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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옥자(2017) - 봉준호가 선사하는 우아한 난장 동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던 작품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어린 소녀 미자와 함께 키워진 슈퍼돼지 옥자가 다국적 기업에 의해 뉴욕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당황했다. 봉준호가 넷플릭스로부터 600억이라는 제작비를 전액 투자받아, 틸다 스윈튼-제이크 질렌할 등 해외 유명배우들과 함께 찍는 신작 영화가 고작 ‘뉴욕으로 온 강원도 슈퍼돼지 구출기’라니, 이게 뭔가. 아마 봉준호가 아닌 다른 감독의 작품이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감독이 봉준호라면 얘기가 달랐다. 봉준호라면 황당한 얘기를 황당하지 않게, 뻔한 얘기를 뻔하지 않게 풀어낼 능력자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다. 결국 <옥자>에 대한 기대는 '봉준호'라는 브랜드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떨칠 수 없는 한 가지 우려는 있었다. 그 불안감의 핵심은 이른바 ‘우습지 않을까’라는 걱정. 제아무리 봉준호라지만 시놉시스 자체가 너무 황당했고 영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다국적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힘을 합친 이 거대한 글로벌 프로젝트가, 결국 시덥지 않은 결과물로 우스운 평가를 받고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말의 불안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런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품고 관람한 작품이 <옥자>였다.
Good과 Awesome의 사이에서
결론부터 말하면, 봉준호는 이러한 '우스움'을 '경박한 우아함'으로 승화시켰다. Good, Bad, So so 중 고르라면, <옥자>에 대한 내 소감은 굿(Good)이다. 하지만 어썸(Awesome)하지는 않다. <살인의 추억>과 <마더>를 봉준호의 최고작으로 꼽는 입장에서, <옥자>는 <괴물>보단 다소 아쉽고 <설국열차>보다는 더 나은 정도. 내 느낌은 그랬다. <옥자>는 좋다. 하지만 끝내주는 작품은 아니다. 한마디로
["<옥자>는 어썸(Awesome)하진 않다. 하지만 '디렉터 봉'의 연출력만큼은 어썸(Awesome)하다."]라는 것이 <옥자>에 대한 내 평이다. <옥자>도 <옥자>지만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봉준호의 연출력이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는 점이다. 이제는 누구도 봉준호를 말릴 수 없게 됐다. 그 정도 수준이다.
봉준호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관객들을 결국엔 끝끝내 설득해낸다는 점이다. 그가 펼쳐내는 이야기에는 물음표가 거의 없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그럴만하다.’라는 설득의 지점을 절묘하게 이끌어내며 이야기를 앞으로 착착 전진시키는 그의 영화에는 몰입을 방해하는 억지요소가 없다. 아니, 설령 있다하더라도 관객이 설득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그의 탁월한 장기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강에서 괴물이 출몰하는 이야기’에, ‘엄마가 아들을 위해 살해하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몰입했다. 이점에서는 <옥자>도 마찬가지인 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쟤네 왜 저러지?’, ‘에이, 이건 너무 억지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뉴욕으로 온 강원도 슈퍼돼지 구출기’라는 황당무계한 스토리가 자못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관객의 한사람으로서 주인공의 상황에 깊게 감정이입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더불어 이야기의 이음새와 구멍을 메우는 그만의 디테일도 여전하다.
