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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26 22:07
유주자사 진의 묘나 동수의 묘 같은걸 보면
고구려가 중국에서 넘어온 망명객들에게 상당한 대우를 해주었다는걸 알수있죠 특히 유주자사 진의 묘는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묘중 내실이 가장 큰 묘이기도 하고요 그 당시 남북조시대중국을 보면 출신보다는 실력을 우선시 했던 시대이고요 신라의 김유신 또한 대표적인 아웃라이어 였고요 을씨였다고 하기에는 고구려시대에 활약한 을씨들이 많은데(을파소,을두지) 그런 을씨들 기록상에는 을지(乙之)가 아닌 그냥 을(乙)씨로만 표기되어있거든요 을지문덕만 을지로 표기하고 나머지 인물들을 을로 표기하는데 을지문덕을 을씨라고 하기엔 그런것 같습니다. 을지문덕의 출신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 타민족 출신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할것 같지 않습니다.
17/06/26 22:07
강감찬 장군이 나중에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끌면서 이 살수대첩을 응용했을까요?...
역사에서 배운다... 을지문덕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네요...
17/06/26 22:23
살수대첩하고 귀주대첩은 양상이 완전 다르죠
살수대첩은 퇴각하는걸 뒤쫒은것이고 귀주대첩은 퇴로를 막고 정면승부 한것이죠 귀주대첩 과정에서 흥화진 전투가 도강 할때 친것이고요 귀주대첩 자체는 전형적인 회전입니다.
17/06/27 17:57
어헣헣 (...) 귀주대첩도 수공이라는 건 제법 많이 퍼진 얘기예요 '-'a;;; 모르시더라도 망신까지는;
그거와 별개로 을지문덕이 꽤나 유명인물이었으니 (삼국사기 열전에도 김유신 다음으로 나옵니다) 연구 많이 했겠죠. 흥화진 전투도 그렇고
17/06/26 22:30
장거리원정을 보낸다면 별도 치중부대를 편성해서 군량 수송을 시키는게 원칙인데..개개병사들에다 군량을 짊어지고 보내니 ..단거리도 아니고 그들 출발지가 북경 근처라 하든데 그 먼거릴 발로 걸어서 가야 했으니 참 인색한 수양제 결정이고 수나라군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엿을검니다 (본문이 좀 이상한점은 당시 수나라군이 별도 물자수송 부대원이 200만명로 추정해서 수나라측 총 병력이 300만명대 라던 말이 잇던데 ??) ..하튼간 본문대로는 물자도 인력도 풍부한 나라가 왜 그렇게 군량 수송을 한건지는 이해가 힘듬니다..그리고 수나라군 진격로 인근이 해변이라 지리적으로 해운이용이 효과적이고 해군 병진으로 제해권 장악후 선박의한 군량 수송만 해내도 군량 부족은 안 겪고할것인바...이래저래 기획 단계에서 실패로구먼요..그런데 대략 1500여년후 벌어진 일본군의 임펄 공략 실패의 원인이 이거 하고 비슷하군요
17/06/26 22:41
북경에서 요동까지는 물자수송부대가 있었고요
요동성에서 지체가되고 함락할 기미가 안보이니까 30만의 별동대를 따로 꾸린것이죠 요동에서부터 활로를 확보하지 않고 고구려영내를 진입한 별동대는 물자 보급받기가 어려우니까 개별적으로 딱 평양에 도착할 식량만 가지고 간것이죠 대신에 수군이 군량을 보급할예정이였고요 그런데 수군 장수 내호아가 욕심이 나서 단독으로 진격하다가 퇴패해서 철수하고 평양까지 진격한 수의 별동대는 군량을 보급 못받아서 철수한것이고요
17/06/26 22:59
요동지역 고구려 성을 그냥 두고 뒤에다 놓고서 수군 본진이 진격햇다면 고구려측이 난감하고 대응이 어려웟을검니다..본진하고 전방 돌격부대랑 간격을 크게 벌려놓고 한거가 수군측 작전 실패요인이고..고구려군이 용이하게 각개격파를 시킬수가 잇었죠..수나라 해군이 군량 수송위한 상륙도 그런데 30만 별동대 후미에서 해변지점 상륙이 제일 좋은 위치 엿겟죠
17/06/27 18:00
그 시대로 보면 수륙협공을 딱딱 맞춰서 하는 건 정말 어려웠을 겁니다. 연락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공 쫓아서 평양성 공격한 게 문제였죠
17/06/26 22:44
요하강하고 압록강 사이 요동 지역에 포진한 고구려 요새들 주요 성들은 당시 수나라군이 함락을 못시킨 상태 엿죠,,고구려 국방의 핵심이 이들 성곽 엿는데 그러한고로 수나라군은 그 전쟁에서 이미 실패가 결정난거라 진배 없던게죠...내호아 별동대가 평양성 함락한들 고구려측는 함경도 같은 동부 험산지로 대피하구서 여전히 항전 햇을검니다,,불굴의 의지가 충만된 이들이가 고구려인들이죠 ..사실 수나라 침공시기가 고구려 국력이 전성시대이니 고구려가 이길만도 했죠
17/06/26 22:56
우리 고대사 역사는 거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중국측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건가요? 땅속에 묻혀 있는 재밌는 고대역사가 많이 있을텐데 생각할수록 안타까워요. 물론 공부하는 학생들은 피곤하겠지만요 흐흐
17/06/26 23:19
고대사 전공(일단 현재는)중인데 진짜 문헌사료 부족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 갖는 주제인 5세기 영동지방도 그렇고..으으..
