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쟁패기 시절 당대인들이 보여주는 극도의 현실주의적, 단순적나라한 면모에 대해서는 가볍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런 면모는 이 시대 전반을 통틀어서 굉장히 자주 보여지는데, 다름 아닌 유방의 부하들이 '유방이 승리한 이유' 에 대해 언급할떄도 그렇습니다.
고조가 낙양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말했다.
“제후들과 장수들은 짐을 속이지 말고 모두 마음을 이야기해보라.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가? 또 항씨(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는 오만하셔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부려 성과 땅을 공략하게 하여 항복시키면 그것을 나누어 주어 천하와 함께 이익을 함께 합니다. 항우는 어질고 유능한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공을 세우면 해치고 어질면 의심합니다. 싸워 승리해도 그 사람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땅을 얻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까닭입니다."
高祖置酒雒陽南宮. 高祖曰:「列侯諸將無敢隱朕, 皆言其情. 吾所以有天下者何? 項氏之所以失天下者何?」高起、王陵對曰:「陛下慢而侮人, 項羽仁而愛人. 然陛下使人攻城略地, 所降下者因以予之, 與天下同利也. 項羽妒賢嫉能, 有功者害之, 賢者疑之, 戰勝而不予人功, 得地而不予人利, 此所以失天下也.」
유방의 부하들은 항우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를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 해서" 이고, 유방이 승리한 가장 큰 이유를 "유방은 쏴줄 때는 크게 쏴줘서" 라고 언급합니다. 말하자면 유방의 부하들은 맹목적인 충성 이런것보다 '유방이 자신들에게 무언가 떡고물을 줄 것' 이라는 아주 계산적인 '이득' 을 생각하며 그를 따랐고, 실제로 유방이 이를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힘껏 싸웠고 여타 인재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유방의 면모와 대비되어 '항우는 통이 크지 못하다' 는 인식 역시 있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러한 현실주의적 태도는 단순히 당대의 유력한 정치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계(思想界)에도 제법 폭 넒게 적용된 듯한 모습입니다. 이미 현실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법가 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유가들마저도 엄청난 현실영합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은 그런 사례들을 한번 보도록 해봅시다.
1. 유경(劉敬)
한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고, 이는 유경이라는 인물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유경은 이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어 사상적으로 어떠한 학파였는지는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숙손통과 같은 열전으로 사마천이 묶었다는 점으로 볼때 유학자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유경은 수도를 장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의에서, 과거 주 왕조 시대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巻蜀漢, 定三秦, 與項羽戦滎陽, 爭成皐之口, 大戦七十, 小戦四十, 使天下之民肝脳塗地, 父子暴骨中野, 不可勝數, 哭泣之聲未絶, 傷痍者未起, 而欲比隆於成康之時, 臣竊以為不侔也. 且夫秦地被山帯河, 四塞以為固, 卒然有急, 百萬之衆可具也. 因秦之故, 資甚美膏腴之地, 此所謂天府者也. 陛下入関而都之, 山東雖亂, 秦之故地可全而有也. 夫與人鬥, 不搤其亢, 拊其背, 未能全其勝也. 今陛下入関而都, 案秦之故地, 此亦搤天下之亢而拊其背也.」
황제는 누경에게 만나고자 한 이유를 물으니 누경이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낙양에 도읍을 하셨는데, 그것은 주(周) 왕실과 융성함을 견주려고 하신 것입니까?”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
누경이 말했다.
