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시대는 특별한 그룹이었다. 물론 대 아이돌 시대의 포문을 연 것은 원더걸스였고 누구도 그 업적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홍대 게릴라 콘서트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텔미 텔미 테테테테테 텔미를 열창할 때 이 기세라면 곧 세계 평화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더걸스는 미국을 정복하지 못했고 사그라들었다. 9명이나 되는 소녀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처음엔 어려웠지만, 그녀들은 빠른 속도로 대한민국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누구의 팬인가가 문제였지 소녀시대의 팬이 아닐 수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윤아로 시작해서 태연, 티파니를 거쳐 유리에 도달했고, 친구는 언제부터인가 순규를 좋아했다. 나는 아직도 순규에 대한 팬심은 없지만, 그가 순규를 좋아한 것에는 어떤 필연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학원의 어떤 여자아이를 끊임없이 좋아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진 못했다. 그리고 순규는 그 여자 아이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 순규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은 현실에서도 순규를 닮은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을 것이고, 순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손에 잡힐 것 같은 현실감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는 노무현 대통령이 죽고 20여 일 후 죽었다. 그 관계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시기적인 관계만이 그와 대통령이 연관 검색어로 떠오르게 한다.
친구가 죽은 여름, 소원을 말해봐가 나왔다. 나는 눈물이 많지 않고, 이미 그맘때쯤에는 내 안의 모든 눈물이 다 흘러나온 후였다. 나는 담담하게 소원을 말해봐 뮤비를 수없이 보았고, 내 친구가 너무 빨리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살았으면 소녀시대의 명곡이 하나 더 나왔을 텐데 왜 바보같이 빨리 죽어버렸을까.
어쨌든 나는 할 일을 해야 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말하자면 눈을 치우는 종류의 일에는 어찌 됐든 실력이 있었다. 물론 눈을 굉장히 치우기 싫어하고, 더디게 치우는 편이었지만, 결국 눈을 치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실적이 있었다. 친구는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친구가 살아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자주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노무현과 모든 소녀시대, 모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를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했다.
그리고 AOA의 심쿵해를 들었을 때 이 노래는 정말로 굉장해서 2015년에 나온 모든 노래 중 최고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아츄라든지 뭐 그런 노래들도 굉장했지만 심쿵해는 정말 엄청났다. 그리고 그 밑에 어떤 외국인이 댓글을 단 것을 보았다. AOA는 ‘anti commit suicide’ or ‘to live alive’의 기능을 한다는 댓글이었다. 친구는 아직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는 살아서 AOA를 보았어야 했고, 카오스에서 끝날 게 아니라 롤을 했어야 했다. 적혈귀를 좋아했던 그 친구는 아마도 리븐이라든지 야스오 같은 걸 잘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살아있는 게 좋았다.
Produce 101을 보았다. 이렇게 예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경쟁한다. 혹자는 이를 너무 노골적이며 잔인하다고 비난한다. 물론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헬조선에서는 수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기 위해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고, 그 현실은 눈을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녀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다. 너무 나태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며 무언가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는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뽑으며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그리고 역시 설현이 최고라고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굉장했던 그녀들을(태연이라든가 수지같은) 다시금 떠올린다.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죽은 것처럼 살던 내가 이제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동생들을 위해 꼭 이기고 싶다는 이해인(SS)을 보면서 같이 롤을 한다면 이해인 같은 사람에게 미드를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를 위해 이기고 싶다는 바램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이를 통해 최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냥 버스나 타면서 만족해선 안 된다.
언젠가는 무슨 글인가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었고, 최근 며칠간의 생각이 모였다. 살아남아야 새로운 AOA의 신곡을 들을 수 있고, 새로운 걸그룹을 볼 수 있고, 더 재미있는 게임을 할 수 있고, 남아있는 사람이 오롯이 그러한 것들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소녀시대를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건 기분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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