아주 단적인 예로 ‘강원도 시골의 꼬마 소녀가 뉴욕의 맨하탄으로 어떻게 넘어오게 될까?’에 대한 궁금증과 의구심은 누구나 품을 수 있다. 나는 미자(안서현)가 시골집에서 금돼지를 허리춤에 숨겨서 집을 나설 때, ‘저 금돼지를 팔아서 비행기 값이랑 여행경비를 마련하려나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방법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곤 미자가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일단 비행기 값을 포함한 돈 문제가 가장 시급할 텐데, 미란도 회사가 미쳤다고 미자를 공짜로 비행기에 태워 미국으로 데려오겠는가?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돼지를 팔아서 미국으로 건너간다’는 설정은 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우선 그 어린 꼬마애가 사기당하지 않고 금돼지를 어디 가서 누구에게 팔 것이며, 설령 어떻게 해서 무사히 목돈을 마련했다 치더라도 여권 문제, 비자 문제, 영어 문제, 미국 현지 숙박과 교통 문제 등등을 어떻게 다 해결하고 맨하탄의 미란도 본사까지 쳐들어갈 것이냐는 얘기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천신만고 끝에 옥자와 조우한 미자가 사람들 몰래 컨테이너 박스 구석이나 옥자 입 속에 숨어들어가서 함께 비행기 짐칸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순진한 방법도 떠올려봤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다. 그렇게 몰래 숨어들어 공항의 검사를 피해 비행기에 타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설령 어찌어찌 컨테이너 짐칸에 동승한다고 쳐도 미국 현지에서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내 상상의 범위 내에서는 어떤 방법이든 무리수 없이 미자가 태평양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봉준호의 방식
하지만 봉준호는 달랐다. 그는 내 예상을 뒤엎고, 옥자를 구출하는 ‘ALF(동물해방전선)’의 습격씬을 뉴욕이 아닌 서울을 무대로 해서 배치한다. 나는 당연히 옥자는 뉴욕으로 건너가고, 미자가 어떤 방법을 써서든 뒤따라 뉴욕으로 따라가고, 그런 상황에서 뉴욕에서 ALF가 미자를 만나 함께 옥자를 구출하는 그림을 생각했다. 이게 가장 무난한 시나리오 아닌가?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놀랍게도 ALF를 서울 한복판으로 소환한다. 그리고는 서울의 도로와 명동 지하상가 한복판에서 옥자의 구출을 위한 일대 소동극을 펼쳐낸다. 더불어 이 서울 한복판에서의 소동극 또는 난장씬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이다. <괴물>의 메인 OST '한강찬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경박한 배경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명동 지하상가에서의 추격/구출씬은 긴박하면서도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감 넘친다. 마치 봉준호가 이 장면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영상과 음악의 흡입도와 완성도가 뛰어나다. 특히나 마취총을 앞세운 미란도 코리아의 용역직원들과 ALF 단원들이 몸싸움을 펼치는 '다이소씬'이 인상적이다. 갑자기 우아하게 바뀐 배경음악(John Denver의 'Annie's Song') 아래 펼쳐지는, 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처연한 느낌의 슬로모션은 서울 시퀀스의 화룡점정이라 할만하다.(여담이지만, 간신히 지하상가를 빠져나온 옥자 일행이 ALF 트럭을 찾으며 "B! B2!"라고 외치는 모습은 <괴물>의 병원 지하주차장 탈출씬에서 송강호 일행이 외치는 "B4! A3!"에 대한 깨알 같은 오마주이다.)
어쨌든 이 서울에서의 '옥자 구출 시퀀스'를 통해 봉준호 감독은 세 가지를 성취한다. 그 첫 번째는 서울의 도로 위를 활보하던 거대 동물을 떠올리며 이 영화의 제작을 결심한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영감, 즉 이 영화의 단초가 된 봉감독의 첫 상상을 영상으로 구현해낸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마치 <괴물>에서 펼쳐지는 한낮의 한강공원 습격씬처럼, 관객의 예상을 깨부수는 서울 한복판에서의 슈퍼돼지 난장씬을 통해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호강시켜준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 내적으로 이 소동으로 인한 언론의 보도와 미란도 회사의 주가하락을 통해 미자를 미란도 그룹에서 직접 뉴욕으로 데려오게 만든 이야기의 완결성 측면. 결론적으로, 내 예상처럼 미자가 홀로 비행기 티켓을 끊게 만들거나, 옥자의 입속이나 컨테이너 속에 몰래 숨어들어 같이 비행기 짐칸에 타는 등의 쉽고 얕은 수를 봉준호는 쓰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봉준호의 클래스는 다르다.