“폐하께서 천하를 얻으신 것은 주 왕실과는 다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后稷)인데, 요(堯)임금이 그를 태(邰)에 봉해 그곳에서 덕을 쌓고 선정을 베푼 지 10여 대가 지났습니다. 공류(公劉)는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피해 빈(豳)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뒤 태왕(太王)은 오랑캐의 침략으로 인해서 빈을 떠나 말채찍을 잡고 기(岐)로 옮겨와 살게 되었는데, 빈의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를 따랐습니다. 문왕(文王)이 서백(西伯)이 되어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소송을 해결해주고 비로소 천명을 받자 여망(呂望)과 백이(伯夷)도 바닷가에서 찾아와 문왕에게 귀의했습니다. 무왕(武王)이 은 주왕(殷紂王)을 정벌할 때 미리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천하의 제후들이 맹진(孟津)의 해안가에 회합하니 그 수가 8백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 제후들은 한결같이 ‘주왕을 정벌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은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周公)의 사람들이 성왕을 보좌해 성주(成周)의 도읍을 낙읍(洛邑)에 건설했는데, 이는 낙읍이 천하의 중심으로 각지의 제후들이 조공을 바치고 부역을 바치기에 거리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낙읍은 덕이 있는 사람이면 왕 노릇을 하기가 쉽고, 덕이 없는 사람이면 쉽게 망할 곳이기도 했습니다. 무릇 이 낙읍에 도읍을 정한 것은 주나라가 덕으로써 천하의 백성을 이끌도록 한 것으로, 험준한 지형을 믿고 후세의 자손들이 교만과 사치로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없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나라가 흥성할 때에는 천하가 화합했고, 사방의 오랑캐들이 교화에 이끌려서 주나라의 의와 덕을 사모하며 모두 다같이 천자를 섬겼습니다. 그리하여 한사람의 병사도 주둔시키지 않았고, 한사람의 병사도 싸우지 않고서도 팔방 대국의 이민족들이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주나라에 조공이나 부역을 바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퇴해지자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분열되었고, 천하에 입조하는 제후들도 없었으며, 주나라는 그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덕이 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형세가 쇠약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풍(豊)과 패(沛)에서 일어나 3천명의 군사를 모아 진격해 촉(蜀)과 한(漢)을 석권하시고, 삼진(三秦)을 평정하시고, 항우(項羽)와 더불어 형양(滎陽)에서 교전하시고, 성고(成皐)의 요충지를 장악하시기 위해 70차례의 큰 전투를 하시고 40차례의 작은 전투를 치르셔서, 천하의 백성들의 간과 골을 대지에 뒹굴게 하시고 아버지와 자식의 뼈가 함께 들판에 뒹굴게 하신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입니다.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형편인데 주나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와 융성함을 비교하려 하시니, 소인은 아직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진(秦)나라의 땅은 산에 에워싸여 있고 하수(河水)를 끼고 있어 사면이 천애의 요새로 견고하게 막혀 있어, 비록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있더라도 1백만의 군사를 동원해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진나라의 옛 터전을 차지해 더없이 비옥한 땅을 소유한다면 이것이 이른바 천연의 곳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 도읍하신다면 산동(山東)이 비록 어지러워도 진나라의 옛 땅은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싸울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으면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함곡관에 들어가셔서 도읍하시고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시는 것이 바로 천하의 목을 조르는 것이며, 천하의 등을 치는 것이옵니다.”
이 내용에서, 유경은 흡사 여타 다른 유가들처럼 주나라를 "싸우지 않고도 천하를 평정한" 이상세계로 묘사합니다. 주나라를(실제 주나라와는 별개로) 이상 세계로 묘사하여 이를 규범으로 삼는 건 후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유경은 주나라를 그러한 이상세계로 묘사하면서도, "주나라의 덕을 따르자" 는 식의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유경의 말을 간단하게 줄이자면 이렇습니다. "주나라는 덕이 있어서 방어하기 힘든 낙양에 수도를 세우고도 오래갔지만, 싸움만 많이 한 유방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해도 가능이나 하겠는가?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낙양 대신 장안을 수도로 내세우는데, 그 이유는 "관중이 물산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방어하기 좋으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함곡관을 틀어막고 버티면 된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건 초창기 전한이 장안을 수도로 삼은 것은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목적으로, 만약 유방이 제후들의 반란 진압에 실패했으면 최소한 옛 진나라 영역이라도 건지자 는 흡사 최후의 방주 같은 느낌의 선택이었다는 것이고...
한무제 이후만 되었더라도 '이 지역은 천하를 태평히 바라볼 수 있고 그 물산도 풍부하여' 정도의 레토릭으로 치장햇을텐데, 이 때는 그냥 그런 거 없고 '황하와 산맥으로 둘러싸여 뭔 일 생겨도 충분히 시간 끌면서 근왕병 기다리면 그만이고, 안쪽에서 문제가 생겨도 함곡관 틀어막으면 관중은 보전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재기 가능' 이라는 논지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2. 숙손통
이 시기의 가장 유력한 유학자 중 한명이었던 숙손통은 극한의 현실주의적 처세가라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일부러 이세 황제에게 아첨하듯 말을 하여 목숨을 건진 일과, 초한전쟁 기 유방에게 등용 된 후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은 수하의 유가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추천하지 않고 전쟁에 도움이 될 장사들만 추천한 일 등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당대의 처세가 중에 한명이었겠지만, 학문을 적용하는 부분에서도 그렇다는 게 재밌습니다.
초한전쟁기 동안 유학자들 대신 싸움 잘하는 건달들이나 추천했던 숙손통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한왕은 이제 바야흐로 시석을 무릅쓰고 싸워 천하를 다투고 있는 중이다. 너희들은 그런 싸움을 능히 수행할 수 있는가? 그래서 먼저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들을 천거했다."
