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고 물 한 컵 마시려는데 정수기 물통에 물이 없다.
아, 물 한번 마시기 힘들구나. 뒤쪽 창고에서 십팔 리터짜리 물을 끙차 갖고 와서 냅다 꽂는다.
쿠르르르르.
정수기 물 먹는 소리에 사무실 여기저기서 머그컵을 들고 정수기로 오는 사람들을 애써 못 본 척 한다.
어라 믹스커피다 다 떨어졌네? 오늘 마트 가서 장 좀 봐야겠어. 간식비 아직 남았지?
네. 마침 오늘 갈 일도 있고.
멀어져가는 대화소리를 흘기며 모닝쾌변을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채용되어 인턴 형식으로 일한지 어느덧 1년 반.
20명 남짓한 사무실. 분위기도 좋고 배려도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하게도 계속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들 너무 좋은 편이기도 하고.
여초 사무실이라서 그런지 주전부리나 커피. 그리고 직원들의 생일파티는 되도록 챙기는 분위기가 있다.
오늘은 내 생일 하루 전이다. 전날 술자리서 같은 건물 다른 업체에서 일하는 친구포함 동네 친구들과 간단한 생일파티 겸 모여서 대화하다 사무실 생일파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너, 모레 생일인데, 생일날은 너 휴무니까 내일 니 생일파티 해주겠다.
작년에도 안 해줬어. 내가 직원도 아니고 바라지도 않는다. 야.
작년에는 니 온지 얼마 안됐잖아.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알바나부랭이 뭣땜에 챙겨. 이번에는 챙겨줄걸? 내가 보니까 다들 너랑 친하고 지나가다 보면 니가 제일 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아냐아냐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서 그래. 그리고 지금까지 뭐 언급도 없는거 보니까..
흠, 그래? 그래도 우리가 축하해 주잖아.
변기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이 스치면서 방금 들은 대화가 자꾸 떠오른다.
네. 마침 오늘 갈 일도 있고.
흐음. 설마?
일상적인 업무. 대화.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과.
카톡 새 소식 목록에 내 생일 있을 텐데 그런 건 나만 보나...? 따위의 아주 소심한 잡생각이 떠오르지만 애써 무시한다.
오후 4시. 나른해 질 때 즈음 간식을 사러 직원 두 분이 나선다. 원래는 짐 때문에 나도 데려가는데 오늘은 안 데려가네.
지금 해야 할 일도 없고 해서 창고 문을 열고 어지러운 텅비실 겸 창고나 정리한다. 잡생각 정리하는 덴 땀 흘리는 게 최고지.
열심히 일하는데 마트에 갔던 그녀들이 돌아왔다. 얼핏 보니 케이크도 있네? 갑자기 두근두근 거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축하받는건 언제나 설레고 기쁜 일일 것이다.
간식 드세요~ 모여요~
장갑 벗고 괜찮은 자리에 앉았다. 아, 벌써 케이크 세팅 끝났구나.
웬 케이크야? 이번에는 누구 생일이야?
아, 잠시만요~ 과장님도 빨리 오세요.
자 불 끄고. 과장님~ 저번 8일날 생일이었는데 그때 여러 민원이다 뭐다 해서 바빴잖아요. 휴가, 휴무 없이 다 모이는 날이 딱 오늘이라 조금 늦게 준비했어요~ 괜찮죠~?
맞다. 과장님도 이번달 생일이셨구나. 너무 좋아하신다. 과장님. 히히
후~
생일 축하드려요~ 자 이제 먹자.
응? 벌써 먹나? 나도 내일 생일인데?
나도 모르게 테이블 여기저기 촐싹맞게 둘러봤다. 다른 케이크는 없는데. 음.
케이크 조각과 가성비 좋은 이마트 피자. 시크릿 치킨. 썩 괜찮은 생일 파티가 열렸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연어초밥도 있네.
아 나 손을 안 씻었구나. 저 손 좀 씻고 올께요.
엘리베이터를 잡고 저 아래 1층에 있는 로비 화장실로 향한다. 최대한 멀리 있는 화장실로 가고싶다. 뭘 기대했던 걸까.
한참을 있다 사무실로 왔다. 내 자리에 케이크 조각 하나. 피자 조각 두어개가 담긴 접시가 있다.
먹다가 갑자기 어디 갔었어? 하나도 못 먹은거 아냐? 많지 않지만 좀 담아뒀어. 그거 먹어.
아, 고맙습니다. 전화받고 오느라.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고.
유게의 스타 리마스터 사은품 증정 게시물에 댓글을 달려고 하는 찰나에 카톡이 울린다.
같은 사무실의 마음 따뜻한 직원.
00씨 오늘 생일이었죠? 축하한다고 하는걸 바빠서 깜빡했어요. 제 선물이예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익 기프티콘을 보내셨다.
고마워요. 사실 저번주에 생일이었지만.. 요즘 우울했는데 00씨 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무리가 안되네요.
저 저번주 오늘 생일이었습니다. 축하해주세요.
나이가 들면서 생일 축하받고 싶어지는데 그런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네요. 다들 바쁘다보니 멀어지고. 사무실의 작은 에피소드를 적으려고 했는데. 킁킁 찌질한 냄새.
제 생일은 모르지만 그래도 다음해 부터는 직원채용 해주신다고 합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생일주간이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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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는 지났지만 생일 축하드립니다!
생각해보면 그날 축하받은 저 과장님이라는 분도, 결국 일이주 지나서 축하받은 거잖아요? 바빠서 그렇지 관심의 차이는 아닐거에요 :)
요즘은 카톡에 생일도 뜨고 한다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회사생활 하다 보면 같은 부서 직원들 생일 챙기기 쉽지 않아요.
저는 심지어 7월 생일이었는데 9월 초에 선물 받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