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한 번 날아올랐다면 답을 내리게 될 것이니.
하늘을 응시하며 알게 되리.
이곳이 내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을.
태초의 거대한 새가 태양을 향해 비상할 것이며
크나큰 체체리 산*을 넘어서 온 세상을 경이와 영광으로 채우리라.
하늘을 향해, 마치 새처럼,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로 비상할 것이리니.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체체리 산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행 기계를 시험하던 이탈리아의 지명.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초로 비행기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와 구조를 설계하고 스케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정오를 지난 시각, 탈주병들을 태운 거대한 갈색 공중전함이 벨리트라이(Velitrae) 제국령 아르데아(Ardea) 지방의 상공에서 비행 중이다. 완벽한 전함의 모양을 갖춘, 길이 322m, 높이 77m의 본체를 단단히 묶은 584m의 흰색 기낭(비행선의 공기주머니)이 위용을 뽐내듯 강렬한 햇빛에 번쩍였다. 기낭 옆면 널찍한 자리에는 제국의 상징인 3개의 머리를 가진 용 문양이, 그 옆으로 붉은색 활자 ‘05-C-01’이 자리 잡았다. 기낭의 후면 양쪽에는 한껏 바람을 머금은 돛이 반쯤 펴진 채 장궁처럼 휘어 있었다.
“현재 상황을 보고하라.”
‘전직’ 소령이자 제국군 제5함대 찰리(C) 전대의 지휘관이었던 29살의 젊은 함장 막시미노(Maximinus)의 명령이 떨어졌다. 3년째 전쟁 중인 북방의 적국 아이젠슈타트(Eisenstadt) 제국군은 그를 ‘은발(銀髮)의 악마’, 혹은 ‘오른쪽 용’으로 불렀다. 전자는 그의 은발 곱슬머리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자는 벨리트라이 제국의 상징 삼두용의 오른쪽 머리라는 의미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공중전함을 지휘하는 자리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그의 걸출한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에 적국으로부터 불리는 별칭이 있다는 건 군인에게 있어 훈장보다 값진 최고의 찬사다. 물론 서른이 되기 전 함장 혹은 중령까지 오른 이는 전체 제국 역사를 아우를 경우 수천 명을 헤아린다. 하지만 그의 출신 배경이 귀족 가문이 아닌 변방의 고아원 출신이라는 점까지 고려할 경우 그와 비슷한 예를 억지로 추려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현시대 한정으로도 ‘유이’했다.
둥근 유리 계기판들 속 바늘의 위치를 꼼꼼하게 확인한 1등 비행사를 시작으로, 함선의 각 부분을 담당하는 승무원들이 항적보고 수칙에 의거, 빠르고 힘찬 목소리로 상황을 보고했다.
“12시 08분 현재 속도 55노트, 고도 7.1km.”
“침로(항적선과 자오선이 이루는 각) 28도 유지 중.”
“서남풍 초속 4m. 외부 기온 12도.”
“전 방향 이상 무. 시계 양호.”
“관측부는 계속 후방을 주시하라. 전방은 필요 없다.”
그가 앉은 함장석은 함교(함선의 주위 상황을 파악하고 조타를 위해 갑판 중앙에 돌출된 공간) 내에서도 모든 병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너머 조망창 밖으로 화창한 하늘이 보인다. 우현에는 풍성한 구름 한 점이 외로이 떠 있다. 비행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다. 고공풍을 타고 가장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한 안정적인 고도 역시 확보했다.
“지금부터 전속력으로 치르체(Circei) 산맥을 넘는다. 초당 20m씩 상승, 고도 8km를 확보한다. 속도는 최대로 올린다.”
“초당 20m 상승 시작, 목표 고도 8km.”
“돛 최대 전개 시작.”
“7분 30초 후 목표 고도 도달 예정. 예정 시각 12시 16분.”
“돛 최대 전개 완료. 속도 상승 중. 현재 61노트.”
“80노트까지 속도를 높여라. 이후 대기.”
제국군 공중전함 운용 교범에 의하면 본 대공전함의 최대 속력은 68.8노트라는 걸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물론 교범 속 최대 속력은 각종 무장과 보급품, 그리고 표준 승무원 88명이 탑승한 것으로 가정한 수치다. 하지만 약 1시간 전, 이 함선에 탑승한 24명의 탈주병은 내륙의 소도시 타렌툼(Tarentum)에서의 출항과 동시에 모든 해치(hatch. 함선 밖으로 난 각종 쪽문)를 열어 대부분의 뱃짐을 배 밖으로 내버렸다. 보수용 자재나 보급품은 물론이고, 대공 포탄은 십여 분 정도의 교전이 가능할 정도만 남겼다. 약 이틀의 비행이 예정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식량조차 하루 치를 제외하고 모조리 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 특수한 점들을 고려하더라도 80노트라는 속도는 다소 위험했다. 하중을 줄여 속도를 높이긴 했지만, 만약 고공풍이 급격한 기류 변화를 일으킬 경우 가벼운 무게가 오히려 독이 되어 조타력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하지만 누구도 함장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상명하복이 뼛속까지 뿌리박힌 ‘전직’ 군인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 모두 한시라도 빨리 제국의 영토를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는 즉, ‘생존’이 걸린 문제다.
“80노트 도달. 조타 상태 양호. 속도 유지합니다.”
비행사가 적색 눈금 범위에 기어 레버를 고정했을 때, 다시 함장의 명령이 있었다.
“현재 속도 유지 시 도착 예정시간은?”
대답 대신 3등 비행사의 질문이 되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치르체 산맥까지입니까? 아니면 시그니아(Signia)까지입니까?”
