ebtoon.daum.net/webtoon/viewer/38017
나빌레라는 다음 웹툰에서 연재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이 일흔에 발레에 도전하는 할아버지와 스물셋 방황을 멈추려는 청년이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이리 보니 웹툰 홍보 같지만(..) 이같지만(..) 이 작품을 통해 제가 체험한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할머니
일흔이 넘으신 할머니에게 우리 가족은 농담으로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쁘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평일에 구청, 교회 등에서 진행하는 서예 교실 등을 다니시며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동량을 보이시니까요.
'나이에 비해'서 정정하신 것은 많지만 세월은 속이지 못했습니다. 한여름이면 더위 때문에, 겨울이면 추위 때문에 활동을
줄이실 수밖에 없었고 짧은 거리를 걸어가시더라도 숨이 차서 쉬고 움직이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아버지가 쉬기 시작하신 이후로는 될 수 있는 대로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일이 많아졌지만
집 차가 SUV다 보니 차에 타시는 것도 불편해하셔서 시간이 맞으면 제 차로 어떻게든 모시려고 해야할 정도니 참 가슴 아픈 일이죠.
선물
움직이는 외부활동을 점점 힘들어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선물한 건 노트북과 성경 쓰기였습니다.
마침 기본 컴퓨터 교실이 외부에 있었고, 할머니께서 한글 타자 연습을 어느 정도 해두신 상태였으니까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올여름 할머니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습니다.
집착
할머니는 저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집요하게 성경 쓰기에 집착하셨습니다.
타수도 느릴 수밖에 없고…. 눈도없고.. 눈도 침침하신데도 집에 계신 시간에 무서울 정도로 노트북을 잡고 계셨습니다.
연로하신 관계로 같은 자세로 오래도록 노트북을 잡고 계시니 정말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래서 탁자에 놓고, 책상에 놓고, 침대 위에서 하시는 등 자세를 바꿔가며 하셨습니다.
그래도 멈추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그리고... 어느 날 할머니는 반창고를 찾으셨습니다.
같은 자세로 살이 짓눌리다 보니 욕창 증세가 생기셨거든요
원래도 잔소리꾼(..)에 가까운 아버지는 잔소리 텐션을 올렸습니다.
할머니의 무료함을 달려드리기 위해 알려드린 컴퓨터 성경 쓰기가
건강에 안 좋은 꼴이 되었으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속이 더 탈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할머니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나빌레라
할머니 걱정에 대한 염려를 부모님께 듣기도 하고...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던 와중에
한창 인상깊게 보던 웹툰이 나빌레라였습니다.
자녀를 모두 키우고 황혼에서야 하고 싶은 것을 진심으로 시작한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청년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어찌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그 당연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웹툰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나누고 싶어서 부모님께도 웹툰을 추천드렸습니다.
대화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할머니께서 어머니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이거 다 하는데 얼마정도 걸렸었니?'
컴퓨터 성경쓰기를 끝내셨던 어머니는 이래저래 얼추 8개월 정도가 걸렸다고 답했습니다.
물론 할머니 정도의 시간 투자는 아니었지만, 타이핑 속도 차이가 있으니 할머니 입장에서는 얼추 감을 잡으실만한 대답이었겠죠.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제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놓치고 있던 그 무엇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해
부모님과 따로 식사하는 자리에서 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빠 엄마.. 할머니 건강 걱정되는건 저도 똑같은데.. 이제 뭐라고 안하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왜 건강 나빠지는 상황에서도 집착하시는지 이젠 이해했어요.
할머니는... 끝내고 싶으신거에요....
연세 대비 정정하시긴 하지만 날이 갈수록 거동도 힘들어지시고, 그것 때문에 답답한건 그 누구보다 본인이시겠죠?
몸이 아프신데도 1분 1초라도 더 잡고 계시는건 어떻게든 이걸 끝내고 싶기 때문일거에요.
우리한텐 그냥 취미겠지만 할머니에게 지금 저건 살아계신 동안 끝내고 싶은 과업 같은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걱정된다 하더라도, 하지말라는 잔소리보다는 할머니가 원하시는 것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데만 집중해봐요 우리... 편하게 하실 수 있는 자세가 뭐있는지도 같이 고민해보고
계속 앉아계시지 않게 모시고 나가서 밥도 먹고요.."
응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잡착의 의미를 함께 이해하게된 가족은 다른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건강에 대한 염려는 크고.. 툭툭 쉬엄쉬엄 하시라는 이야기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걱정이 그 근본이라 할 지언정) '하지마세요'보다는 '잘되가세요'를 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할머니의 타자 속도는 느리고... 하루 종일 노트북을 잡고 계시고... 몸은 성하지 않습니다...
대신 해 드릴 수도 없고, 건강을 많이 지켜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이젠 할머니를 이해했기 때문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행복
웹툰으로 시작한 할머니에 대한 이해는, '행복'에 대한 이해로까지 생각을 넓혀줬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았음에도,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조급해지고 힘들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걸 찾고 조금씩 해나가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닫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삶이 달라진건 없지만, 이미 행복했었지만 미쳐 몰랐던 제 자신과 조우하게 된거죠.
문득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좋아하는 카페에가서 커피를 마십니다.
슬레이어즈 박서의 방송 소식을 듣고는 복싱이 하고 싶어져서 바로 다니기 시작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립니다.
영화가 보고 싶어지면 밤 12시가 지나 한적한 영화관을 찾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크나큰 행복입니다.
흔히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에서 나의 불행함을 찾지만,
사실 그것만 빼면 우리는 이미 수많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웹툰을 통해 제가 할머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할머니가 저희 가족에게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던건 아닐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