이렇듯 강원도에서의 옥자와 미자의 행복한 한 때, 그리고 죠니 박사(제이크 질렌할)의 인상적인 방문과 함께 이어지는 산골집에서의 '애니멀 매직' 촬영씬,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옥자의 추격/구출씬까지. 영화 <옥자>의 하이라이트는 대부분 전반부에 포진해있다. (마치 '교실 칸 진입'까지의 전반부가 <설국열차>의 백미인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쨌든 극의 중반부 이후 무대가 뉴욕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영화는 톤이 무겁게 바뀌며 색을 갈아입는다. 전반부 한국에서의 펼쳐지는 재기발랄하고 동화적인 이야기와 다르게 뉴욕씬에서는 옥자가 지하 실험실과 도살공장으로 끌려가게 되면서 ‘현대자본을 통해 잠식되고 산업화된 생태와 자연의 현실’이 드러난다. 다만 봉준호가 영리한 점은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이 각각의 캐릭터와 세력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옥자를 애완동물처럼 아끼는 미자도 매운탕과 닭백숙 등의 육식을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일 뿐이고, 미란도 그룹의 CEO인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도 일방적인 악인이 아닌, 나름의 도덕성과 귀염성(?)을 지닌, 미워할 수 없는 오너로 그려진다. 극 중 옥자를 구출하고 미란도 그룹의 비밀을 폭로하려고 하는 ALF도 절대선으로 그려내기 보다는 무언가 우스꽝스럽고 이율배반적인 면모를 동시에 드러내며 그들조차도 관객들이 한걸음 떨어져서 때로는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다만 그럼에도 ALF의 입장에 조금 더 동조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데에는 배우 폴 다노의 눈빛과 아우리가 큰 몫을 한다.)
어쨌든 봉감독은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에두르지 않고, 비교적 간결하고 쉽게 전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살장에서 옥자를 구해내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씬에서 들리는 공장 안의 총성과 우리 속 수많은 ‘옥자들’의 울음소리. 완전한 해피엔딩도 아닌, 그렇다고 배드엔딩도 아닌 이 장면이 결국 이 작품의 주제 또는 감독의 목소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이 현재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 작품의 전반적 정서의 바탕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필버그의 느낌이 녹아있고,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에는 팀버튼이 한 스푼, 관조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태도에는 코엔형제가 한 방울 섞여있는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봉준호는 봉준호다. 할리우드식 가족영화의 외피를 두른 이야기를 경쾌하게 비틀며 관객에게 불편함을 선사하고 글로벌한 정서와 한국적 공기를 절묘하게 결합시키는 능력. <옥자>에서도 그의 쌔끈한(?) 연출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경박하고 우아한 동화
결국 이 영화는 걸작을 목표로 스스로를 갈아내며 천신만고 끝에 탄생한 작품이 아닌, 감독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거대자본을 등에 업고 영리하고 천진난만하게 펼쳐낸 일종의 ‘난장(亂場) 동화’에 가깝다. 애초부터 <살추>, <마더>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 한마디로 <옥자>는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처럼 경탄과 전율을 여운처럼 남기는 영화가 아니다. 깨알 같은 유머와 흥미로운 상황들로 무장한 재미와 적당한 불편함과 고민거리를 선사하는 대신에, 무겁게 들여다볼 심연은 깊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영화는 쉽고 솔직하다. 즉, 요리로 치자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값비싼 메인코스요리가 아닌, 해외 한식 맛집에서 먹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퓨전 한식의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옥자에는 봉준호 특유의 ‘여운’이 없는 대신에 ‘경박한 우아함’이 있다. 이 점은 보기에 따라선 아쉬움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또 반대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쿨한 장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난장 동화’의 일면이 이 영화의 성취이자 한계라면, 오히려 더 큰 아쉬움은 이른바 ‘수습의 과정’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기존 봉준호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그 어떤 문제를 펼쳐놔도 그 수습의 과정이 무척이나 매끈하고 매끄럽다는 점에 있다. 개연성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설득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많은 한국영화들의 문제점이 초반부에 일은 그럴싸하고 멋지게 벌려놓고 그걸 수습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고 아등바등하다 끝난다는 데에 있다. 이른바 용두사미식 마무리. 그런 면에서 보자면 봉준호는 이른바 ‘수습의 거장’이다. 달인 수준이 아닌 거장의 칭호를 붙여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수습의 과정에서조차 관객들에게 ‘수습한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격적 수습’. 가장 대표적으로 <괴물>을 떠올려보자. 영화 초반, 대낮에 한강에서 괴물이 출몰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결국 이 황당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키고 수습하느냐가 이 영화의 관건이었다. 하지만 봉감독은 방어적으로, 수세적으로 대응하기는 커녕 예상치 못한 전개로 오히려 관객들을 구석까지 몰아붙이며 공격적인 수습에 나선다. 관객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그저 봉준호의 화법에 빨려 들어간 상태로 숨죽이다 어느새 엔딩까지 당도한다. <괴물>이 그러했고, <살인의 추억>과 <마더>가 그러했다.