“둘 다.”
함장석 왼편 아래의 그가 도판 위 방안 지도에 디바이더와 자를 절도 있게 움직이며 선을 그었다. 그 선을 따라 숫자 몇 개를 쓴 그는 신속하게 계산을 마쳤다.
“치르체까지 34분, 시그니아 국경까지는 38시간 12분이 예상됩니다. 다만.”
한 번 말을 쉰 그는 약간 가라앉은 어조로 보고를 마쳤다.
“아시다시피 산맥 위 난기류는 물론, 항시 머무는 쌘비구름(일명 ‘적란운’. 강력한 상승기류에 의해 많은 양의 수증기가 탑 모양으로 솟구치면서 만들어지는 거대 구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등 지구상 절대다수의 악천후는 이것으로 인해 발생)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은…”
“그만. 무슨 말인지 안다.”
오른편의 통신병이 외쳤다.
“함장님, 비상용 폭스트롯(F) 통신망을 통해 누군가 교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아, 제국군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하마터면 ‘아군’이라고 할 뻔했다. 물론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군이긴 했다. 어쨌든 그의 보고대로 여러 통신망 알림등 중 가장 왼편의 등이 점멸 중이다.
“무시한다. 뻔한 소리를 듣고 있을 시간은 없다.”
“네.”
모든 조치는 끝났다. 막시미노는 머리 위편에 함장 전용 선내 통신기를 집어 엄지로 버튼을 눌렀다.
“전 덱핸드(Deckhand, 갑판원)들에게 알린다. 전 덱핸드들에게 알린다. 나는 막시미노 함장이다. 현재 본함은 예정대로 치르체 산맥을 향해 순항 중이며, 앞으로 약 34분 후 도착할 것이다. 그동안이 우리의 첫 번째 고비가 될 것이다. 전방으로부터의 위협은 없다. 후방에 주목하라. 특히, 후방 포탑은 3문 모두 즉각 발사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후방 관측병은 추격하는 제국군 함선 발견 시 곧바로 보고하도록. 이상.”
버튼을 놓자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함미의 후방 함포병을 시작으로 후방 관측실, 상단 관측실, 기관실, 측면 함포병, 전방 함포병의 외침이 있었다.
- 알겠습니다!
“목표 고도 도달! 8km 유지.”
함교 가장 중앙 자리의 전방 관측병이 외부 망원경의 접안렌즈에 눈을 붙인 채 보고했다.
“현재 시계는 양호. 하지만 4.4km 전방에서 쌘비구름 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예상했던 구름이었다. 치르체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지상 2km부터 최대 13km까지 수직으로 솟은 거대한 구름 기둥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통신기에서 다급성 음성이 터져 나왔다.
- 여기는 후방 관측소! 함장님, 응답 바랍니다! 긴급 상황입니다!
급박한 외침에 그는 낚아채듯 통신기를 움켜잡았다.
“함장이다.”
- 후방에 전함 1척 발견! 부대 식별번호는 확인 불가!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신속했던 탈주 상황을 생각한다면 자신들을 추격할 수 있는 종류의 전함은 단 한 가지다.
“전체 통신으로 전환한다. 이상.”
이번엔 함교 천장 스피커로부터 소리가 울렸다.
- 여기는 후방 관측소. 후방 1,170m 거리, 우현 62밀(mil, 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는 정밀 각도 단위, 원=360도=6,400밀, 통상적으로 조타는 도 단위를, 사격 관련은 밀 단위 사용) 밑으로 강습전함 1척 발견. 속도는 103노트!
강습전함다운 빠른 속도다. 전용 통신기를 든 그가 즉각 명령을 내렸다.
“함장이다. 전 덱핸드 전투 준비.”
다음 명령은 후방 전함의 추월에 대비해야 했다. 고도 하강, 상승, 좌현 혹은 우현 전타, 아니면 지그재그 등 여러 회피기동법이 있다. 이제 노련함과 실전 감각의 영역이다.
- 적함 고도 7.6km에서 상승 중. 현재 7.7km, 7.8km, 속도는, 엇? 적함, 감속 중. 다시 알립니다. 적함 감속 중. 현재 94노트. 거리는 1,010m.
의외의 보고였다.
‘감속?’
막시미노는 함교 오른쪽 아래를 향해 말했다.
“카란탁(Carantac) 중위.”
“네, 함장님.”
FDC(Fire Direction Center, 사격지휘반) 반장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가무잡잡한 얼굴의 젊은 장교의 얼굴에서는 비장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적함이 감속 중이다. 하지만 본함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기만술일지 모른다. 앞으로 1분마다 적이 다시 속도를 높여 유효사거리에 도달한다고 가정한 후방 함포의 발사 제원을 미리 산출하고. 계산 즉시 포탑에 전달하도록. 교차 검산은 생략한다.”
“어차피 저 포함 3명뿐이라 교차 검산할 사람이 없습니다. 부함장도 없고요. 우리 워낙 급했잖습니까?”
다시 그가 몸을 돌렸다. 이미 반장의 휘하 2명의 FDC들은 발사 제원 계산 양식지에 분주히 숫자를 채우고 있다. 원래는 전방, 후방, 좌우 측방 함포 각 2명씩 4개 조, 총 8명이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승무원 모두가 탈주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기에 빈자리가 많았다.
“쓰면서 들어라. 상대는 하필 가장 귀찮은 강습전함이다. 단 1밀의 차이가 생사를 결정한다. 가뜩이나 포탄도 모자라니까 오차 따위는 내지 말자고. 계산 결과는?”