17/06/27 01:31
기록매체의 문제이기도 하겠지요. 당시 기록매체는 종이나 비단, 죽간이 주였고 금석문은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고구려나 백제는 망한 왕조이니 싸그리 불타버렸고, 후속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중국식의 관례도 정착이 안 되었을 때였을 테니까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경우는 기록매체가 불에 구운 점토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기록이 당시기록 그대로 남아있는 희귀한 케이스 입니다. 기록매체로 무엇을 썼느냐가 역사기록이나 후대전승에 미치는 영향은 무지무지하게 큰 것 같습니다.
17/06/26 23:56
글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사실 중국 통일왕조와 고구려의 싸움은 인구 상으로나 물자 상으로나 상대가 안될 여지가 많은데 고구려가 기적적으로 너무 잘 싸우지 않았나 그리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는 고구려 입장에서 과거에 중국쪽에 두 번이나 수도가 떨어지고 선대왕조들의 무덤이 파헤쳐진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 후손 대대로 대륙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나라 입장에서는 백십삼만에 보급병까지 삼백만을 끌인 전쟁에서 방심이란 존재하지 않았을거라 봅니다. 하지만 오호십육국을 지나면서 왕조가 교체되고 그 사이에 요동을 치는 경험은 사라져서 경험부족에 의한 실패가 가장 컸을거라 보고(보급품을 짊어진 삼십만 별동대는 초무리수였죠. 그 상황에서 이미 수나라는 이성을 잃었다 봅니다.) 그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대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칠 수 있지 않았나(물론 당태종의 실패도 교훈이 됐겠지만요.) 그런면에서 제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건 그겁니다. 대륙이 혼란스럽고 고구려가 잘 나갈 때 왜 백제와 신라, 가야를 복속하지 못했느냐의 문제이죠. 반도의 특성 상 반도를 평정하면 후방의 부담이 없고 그 물자와 인구를 바탕으로 중국과 경쟁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물론 이건 제 판타이지입니다. 인구적으로나 거리 상으로나 쉽지는 않았을거라 봅니다. 어찌보면 그 당시엔 제후국으로 삼고 여기는 우리땅 했을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 때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우리나라 자체가 중국에 동화됐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말이 꽤나 일리있더군요. 암튼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 있어 굉장히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었나 싶긴해요. 기회가 된다면 안시성이나 집안같은 곳으로 고구려 역사기행 다녀오고 싶네요.
17/06/27 00:00
그쪽 지형이랑 경제력이 생각보다 만만찮지요. 나제동맹의 효과도 있고.... 신라 쪽은 특히 소백산맥이 상당히 천연 방벽의 역할을 했습니다.
17/06/27 11:44
네 동의합니다. 고구려가 땅은 넓었지만 인구는 백제와 거의 같았다는 얘기를 본 적 있네요. 전력상으로도 통일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을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전쟁을 위한 남쪽 정벌은 국운을 걸다시피해야 하는 모험이라 생각들긴 합니다.
17/06/27 18:05
정말 잘 싸웠죠 '-' 요동 방어선이 저렇게 막강했던 것부터가 말씀하신 과거의 기억을 잘 살린 것이겠구요.
고구려의 통일은 어쩔 수 없었다고 봅니다. 광개토대왕도 남쪽에 집중하다 후연에게 후방을 털렸었거든요. 광개토대왕이 일찍 죽긴 했지만 죽기 전 몇 년 동안 영토 유지로 돌아섭니다. 서쪽은 중국의 통일 전부터 상대하기 버거웠고, 남쪽에 집중할 수도 없는데 나제동맹까지 맺었으니...
17/06/27 01:33
여수전은 어떻게 보면 현대전의 독소전쟁의 7세기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침공군에 맞서 수도 근처까지 털리다가 자연, 그리고 침공군 자체의 약점을 활용해서 역관광시킨다는 점에서요.
17/06/27 09:07
신채호 선생님이 극찬하던 을지문덕의 위엄이란.... 저런 영웅의 정체를 하나도 알 수가 없다는 게 큰 비극입니다. 항상 느끼지만....
17/06/27 11:39
중국 백만대군을 물리친 영웅이 되었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모함을 받고 역사 자체에서 제거되지 않았을까 예상해 봅니다. 전 역사를 통틀어봐도 그런적이 너무나도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신이나 신변잡기에 대한 기록 등등 티끌하나 나오지 않는건 사실 이해하기 힘듭니다. 중국을 상대로 승리한 영웅인데 말이죠. 뭔가 굉장히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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