'옥자'의 아쉬움? 봉준호의 위엄
그렇다면 <옥자>는 어떨까? 강원도와 서울 한복판을 잇는 놀라운 전반부의 흐름에 비하면 뉴욕을 주 무대로 한 후반부의 흐름은 극의 텐션과 매력이 다소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답게 벌려놓은 것들을 잘 수습하며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 이정도면 선방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과거의 봉준호는 (<설국열차> 정도를 제외하면) 수습이라는 과정 자체가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하더라도 그게 노출되질 않았다. 그러니 선방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기억도 별로 없다. 일단 수세적 태도를 취해야 선방이라고 해줄 것 아닌가? 하지만 <옥자>에는 그 매끈한 수습의 과정이 관객의 눈에 명백히 드러난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마디로 이렇게 벌려놓은 이야기를 어떻게 매끄럽게 수습할지 골몰하며 머리 쓰는 소리가 후반부로 갈수록 화면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느낌이다.
어차피 영화의 후반부에 감독은 ‘대량으로 도축되는 미국의 도살공장 시스템’의 한가운데 옥자와 미자를(더 정확히는 관객을) 밀어 넣기로 결심한다. 그러니 맨하탄 행사장에서 옥자가 쉽게 쉽게 구출되고 해피엔딩을 맞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면 너무 밋밋하고 허탈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극의 흐름대로 미자는 미국의 도살공장까지 찾아가게 되고 이곳에서 옥자와 마주하게 되는데, 여기서 옥자를 구해내는 과정 또한 무언가를 가까스로 수습해낸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사실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뻔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우리 안의 동물들을 전부 풀어주고 옥자의 등 위에 올라탄 채로 낸시 미란도를 박치기로 날려버리고 시원하게 사이다 드링킹하듯 탈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박찬욱처럼(?) 협상을 차분하게 결렬시키고 그 자리에서 별일 아니라는 듯 옥자를 차갑게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언가 나름의 연출적 타협점을 찾아내고 출구를 찾아야하는 상황에서, 봉감독은 금돼지를 꺼내든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하게 묘사된 냉정한 사업가 낸시 미란도를 상대로 금돼지 거래를 통해 옥자를 구출해내고 새끼 옥자와 함께 강원도로 돌아와 넷이 함께 살면서 작품은 마무리된다. 그런대로 선방한 느낌, 매끄럽고 깔끔한 마무리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엔딩에 이르는 과정을 뒤돌아볼 때 무언가 다소 아쉽다는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잘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봉준호라서’ 일까? 곰곰이 곱씹어보지만 그 아쉬움의 본질을 나도 정확힌 모르겠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참 우습다. 이야기를 어지럽히거나 우왕좌왕한 것도 아니고, ‘매끄럽고 깔끔하게 잘 수습했다는 점’을 약점으로 꼽고 앉아있으니, 이거야말로 봉준호의 위엄을 입증하는 꼴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황당무계하고 우스운 이야기를, 그럴싸하고 우습지 않게 선사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관객에게 뼈있는 질문까지 던지는 봉준호의 천재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계기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짓이 연예인 걱정’이라는 말처럼, 봉준호 걱정은 애초부터 하는 게 아니었다. 앞으로는 봉준호가 고추로 메주를 쑨다 해도 걱정하지 않을 요량이다. 그 시간에,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덧. 봉준호의 마리오네트처럼 꽉 짜인 캐릭터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100퍼센트 완수하는 틸다 스윈튼과 제이크 질렌할의 프로페셔널한 연기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프리롤처럼 뛰어노는 변희봉의 자유롭고 맛깔나는 연기가 맞부딪치는 씬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나마 죠니 박사의 싸인씬에서 제이크 질렌할과 변희봉이 살짝 연기의 합을 이루려다 마는데, 이렇게 국내외 명배우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연기의 날을 맞대는 장면이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