수직통제병(함포의 수직 발사각을 계산)과 수평통제병(함포의 수평 발사각을 계산)이 연달아 외쳤다.
“상향 84밀!”
“우향 8밀!”
2년간 함장과 함께 지옥과도 같았던 여러 전장을 누빈 경력을 과시라도 하듯, 카란탁은 암산으로 상하 기류와 기온의 영향을 추가해 최종값을 산출해 냈다.
“아아, 후방 포탑, 들리나? 카란탁이다. 상향 87밀, 우향 7밀로 함포 고정. 다시 한번 알린다. 상향 87밀, 우향 7밀로 함포 고정. 현 시간 이후로 내가 전달하는 모든 산출값은 표준 장약 투입량 2.8kg 기준이다. 외부와의 온도 차가 있으니 화약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3문 모두 꽉꽉 눌러 담아라. 만약 젖은 화약 때문에 불발탄이 생길 경우 본관이 몸소 네놈들을 배 밖으로 던져버릴 테니 바짝 긴장하도록. 그리고 앞으로 1분마다 제원을 송신할 예정이다.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즉각 응답하기 바란다. 이상.”
바삐 움직이는 FDC 위로 함장이 다시 상황을 물었다.
“후방은?”
- 거리 700m 유지 중. 고도는 본함과 같은 8km. 속도는, 역시 본함과 같은 80노트. 같은 고도에서 계속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묘한 움직임이다. 만약 자신이 함선을 급속 정지시킬 경우 뒤따르는 함선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600m 이내로 좁혀질 것이다. 그리고 600m란, 전탄 발사 시 70% 이상의 명중률을 보장하는 함포 유효사거리다. 뒤편의 함선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이유가 뭐지?’
만약 막시미노가 추격함의 함장이었다면 작고 날렵한 몸체의 강습전함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처음 나타났을 때의 맹렬한 속도로 본함 위편을 확보한 후, 아래쪽으로 무차별 기뢰 투하를 선사했을 터였다. 그러한 속도전이 애초 강습전함의 건조 목적이기도 하다.
‘후방 지원부대를 기다린다?’
그럴 리는 없다. 워낙 신속한 탈주였고, 한계 속도를 벗어난 비행 중이다. 또한 그들이 출항한 타렌툼의 특성상 여러 척의 함선이 정박하고 있었을 리도 없다. 막시미노는 추격조는 후미의 전함 단 1척일 것으로 생각했다.
‘본함을 격추할 생각이 없나?’
이건 더 말이 안 됐다. 탈영병에 대한 처벌은 예나 지금이나 즉결 처분일 터.
‘잠깐, 강습전함? 혹시?’
그 생각이, 순간 누군가의 이름에 닿았다. 그가 낮은 탄성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통신병, 얼마 전 보고했던 폭스트롯 채널에서는 아직도 교신을 요청 중인가?”
“네, 그렇습니다.”
“… 너도 거기 있었던 거냐?”
“네?”
영문 모를 말에 통신병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답 대신 그는 함장용 헤드셋을 쓰며 연결을 명했다.
“연결됐습니다.”
헤드셋 밑으로 입을 향해 휜 마이크를 한 손으로 가리며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너냐?”
기다렸다는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응답이 있었다.
- 그래, 이 미친 새끼야! ‘거지함’치고는 빨랐지?
“거지함이니까 빠른 거겠지. 우리도 거지함이잖아. 그런데 왜 하필 너냐? 어디서 출항한 거야? 너도 타렌툼에 있었던 거야?”
- 맞아. 야, 더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닥치고 어서 돌려!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늦은 것 같아.”
-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죽긴 누가 죽어?”
- 야! 네 놈이 지금 치르체를 넘을 생각이라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최종 목적지는 시그니아 공화국이지? 망명이냐?
“맞아. 그런데 망명은 아니야. 안 받아줄 거 같은 데다가, 설혹 받아준다고 해도 그쪽을 100% 신뢰할 수는 없거든.”
-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역사상 ‘단 한 척’의 함선도 치르체를 넘은 적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왜? 왜긴 왜야,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건 그냥 미친 짓이거든.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랴?
“말해 봐.”
- 먼저 산맥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수십 개의 쌘비구름들 때문이야. 함선이 통과할 틈이 없어. 그리고 그것들이 사방으로 내뿜는 자기장은? 닿자마자 방향타, 계기판, 통신장비들이 몽땅 먹통이 돼. 그렇다고 구름 속으로 달려들었다간 상승기류에 휘말려 산산조각이 나거나 구름 속 벼락과 우박 세례를 맞는다고. 뭐, 그건 네가 운 좋게 어찌어찌 피했다 치자. 산에 다가갈수록 미친 듯 불어대는 돌풍과 제트기류는 어쩔 건데? 그건 아예 피할 수도 없어. 해발 7,600m의 치르체 산등성이에서 부는 돌풍의 순간풍속이 얼만 줄 알아? 자그마치 83노트(=153km/h)야! 그런 바람들이 사방팔방에서 미친 듯 불어댄다고. 조타고 뭐고 네가 뭔가 시도하기도 전에 산 구석에 처박힌다는 소리야. 알겠냐, 이 돌대가리 자식아!
“누구나 다 아는 설명 고맙다. 하지만 이제 다른 방법은 없어. 이미 병사들과도 이야기 끝났고.”
- 이 봐. 이 몸께서 여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날아왔을 거 같아? 각본은 다 짜 놨다고. 지금 당장 나를 향해 함포를 쏴. 카란탁이라고 했나? 그쪽 FDC 반장 실력이 좋으니 가능할 거야. 강습함이지만 한두 발 정도는 피탄 당해도 추락하지 않아. 제발 함교만 맞추지 말라고.