어차피 유학자는 전쟁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유학자인 본인의 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후대라면 덕이 강한 사람이 전쟁에서도 이기고... 이런 소리를 할텐데, 그런 말이 전혀 없습니다. 후대에서도 안 나올 현실주의임은 물론이고, 그보다 고대인 공자나 맹자의 시대에도 함부로 못할 이야기 입니다. 숙손통이 당대에서도 극히 현실영합적인 사람이긴 하겠지만, 여하간 초한전쟁기라는 특수한 시대의 독특한 유가의 한 태도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어찌되었건, 그 '유학자가 쓸모가 없는' 전쟁이 모두 끝난 후, 숙손통은 유방에게 유가의 규범으로 조정의 의례를 삼아보라 권합니다.
'무릇 유자들과는 앞으로 달려가 무엇을 빼앗아 오는 일은 못하지만 수성은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유방이 "내가 그런걸 하긴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 고 난색을 표하자, 숙손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왕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고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고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즉 까짓거 예법 따윈 시대에 따라 변하니까, 굳이 어렵게 하거나 옛날 흉내 내려고 할 것도 없이 대충 이 시대에 맞게 적당히 하면 된다 는 겁니다.
말 그대로 대충 가라로 모양새나 흉내내자... 는 것으로, 유학자인 몸으로 사이비 짓 하자고 대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례를 하자고 권한 동기도 그렇지요. 유방이 초기에 엄격하지 못한 군신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정치적인 목적에서 '우리 유가를 어디 마음껏 이용해보시라' 라고 권하며 그와 동시에 유학의 지위상승을 노리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유가들에게 무수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당대에도 "옛 법을 어기려 들다니, 말도 안된다. 당신 마음대로 해라." 라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훨씬 후대에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도 "숙손통 같은 사이비가 이런 짓을 하는 바람에 예법에 큰 상처를 입혔다" 며 분개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 사마천은 "뭐 어차피 길이란 다 구불구불한 법이다." 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습니다만...
앞서 말했듯이 숙손통에게 반발하며 그를 적대시한 유가들이 있는 등 모든 유가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진 않았지만, 실제 전한의 중추에 들어와 근본을 잡은 유가는 이렇게 극도로 현실영합적인 존재들이었다는게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육가
숙손통의 경우는 '유가의 지위 상승을 위해 설사 학풍을 변질시켜서라도 적용한다' 는 '정치적인 목적' 에서의 현실 영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육가의 경우는 말 그대로 '사상적인 면모에서 현실 영합적인' 당대 유가의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가는 진나라 말기의 폭정과 초한전쟁기로 인한 대혼돈 속에서, 적어도 문장 쪽에서는 가장 독보적인 문장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기록조차 있습니다.
「劉氏初興,書唯陸賈而已;子長述楚、漢之事,譬夫行不由徑,出不由戶,未之聞也。」
"유씨가 처음 일어났을 때, 글을 아는 이는 오직 육가 뿐이었다."
"육가가 초, 한나라 사이에 벌어진 일을 (처음) 기록하기 시작했을 떄, (누군가 써놓은 글이 없다시피 하여) 마치 가려해도 길이 없고, 나가려해도 문이 없는 것과 같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사통 中
여기서 "글을 아는 사람이 육가 뿐이었다" 건 정말로 육가 말고는 문맹이었다는 것보다도, 제대로 된 거대한 저작을 남길만한 사람이 육가 뿐이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육가라는 인물에 대한 제일 유명한 일화는 역시 이것입니다.
「廼公居馬上而得之, 安事詩書!」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나에게)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陸生曰「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
육생은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高帝不懌而有慚色, 廼謂陸生曰:
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試為我著秦所以失天下, 吾所以得之者何, 及古成敗之國.」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역생 육가 열전 中
이렇게 유방이 부탁한 내용을 육가가 적어올린 책, 바로 신어(新語)라는 책입니다. 육가는 순자의 제자로 알려진 부구백(浮丘伯)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육가 또한 초나라 사람이고 초나라는 순자의 학문적 영향력이 강했으므로, 이 신어를 읽어보면 순자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동시에 신어에서는 '논어' 의 영향력도 보이는데, 논어의 인용구나 논어의 주장 역시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법가와 도가의 영향도 있어서, 순자의 '인의' 를 주장하는 동시에 '왕도' 를 주장하면서도 법가와 도가의 모습을 보이는 뒤섞인 학문을 보여줍니다.
