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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01 15:24
고구려 백제간 연계가 있다는건 둘이 연합해 당항성을 공격한 사건으로 알수있죠.
동맹이라고 하긴 애매하긴 하지만... 이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십자외교중 세로축이죠.
17/07/01 16:27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흥미로운 인물은 윤충입니다. 당시 격전지였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목베었을 정도라면 백제군의 총사령관일 텐데, 이후 기록이 없죠;; 이 부부의 시체는 무려 5년 후 백제 장수 여럿과 맞교환될 정도의 가치가 있었으니, 이들을 목베는 것은 왕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허락이 있었을 테죠.
흔히 백제 말기 두뇌의 대명사로 성충과 흥수가 꼽힌다면(삼국지 원소 멸망기의 전풍과 저수 느낌) 무력 에이스는 계백이 아니라 윤충이었을 텐데 말이죠. 일설에는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신라군을 막은 거고(처자식을 베어죽인 이유에 대해서는 계백이 의외로 젊을 가능성도...아들이라면 종군시켰을 테니까요) 또다른 병력이 당군과 싸웠을 거라 보던데 그럼 이게 윤충일지도 모릅니다. 대야성전투 때 항복한 신라장수들은 김법민(훗날 문무왕)이 처형한 기록이 있으니, 윤충을 가만 놔뒀을리 만무한데... 기록이 없으니 참 답답하죠. 옛날 사극 '삼국기'에서는 윤충에게 백제 말년의 에이스다운 인상적인 마무리를 선물합니다. 백제 멸망 후 나당전쟁을 수행하던 신라군중에 결사대를 이끌고 잠입, 무열왕의 목을 땁니다(...) 그리고 자결했던가 싸우다 죽던가, 여튼 최후를 맞이하죠. 이때 윤충이 무열왕(누군지 기억안남)의 목에 칼을 겨누며 "백~제의 넋이요."라던 대사가 떠오르네요.
17/07/01 16:39
헉 수정하는 사이 댓글이^^; 정도전에 조민수 역으로 나오셨던 김주영씨더라고요. 성충이 김갑수씨... 용의눈물은 구할 수 있던데 삼국기는 너무 오래 되서ㅠ 볼수 없으니 아쉽습니다.
17/07/01 17:13
김갑수씨가 삼국기에 나왔었군요. 전혀 기억 안나는데 흐흐흐
그리고 무열왕 역 배우가 기억 안날만도 한게 송영창이어서.... 이후 나올 수가 없었죠.... 김유신 역을 맡았던 서인석씨가 이후 사극에서 승승장구했던 것과 비교하면 참 씁쓸합니다.
17/07/01 16:56
평범하게 그 전에 죽었을 수도 있죠. 실제로 백제군 주력은 당군을 요격했다가 전략 미스로 그냥 박살나버리는데 윤충 쯤 되는 인물이 이 부대를 이끌었다면 기록이 남았을겁니다.
17/07/01 17:20
현경(顯慶) 5년(당 고종 660), (황제가) 태원(太原)에 행차하는데 수행하였는데, 황제가 명하여 웅진도대총관(熊津道大總管)을 제수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하게 했다. 소정방이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웅진강 입구(熊津江口)에 이르렀는데, 적들이 군대를 주둔시키고 강에 웅거하고 있었다. 소정방이 (강의) 동안(東岸)에 올라, 산의 지세를 이용해 진을 치고, 적과 크게 싸웠는데, (수군의) 올린 돛이 바다를 뒤덮고 계속 이어져 왔다. 적의 군대가 패바하였는데, 죽은 자가 수천명이오, 나머지는 스스로 달아나 흩어졌다. 조수를 만나 또 올라가는데, (전함의) 고물을 연이어 강에 들어오고, 소정방은 강안 위에서 진영을 끼고 있으니, 수륙으로 아울러 진군하는데, 노를 빨리 저으며 북을 쳐 고조시키고, 곧바로 도읍으로 향했다. 도성과 20리 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적이 온 나라를 기울려 와서 항거하는데, 이와 크게 싸워 대파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1만여 명이나 되었고, 추격하여 성곽에까지 들어갔다-구당서 소정방전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있는데 윤충이 이 백제군을 이끌었다면 당서에는 기록이 안남았어도 삼국사기에는 남지 않았을까 싶네요.
17/07/01 17:55
오~ 굉장히 자세한 기록이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백제군 지휘관 이름이 없는게 아쉽네요. 계백 같은 경우도 장군이 아니라 문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17/07/02 00:28
고구려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나라는 참 위치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17/07/02 00:39
지난번 눈시님 글에 댓글로 달았지만 이미 고구려 입장에선 답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나라 시절 요동원정에서의 대굴욕으로 체면을 구긴 입장에서 당은 이미 고구려를 손보려고 마음을 먹은 입장이었고 신라와 백제는 서로 중국에 고구려를 쳐 달라고 일러바치는 형국이니 고구려의 국력으로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정치체계가 강력한 중앙집권이 아닌 5부족 연맹체의 귀족중심체계라 힘을 모으기도 힘들었을거라 보고 그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정변은 그마저도 많은 세력이탈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 수나라 대부터 당태종의 침입까지 대륙에서 대군이 몰려오면 모든 들판의 곡식들은 다 아작이 나고 전국의 성인남자들은 군사로 차출이 되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을 리가 없고 한두번이나 호국정신으로 목숨바쳐 막아내지 그런 침입이 계속 되면 제 입장이라도 질려서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17/07/02 00:46
저도 처음에는 당에게 온건책을 폈던 대수전쟁의 전쟁영웅 고건무(영류왕)의 정책(어찌보면 굴욕 외교죠.)이 의아스러웠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이 어쩔 수 없으면서도 가장 현명한 정책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요동에 천리장성을 쌓고 나름 최악의 상황을 준비했으니까요.
삼십만의 별동대를 살수에서 수장시켜버렸는데도 다음해에 어마어마한 전력으로 다시 쳐들어오는 수를 보며 그는 이미 상대가 안될거라는걸 직감했다고 봐요.
17/07/02 01:57
일단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안하는 게 1순위에 요동 방어선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백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668년 고구려 멸망, 670년 당의 대비천 전투 참패와 안서사진 함락, 675년 매소성 전투.... 국제정세를 등에 업고 신라도 당을 몰아냈는데 고구려가 딱 10년, 아니 5년만 더 버텼으면 모르지 않았을까요.
17/07/02 00:29
저 때 백제가 합천 대야성을 얻고 당항성까지 함락했을 때 당이 나서서 함락했던 당항성을 포기했었죠. 아마 중간에 당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쩌면 신라가 백제에게 수도가 함락당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전 한국사기에서 본 내용인데 26대 성왕이 나제동맹에서 배신을 당하고 옥천싸움에서 신라의 노비출신 군사에게 허무한 죽임을 당하죠. 그리고 그 유골이 금성(경주)의 궁궐 계단 밑에 묻힌다는 얘기를 듣고 꽤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의자왕은 아무래도 그런 과거의 역사인식이 투철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역사에게 만약이란 없지만 그 때 백제가 신라를 제압했다면 지금쯤 일본과 우리나라는 같은 나라까진 몰라도 굉장히 절친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17/07/02 08:33
일반적인 중학생 수준에서 저 부분을 이해하려면 저 부분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여제동맹'이어야만 합니다.
교과서도 그렇게 유도되어있고, 문제지 학습지는 더하니까요. 그래서 대범하게 고구려와 백제를 선으로 잇고 "여제동맹!"이라하니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 학교선생님이 "여제동맹 아닌데?"라고 했다해서 놀림받기 전까지는요. 눈시님 글 잘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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