듣자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다.
“그래서?”
- 그러면 내가 ‘아이고, 큰일 났네! 친구야, 나 죽는다!’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이 아래 적당한 곳에 안전하게 추락할 테니 너도 잽싸게 착륙해서 나를 구하는 척 해. 그런 다음 감동 어린 이야기를 만드는 거지. 무슨 소리냐 하면, 원래는 망명을 생각했으나 자신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오랜 절친을 외면하지 못해서, 그리고 조국을 배신하는 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아 마음을 돌렸다고 대충 꾸며. 그렇게 내게 순순히 체포돼서 군사 법정에 출두하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거야. 최소한 교수형은 면하겠지. 내 부하들도 모조리 옷은 벗겠지만 큰일이야 있겠어? 설마 강제수용소까지 가진 않을 거야. 어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는 험한 욕설들을 퍼부으며 친구를 저주했을 테지만 속으로는 친구를 구제할 최후의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리라. 콧등이 시큰해졌지만 막시미노는 짐짓 냉정함을 유지하며 응답했다.
“네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어. 먼저, 후미를 확보한 강습전함이 대공전함과의 도그파이트(Dogfight, 공중전) 끝에 격추당한다? 사관학교 1학년 애들도 웃겠다. 그리고 지난주에 이미 구류 처분을 받은 이후 연속으로 사고를 쳤고, 이번에는 죄목의 무게가 아예 달라. 눈곱만큼도 참작되지 않을 거다. 또 제 아무리 카란탁이라고 해도 함교를 맞추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결정적으로 자동 전투기록장치 때문에 둘이 짜고 친 게 언젠간 다 들통 날 텐데 그런 오점을 남겼다간 너 진급 취소될걸? 다음 달이었지 아마?”
-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써먹는 거지. 크큭, 사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아.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방법뿐인 걸 어쩌겠냐?
“어쨌든 제안은 거절하겠어, 제를락(Gerlac) 중령, 아니 이제 곧 대령.”
- 야, 인마! 왜?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더 할 말 없으면 교신 끊는다.”
말과는 달리 그는 헤드셋을 벗지 않았다. 한참의 적막이 있었다. 다시 제를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뭣하지만, 인터라마(Interrama)의 ‘그 일’은 참 더러웠어.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은 비참한 기억에 막시미노는 큰 한숨을 내뱉었다.
인터라마 전투는 6일 전 일이다. 발단은 아이젠슈타트 제국의 폭격함 4척이 이른 새벽에 재빨리 국경을 넘어 제국령 아퀼레이아 요새를 폭격한 것이다. 이에 마침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 제5함대 소속의 모든 전함은 함대 총사령관이자 황제의 처남 콰드라제시모(Quadragesimus) 공작의 명령에 퇴각하는 적함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추격 시작 얼마 후, 적이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퇴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막시미노는 현재의 원뿔꼴 일점추격 대형 대신 고도차를 둔 산개 대형으로 추격하여 적함 기습에 대비할 것을 제안했지만, 공작은 대형 변경 시 속도가 줄어든다는 이유로 묵살했다. 그리고 부임한 지 2주일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한 초보 사령관의 조급함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간단했다. 그가 평민 출신, 아니 사실 평민보다 못한 하층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추격 개시 후 30분 만에 막시미노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폭격함은 순전히 미끼였고, 끔찍한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 북쪽 인터라마 지역 17km 상공 구름 속에 매복하고 있던 아이젠슈타트 제국 제3공군 전단 소속 28척의 전함들이 기다렸다는 듯 학살에 가까운 섬멸전을 시작했다. 비 오듯 쏟아진 공중 기뢰를 맞은 전함 5척이 전투 시작과 동시에 격추됐고, 공작이 탄 총지휘함 역시 기낭 일부가 찢어지는 타격을 입었다.
“퇴각하라! 전 함선 퇴각!”
함포 한 번 쏘지 못한 채, 공작은 후퇴를 명했지만, 지난 2년간 인터라마 전역에서 막시미노와 제를락의 귀신같은 용병술에 번번이 참패했던 아이젠슈타트 공군은 그간의 원한을 한 번에 갚으려는 듯 선회하는 제국군 함선들을 향해 수백 톤의 기뢰를, 그야말로 쏟아부었다.
- 지휘함이다! 찰리 전대 지휘함은 즉시 응답하라! 막시미노!
콰드라제시모의 황급한 음성이 함교에 울렸다.
“막시미노 중령입니다.”
- 즉시 고도를 높여 본함의 위로 날아올라라! 그리고 본함과 똑같이 속도를 유지하고!
“네?”
사방에서 기뢰가 터지고 있었지만 못 알아들은 건 아니다. 말의 의미가 너무 황당했다. 수많은 상관을 모셨던 그였지만 이런 명령은 유례가 없었다.
- 이 개새끼야! 똑바로 들어! 위에서 우리를 가리란 말이다! 지금 당장!
명령이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사색이 된 병사들의 시선이 함장에게 쏠렸다.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전방 상황을 분석했다. 저 멀리 한쪽 기낭 외피 여기저기에 뚫린 구멍을 내버려둔 채 갈지자로 몸을 흔들며 도주 중인 총지휘함이 있었다. 그 위로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검은 점들이 보였다.
“속도를 65노트로 높이고 초당 20m씩 상승한다. 목표 지점은 우측 전방의 지휘함 위. 이상!”
쏟아지는 기뢰 사이를 뚫고 그의 전함이 지휘함 위에 도착했을 때였다. 좌측 위편으로부터 공작으로부터 같은 명령을 받은 제를락의 강습전함이 자신의 함선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두 겹의 육탄 방어막인 셈이다.