이 『신어』에서 가장 압권인 구절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道近不必出於久遠,取其致要而有成。春秋上不及五帝,下不至三王,述齊桓、晉文之小善,魯之十二公,至今之為政,足以知成敗之效,何必於三王?故古人之所行者,亦與今世同。立事者不離道德,調弦者不失宮商,天道調四時,人道治五常,周公與堯、舜合符瑞,二世與桀、紂同禍殃。
도는 가까운데 있으니, 굳이 요원한 먼 옛날에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핵심만 취하면 바로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춘추는 위로 오제를 언급하지 않았고, 아래로 삼왕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제환공 - 진문공 등의 작은 선정과 노나라 군주 열 두 분의 정치적 공과를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근거로 성패의 효험을 충분히 알 수 있느니 뭐하러 먼 삼왕까지 들먹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이 하는 행위도 오늘날의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사업을 벌이는 사람은 도덕을 떠나지 않았으며, 현악기를 조율하는 사람은 궁 - 상의 음조를 잃지 않았습니다. 천도는 사시의 균형을 잡고, 인도는 오상의 질서를 관리합니다. 주공과 요순은 하늘로부터 상서로운 징조, 즉 부명을 받았고, 진 2세와 걸 주는 하늘로부터 징벌의 재앙을 받았습니다. ─ 신어 사술편
현실중시적인 태도로 인해, 유가사상가들이 전통으로 피력하는 '삼왕' 마저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차피 도는 똑같은데, 뭐하러 굳이 그런 옛날 이야기까지 들먹일 필요 있나?" 하면서 부정 합니다.
그 뒤의 구절도 인상적이긴 매한가지입니다.
故良馬非獨騏驥,利劍非惟干將,美女非獨西施,忠臣非獨呂望。今有馬而無王良之御,有劍而無砥礪之功,有女而無芳澤之飾,有士而不遭文王,道術蓄積而不舒,美玉韞匵而深藏。故懷道者須世,抱樸者待工,道為智者設,馬為御者良,賢為聖者用,辯為智者通,書為曉者傳,事為見者明。故制事者因其則,服藥者因其良。書不必起仲尼之門,藥不必出扁鵲之方,合之者善,可以為法,因世而權行。
좋은 말이 기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리한 검이 간장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녀가 서시만 있는것도 아닙니다. 충신이 태공망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도 좋은 말은 있지만 왕량만한 말몰이꾼이 없으며, 예리한 검은 있지만 고운 숫돌에 가는 노력이 없으며, 미녀는 있지만 흰 분 검은 눈썹의 치장술이 없으며, 훌륭한 선비는 없지만 문왕 같은 분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세상을 경영할 도술을 지녔음에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름다운 옥이 갑 속에 깊이 감추어진 형국 입니다.
그러니 도를 품은 사람은 그에 맞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하고, 박옥을 가진 사람은 기술자의 가공을 기다려야 합니다. 도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발휘되며, 좋은 말은 훌륭한 말몰이 꾼을 만나야 능력을 발휘하며, 현자는 성인을 만나야 제대로 쓰이며, 변론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소통되며, 경서는 깨친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전파되며, 사리는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밝혀집니다.
따라서 일을 관리하는 사람은 해당 규칙을 지켜야 하고, 약을 먹는 사람은 처방에 따라야 합니다.
좋은 책이 꼭 공자의 문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며, 좋은 약이 꼭 편작의 처방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도에 합치하는 것이면 모두 다 좋으며, 모범으로 삼을 수 있으며, 세상의 변화에 따라 잘 저울질 하여 권력을 행사하면 됩니다. ─ 신어 사술편
실로 압권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 육가는 "좋은 것이 하나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제대로 쓰여지는게 더 중요하다" 면서, '어디 좋은 것이 공자의 계통에서만 나오겠나? 여러가지 중에서 적당히 세상 변화에 따라 게중에 잘 골라서 쓰면 된다. 결과적으로 좋으면 다 좋은거다' 라고 말합니다.
육가가 공자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유가들처럼 신어에서도 '공자에 이르러 오경과 육예가 정해지고 문명이 집대성 되었다' 는 식의 구절이 있습니다. 즉 공자가 대단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꼭 공자가 아니더라도 쓸만하면 쓰자... 라는 것입니다. 아직 유가 내에서도 공자의 신성화가 덜 진행된 시점이라 이런 언급이 나온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만이 당시 사상계의 전부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게중에서도 이렇게 상당히 직설적으로 접근한 몇 몇 사람들의 태도는 지금에 와서 보기에 재밌는 모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