“제를락 너도?”
- 그래. 아마 명령은 내가 먼저 받았을 텐데 급속 상승 중에 억지로 내려오느라 좀 늦었어. 근데, 아 시발! 진짜 저 사령관 새끼 답답해서 돌아버리겠다! 딱 2분만 더 상승했다면 위쪽 놈들 몽땅 잡아먹을 수 있었을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완전 똘아이라니깐!
“투정은 그만해. 아, 제를락, 내가 위로 갈 테니 위치를 바꾸자. 기뢰에 맞기라도 하면 강습함으로는 오래 못 버텨.”
- 바꿔봤자 의미 없어. 방금 놈들이 정석대로 기압 기뢰(낙하하면서 일정 기압에 도달하면 터지는 폭탄)를 뿌리기 시작했어. 아, 내가 이래서 기뢰를 싫어한다니깐. 맞짱 뜨긴 겁나니까 안전한 곳에서 우수수. 진짜 비겁하지 않아?
“심히 공감되는 말이긴 한데, 전쟁통에 그런 거 따지는 게 더 이상한 것 같군. 그리고 너도 가끔 기뢰 쓰잖아?”
- 야, 그건 어쩔 수 없을 때나 쓰는… 아 젠장, 교신 끊는다. 나도 바쁘거든. 이상.
“땅에서 연인이 기다린다. 부디 무사해라, 친구. 이상.”
애써 담담한 척 말했지만 막시미노 역시 미칠 것 같긴 마찬가지였다.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차별과 편견은 이제 생경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담담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식 밖의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을 버려야 될 상황까지 몰리자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그를 휘감았다.
- 미스트(Mist. 기낭 최첨부) 관측병은 위쪽을 상황을 보고하라. … (치직) 기관실! 증기 터빈을 최대로 돌려라! …
막시미노가 아니었다. 난데없이 울린 콰드라제시모 공작의 목소리에 막시미노는 물론 모든 함교 승무원들의 시선이 천정으로 향했다.
- 좋아. 개처럼 잘 지키고 있군. … 부함장, 속도를 더 높일 수는 없나? … (칙, 치직) 알았다. …
총지휘함의 통신병이 이전 교신을 끊지 않아 공작의 목소리가 계속 막시미노의 전함에 전달되고 있었다. 이는 치열한 교전 중 종종 발생하는 사소한 사고였다. 그 사소한 사고 탓에 전함의 모든 이들의 공작의 말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 (치직) 그렇지. 부함장 말대로야. (치지직) 참으로 이 역할에 어울리는 놈들이군. (치칙) 그럼, 요즘 저놈들 때문에 다들 불만이 (치직) … 그래, 두 녀석 다 쓰레기 같은 출신 주제에 (치직) 너무 나댔어, 크크. (치직, 치직) 이쯤에서 영웅으로 사라지는 게 맞겠지. (치직) 괜찮아. 저 함에 있는 놈들 모두 평민들이야. 저런 놈들이야 얼마든지 있다고. 그래서 별명이 거지함 아니겠나? (치지직, 칙) 막시미노 그 새끼는 심지어 고아라며? 창녀 밑구멍에서 튀어나온 새끼다운 최후야. 크크. (치직)
“함장님! 이건!”
듣다 못한 카란탁 중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우리는 사람도 아닙니까? 우리가 왜 저 개자식을 지켜야 합니까? 왜! 우리가 평민이라서? 그게 이유가 됩니까?”
“귀관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명령은 명령이다! 자리에 앉아!”
“함장님, 저 역시 함장님과 함께 그 동안 말도 안 되는 수많은 명령들을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명령에 불응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이런 개 같은 명령도 명령입니까? 우리는 그간 항상 최전방에서 싸워왔단 말입니다! 저 자식 말대로 사냥개처럼 무조건 맨 앞이었다고요! 덕분에 수십, 수백 번이나 죽을 뻔했지만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사람대접은 받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뒈지긴 싫단 말입니다!”
사방에서 기뢰가 폭발하는 가운데 함교 속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다만 모두의 표정이 카란탁의 말이 옳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적막을 가르는 외침이 있었다.
“전방 좌측에 기뢰 다수 발견!”
지름 5m의 검정 철구(鐵球)들이 눈 깜짝할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위치를 고수한다!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병사들 모두 즉시 자리에서 엎드렸다. 저 중 하나라도 터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될 터였다.
“으아악!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신이시여!”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함선에 확실한 진동이 있었다. 함교는 병사들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라보드(Larboard. 우측 뱃전)에 기뢰 피격!”
관측병의 보고는 필요 없었다. 창밖으로 시커먼 물체가 배의 갑판을 스치며 측면을 때리고 지나간 것을 막시미노는 직접 목격했다. 만약 그것이 일반 기뢰였다면 충격에 신관이 점화되어 작약을 때리면서 대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기압 기뢰다! 모두 침착하도록!”
순간, 함선 밑으로 폭발음이 들리더니 천둥 같은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하단에서 기뢰 폭발 중!”
하늘에 구멍이라도 낼 듯 폭발은 수십 초간 이어졌다. 막시미노의 전함까지 흔들거릴 정도였다.
고공풍의 급격한 변화를 동반한 비구름의 등장으로 아이젠슈타트 군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섬멸전을 조기에 종료했다. 그 짧은 전투로 벨리트라이 제5함대는 절반이 넘는 17척의 전함을 잃는 손실을 보았지만 그 정도로도 다행이었다. 기적적으로 생환한 막시미노를 기다린 것은 군사 법정 회부였다. 그 포함, 함선의 모든 병사가 피고로 지목됐다. 죄목은 ‘명령 불이행’이었고, 극히 이례적으로 원고의 요청 이후 하루 만에 법정이 열렸다.
“피고는 제 명령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크게 다친 것이고요! 여기 제 팔이 그 증거입니다!”
지휘함의 튼튼한 골조와 보호 갑판 덕분에 팔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뿐이었지만, 콰드라제시모는 팔 전체에 붕대를 두르고 다른 손으로 지팡이까지 짚은 채 원고석에 나타나 열변을 토했다. 이에 막시미노는 공작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것은 물론, 옆으로 당시 기압 기뢰의 폭발은 불가항력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명령 불이행 여부는 함선의 출발부터 회항까지 모든 침로와 함포 조작 등이 자동으로 기록되는 자동 기록장치를 분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 항변했다. 하지만 전원 귀족 장교들로 구성된 배심원들 모두 그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개정 이래 30분 만에 판사가 긴 판결문을 낭독했다.
“지휘관의 명령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한 피고 막시미노 중령의 실책과 해이함은 제국군의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중대한 명령 불이행 행위에 해당하며, 특히 현재 제국이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 더 막중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원고의 소 청구 사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피고는 폐하의 성은으로 시행된 ‘빈민층 특별입학제도’의 수혜자로서 제국 공군 사관학교 수료와 장교 임관 등 여러 각별한 은혜를 입은바, 군 조직에 있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본 법정은 피고에게 엄중한 선고를 내림이 마땅하다. 다만, 그간 제국을 위해 여러 전과를 올렸던 피고의 공적을 인정하여 4일간의 구류 후 1계급 강등 조치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원고 콰드라제시모 공작에게 진심을 담아 정중하게 사과할 것을 명한다. 아울러 피고가 지휘했던 제국군 제5함대 찰리 전대 지휘함의 승무원들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기 어려운바, 연대책임을 물어 역시 4일간의 구류에 처한다.”
폐정을 알리는 판사의 망치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막시미노에게 다가온 공작이 지팡이 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판사님께서 방금 내게 정중하게 사과하라고 했던 말, 들었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공작은 턱을 뻣뻣하게 들었다.
“엎드려서 빌어, 이 천한 자식아. 개처럼 말이야.”
법정 곳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헤드셋에서 다시 친구의 음성이 들렸다.
- 네 심정 이해한다.
“뭘? 아, 그때 내가 엎드렸던 거?”
- 그 이야긴 집어치워. 당장 함선을 돌려서 그 개새끼 저택에 함포를 갈기고 싶어지니깐. 그게 아니라 네가 영창에서 풀려나자마자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함선을 탈취한 걸 말하는 거야. 오죽했으면 네가 이런 짓을 했겠냐? 크크, 탈주 역시 과연 대공전함 지휘관다운 전격전이었어. 경비병들은 어떻게 한 거야? 닻은 어떻게 푼 거고? 그리고…
“자세한 과정은, 하, 이야기하자면 길어. 풀려나자마자 그냥 우르르 쾅쾅 벌어졌지. 닻을 풀고 강제 시동을 건 방법이 궁금한 모양인데, 너도 알다시피 함선은 덱핸드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야. 방법은 많지.
- 그건 그래.
“그리고 오해하지는 마. 여기 사람들, 내가 멱살 잡고 끌고 온 게 아니야. 나흘 동안 같은 층에 갇혀있으면서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부분 생각이 같았어. 거기에서 역적모의가 완성된 거지. 문제는 어디로 향하느냐였는데, 일단 아이젠슈타트는 별로였고…”
- 너 정말 미친 거냐? 별로라니? 크크큭, 야, 거긴 네가 가고 싶어도 못가. 네 놈이 떨어뜨린 함선만 50척이 넘을 테고, 너 때문에 생긴 과부와 고아들이 수천 명은 될 거다. 미스트에 백기를 달고 투항한다고 해도 그게 너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그쪽 함대 전체가 날아와서 널 걸레짝으로 만들걸?
나름 마음에 드는 비유였는지 제를락은 연신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 봐, 그건 너도 마찬가지, 어쨌든, 그것보다는 어차피 거기도 황제와 귀족이 사는 동네라 별로 내키지 않았어. 그래서 선택한 것이 시그니아야. 제법 큰 자유무역 국가잖아. 공화국이기도 하고. 일단 치르체와 시그니아 국경을 넘자마자 적당한 곳에 착륙한 다음, 그 이후부터는 걸어서 이동할 거야.”
- 아까 내가 설명한 거 그새 까먹었냐? 치르체를 어떻게 넘겠다는 거야? 아휴, 뭐, 그래. 넘었다 치자. 그다음은?
“탈주 모의 때 이미 이야기 끝났어. 시그니아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각자 살길을 찾는 거로. 다들 아직 한참 나이인데 어떻게든 먹고 살 수야 있지 않겠어? 평생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야 하는 게 좀 귀찮긴 하겠지만 말이야. 다만 가족이 있다든지,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한 승무원들은 함께 하지 못했어. 그 결과, 나처럼 이것저것 귀찮은 게 딸리지 않은 떨거지들만 이 배에 타고 있다고 해야겠지. 그래도 괜찮아. 이런 비행도 참 낭만 있고 좋네.”
친구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휴, 참으로 멋지군. 그래, 맞아. 그게 바로 너와 내가 고아원 시절부터 꿈꿨던 진정한 비행이지. 안 그래?
“맞아. 그간 수백 번 하늘을 날아왔지만 이렇게 신나는 비행은 처음이야.”
막시미노의 눈에 저 멀리 바닥과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구름들이 보였다. 그 너머로 치르체가 있을 것이다. 한참이나 멍해 있던 그가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를락, 저 구름들 보여? 쌘비구름 말이야.”
- 뭐야, 내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고작 경치 감상 중이었어? 당연히 보이지. 여기서 봐도 정말 무시무시하네. 그러니까 배 돌려. 어서.
“저 구름 같아.”
- 뭐가?
“방금 네가 고아원 이야기했잖아. 그래서 생각난 거야. 우리 그땐 저게 얼마나 무서운 구름인지 몰랐었지.”
- 요점이 뭐냐?
“8살 때였나, 우리 둘 다 기필코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하늘을 날기로 결심했었어. 그 때만 해도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맞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잖아? 마치 저 구름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랐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뭐랄까, 그냥 좀 슬프네.”
할 말을 잃은 헤드셋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막시미노는 친구 역시 옛 생각에 빠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분이 흘렀는지도 모를 때, 제를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크큭! 기억나냐? 12살 때였을 거야. 너랑 나랑 침대보를 양쪽에서 잡고 고아원 3층에서 뛰어내렸던 거. 원장한테 무진장 혼났었잖아. 그 마귀할멈 지금도 잘 있나 몰라?
그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난 그것보다, 13살이었나? 밤마다 몰래 액자 틀을 부셔서 모형 함선을 만들다가 걸렸을 때가 더 기억에 남아.”
- 크흐하하핫! 아, 그때! 맞아, 진짜로 웃겼어. 감히 황제 폐하의 초상화 액자를 떼려다가, 그거 몸통에 쓸 뼈대가 필요해서 그랬던 거야, 근데 안 빠져서 억지로 당기다가 액자가 통째로 떨어지면서 엄청난 소리가 났었지. 넌 잽싸게 튀었지만, 난 너무 급해서 여자애들 자는 방에 들어가 타르실라(Tarsilla)가 자던 침대에 돌진했어. 걔가 나한테 반한 순간이 아마 그때였을 거야. 크하하! 크하하핫!
“뭐? 으하하! 말도 안 돼!”
기어이 터진 막시미노의 웃음이었다.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함교원들은 저 혼자 뭐라 떠들며 웃고 있는 함장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 아, 너무 웃었더니 눈물이 나네. 네 말대로 그땐 우리가 이런 신세가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원장 할멈이 예전에 그랬어. 그냥 시골에서 감자, 옥수수나 키우라고 말이야. 이제 생각해보니 그 말 들을 걸 그랬어. 크흐.
“맞아. 참 더러운 상황이지. 아, 근데 왜 하필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 기억 안 나? 인터라마 때 나도 그 개자식 위에 있었잖아. 함대 감찰반 놈들 왈, 공작 나리의 ‘심각한’ 부상을 막지 못한 책임이 내게도 있다더군. 덕분에 나도 네 재판 다음 날, 테렌툼 군사 재판장에 출두했어. 다만, 알다시피 난 네 녀석과는 달리 몇몇 귀족분들과 친분이 있어서 재판은 겨우 면했고, 장교 숙소에서 근신 대기 중이었지. 아, 친구, 오해하지는 말라고. 나도 나름 그놈들을 이용할 뿐이니까. 어쨌든 그놈들을 통해서 너까지 빼내려고 나름 여기저기 손을 써 봤는데 내 줄이 황제의 처남까지 닿지는 않더군. 애초에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자체 상벌위원회도 며칠이나 걸리는 게 보통인데 무슨 군사재판이 하루 만에 열려? 미친 귀족 새끼들.
보이지 않는 친구를 향해 그가 슬쩍 웃었다.
“알아. 굳이 그런 말 할 필요는 없어.”
- 고마워. 어디까지 말했었지? 아, 당연히 난 네가 오늘 오전에 풀려날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영창 앞에서 마주하는 것보다는 오후 즈음에 장교 숙소에서 봐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갑자기 비상 신호가 울리더니 난데없이 네가 탈주했다는 거야. 그래서 네 놈 잡으러 이렇게 냅다 출항한 거고. 생각난 김에 좋은 소식 하나 알려주지. 출항 때 격납고 상황을 보니 즉각 출동할 수 있는 건 내 함선이 유일했어. 즉, 실질적으로 너를 제지할 수 있는 추격조는 내가 전부라는 소리야. 아마 나 다음으로 출항한 함선들은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어디 보자, 대충 약 18분 거리에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너 뱃짐들도 죄다 버리고 무진장 달렸으니 대충 22분 정도로 보면 맞을 것 같군. 이제 설명이 됐냐?
그때, 함장 앞으로 다가온 1등 비행사가 양 손가락으로 2과 3을 만들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를락, 이제 치르체 산맥까지 23분 남았어. 이렇게 계속 한가롭게 나랑 떠들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나중에 문제가 될 거야.”
- 끝까지 친구를 회유하기 위해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하면 되겠지 뭐. 녹음장치는 이미 고장 냈어.
“그건 다행이군. 그런데 아쉽게도 나도 이젠 시간이 없어. 저 앞에 보이는 무지막지한 쌘비구름들을 죄다 피해야 하거든. 통신 끊어야겠다. 아, 그런데…”
순간 막시미노는 말을 삼켰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질문을 돌렸다.
“우리의 귀염둥이 타르실라는 아직도 칼레포디오 백작 집 하녀로 일하고 있어?”
- 그래. 이제 4년 정도 됐군.
“결혼은 언제 할 건데?”
-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실은 내 진급식이 끝나면 정식으로 프러포즈하려고 했어. 그런데 말이야…
제를락 역시 조금 전 막시미노가 했던 고민을 시작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당연히 두 가지였다. 친구를 격추하거나, 혹은 놓아주는 것이다. 전자를 선택할 경우 제국군 최연소 대령이 되어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게다가 명령이라면 친구조차 격추하는 충성심까지 증명된다. 잘하면 그동안 이룬 공적까지 인정받아 무려 ‘작위’를 하사받을 가능성까지 있는 달콤한 선택지다. 후자는 제를락에게 있어 가장 참혹한 결과가 예상됐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친구의 탈주를 방관한 명령 불복종자가 되어 진급은커녕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될 것이다. 적당히 싸우는 척하며 그를 놓아주는 방법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지금 이 순간도 자동 기록장치가 함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녹음장치를 고장 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인지라 손을 쓸 수도 없고, 적당히 주고받는 교전이었다는 것을 독사 같은 함대 감찰반이 놓칠 리 없다. 사실 그는 이 모든 가능성을 출항할 때부터 고민했고, 이미 유일한 해결책을 제시한 터였다. 서로 큰 상처가 남겠지만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내 제안 아직 기억하겠지? 네가 먼저 쾅 쏘고 내가 추락하면 돌아와서 구조하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최선이다. 잘 생각해 봐. 그나마 여긴 형식적이나마 재판이라도 하잖냐? 듣자니 아이젠슈타트는 아무리 장교라 해도, 특히나 탈주는 절차고 뭐고 다 건너뛰고 바로 교수형이라고.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건 막아 줄게. 어떻게 할래?
괴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막시미노는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미칠 듯 안타까웠다. 힘든 판단을 친구에게 미뤄야 했다.
“미안해.”
그 말을 즉각 알아들은 제를락이다.
- 결국 결정은 내 몫인가?
“미안하다. 정말로.”
- 친구 잘못 만난 죄치고는 너무 가혹하군.
“알아.”
아래쪽으로부터 긴장 섞인 보고가 있었다.
“치르체 산맥 도착까지 17분 전.”
“정면의 쌘비구름 도달까지 11분. 약 9분 후 자기장의 영향권에 들 것으로 예상함.”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제를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 들리냐?
“잘 들려.”
- 결정했다.
막시미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그의 목소리에서 답을 들었다.
“사관학교 모의 함선 전투 때 누가 더 많이 이겼더라?”
- 12승 9패. 네가 더 많이 이겼지. 다만 통상적으로 강습전함과 대공전함의 일대일 교전 시 강습전함의 승률을 7할 정도로 잡더군. 문제는 상대가 너라는 건데, 역시나 결과는 까 봐야 알겠는데?
“그러자고. 부디 무운을 빈다, 제를락.”
- 안 됐지만 나는 내 무운을 빌 거야. 이런, 운을 내가 다 가져버렸네? 히힛!
“운 따위는 좋을 대로 해. 하지만 우리가 닻을 내릴 곳은 여기가 아니야.”
- 3분 후 시작한다. 아, 너무 짧은가? 5분으로 하지. 12시 39분. 시계 맞추기 귀찮으니까 그냥 내가 먼저 움직인다.
“알았어. 결혼 축하한다. 타르실라에게 안부 전해줘.”
- 그래, 너도 꼭 성공해라. 치르체, 그까짓 거 확 넘어버리라고. 성공하면 역사책에 이름이 오를 거야.
“이 봐, 방금 우리가 주고받은 말, 굉장히 이상하다는 거 알아?”
- 대충 좀 넘어가자. 끊는다. 이상.
“이상.”
- 아, 마지막으로. 지옥에나 가버려, 이 얼간이 친구야. 오줌을 지리게 해 줄 테니까. 이상.
“다시 태어나거든 감자나 키워. 이상.”
- 크하하핫! 진짜 이상. 이상!
헤드셋을 내려놓고 막시미노는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헤아릴 수 없는 격정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고, 눈 주위가 찡했다. 결국,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이건 슬픔이 아니다. 물론 기쁨은 더더구나 아니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그 무엇이다.
‘해 보자고. 친구.’
선내 통신기를 든 그가 몸을 일으켰다. 이미 함교의 모든 병사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통신기 버튼을 눌렀다.
“전 덱핸드들에게 알린다. 전 덱핸드들에게 알린다. 함장이다. 잠시 후, 본함은 후방의 강습전함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다. 다시 한번 알린다. 본함은 후방의 강습전함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다. 본함으로 치르는 마지막 교전이 될 것이고, 그에 걸맞은 막강한 상대와 싸울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제군들도 익히 알고 있는 제국 최강의 강습전함 함장이자 ‘가운데 용’으로 알려진 제를락 중령이다. 현역 벨라트라이 제국군 함장 중 가장 많은 적함을 격침한 실력자로,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상대보다 빠르고 맹렬하게 덤벼들 것이다.”
간간이 들렸던 함장의 은밀한 통신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실제로 이름이 발표되자 함교에는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보통의 상대가 아닌 만큼 날쌘 움직임이 필요하다. 1초라도 먼저 발견하고, 1초라도 먼저 대응하고, 1초라도 먼저 쏘는 쪽이 승리한다. 반드시 ‘적함’을 격추해 뒤통수를 맞는 일이 없도록 한다.”
함장의 열띤 목소리의 덱핸드들 모두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다. 눈조차 깜빡이는 이가 없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함장이 친구를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을 알고 있다.
“귀관들 모두 내 명령에 따라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총동원해 주기 바란다. 귀관들의 실력을 믿는다. 전원 자리로. 이상!”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 한꺼번에 올렸더니 안 올라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