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선비 하면 많은 이들이 떠오를 겁니다. 위인부터 간신, 청렴결백 같은 좋은 이미지랑 그저 꼬장꼬장한 이미지까지... 참 다양하죠. 조선시대를 많이 얘기했던만큼 이 선비들에 대해서도 참 많이 얘기했었죠.
그 시작이라 할 건 역시 정도전, 어느 정도 얘기하긴 했지만 아쉽긴 합니다. 정말 시작이나 다름없는데도 분류가 좀 다르죠. 흔히 생각하는 선비의 이미지와는 좀 다르니까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으니 느낌이 다를수밖에 없죠. 여기에 태종에 의해 반역자로 찍힌데다 사림들은 기존의 것을 지키는 선비에 더 어울리는 정몽주를 받들었구요.
하지만 그런 선비들이 지배하는 세상인 조선을 만든 게 바로 그였습니다. 공식적으로 말 못할 뿐 그를 받드는 이들 역시 많았구요. 언젠가 한 번 더 쓰고 싶은데... 언제가 될 진 모르겠군요.
그 외에 격동의 조선 초기를 이끌었던 하륜이나 세종의 충실한 노예였던 (...) 황희, 맹사성, 훈구파의 시작이라 저평가되는 감이 많은 신숙주 등등... 조선 초기를 장식한 이들이 많습니다.
조선의 시대구분은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치세력으로 본다면 역시 훈구와 사림이 교체될 때를 잡아야 될 겁니다. 이게 어느 한 순간은 아니죠. 왕만 해도 김종직이 처음 출사한 세조 때부터 선조 때까지 참 기니까요. 참 많은 사림들이 훈구파, 외척들과 싸웠고 죽어갔으며, 끝내 승리합니다. 이황, 조식, 기대승, 이이 등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쌓은 이들이죠.
사림 집권 후 바로 붕당이 시작됐고, 류성룡부터 이항복, 이덕형, 이원익 등이 유명하죠. 광해군 집권 후에는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이 득세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주로 서인, 이 때 유명한 건 역시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립일 겁니다.
이후 서인의 중심으로 송시열이 떠올랐고 남인에는 윤선도, 허목 같은 대항마들이 떠오릅니다. 숙종의 환국 속에서 대립이 격화, 다들 사이좋게 죽습니다. (...) 이 과정에서 서인은 노소론으로 분리되고 노론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끝내 승리, 조선 후기 유학자의 상징이자 노론 독재의 상징으로 남습니다.
이후 중후기를 가를만한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니 바로 세도정치입니다. 순조 때로 잡지만 이 역시 이전부터 끼가 보였습니다. 숙종도 김석주 같은 외척을 중용했고 탕평을 내세웠던 영정조도 외척에 힘을 실어주었으니...
환국의 과정에서 나온 끝 없는 당파싸움과 세도정치라는 암흑기, 근대로 흘러가던 흐름 등으로 조정에 있던 이들보다 정약용 등 실학파가 더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류가 될 수 없었죠.
세도정치 때는 그냥 다 썩었다 수준으로 취급됐지만 (...) 그래도 유명한 이들은 있었습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와 이항로, 기정진 등 유림의 거두, 그리고 최익현 등이죠.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유학자로는 최익현이 마지막일 겁니다. 꽉 막히고 시대에 뒤쳐지긴 했는데 그래도 자기 가치관과 애국심은 확고했다 이런 느낌으로 말이죠.
+) 노론부터 지금까지 기득권이 바뀌지 않았다는 말이 웃긴 이유 중 하나가 이거죠. 최익현부터가 노론이었는데요. 위는 위대로 아래는 아래대로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조선을 지배했던 유림은 몰락합니다. 누구는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거나 그걸 지원했고, 누구는 옷을 갈아입고 민족자본가/친일파로 평가가 갈리는 길을 걸으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했고, 누구는 지역 유지로나마 남았고, 누구는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 하고 몰락해 갔죠.
자. 위에서 당연히 들어가야 되는데 빠진 사람이 한 명 있죠?
조선 중기부터 정권을 잡은 사림파, 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정권 잡자마자 당파싸움 하고 양란 겪고 그러고도 싸우고 결국 세도정치로 이어지고 어쩌고... 뭐 이런 인식 때문이죠.
http://uncyclopedia.kr/wiki/%ED%95%9C%EB%82%98%EB%9D%BC%EB%8B%B9_(1997%EB%85%84)
뭐 백괴사전이야 모든 걸 비틀어서 쓴다 하더라도 이런 인식을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들이 이른바 "수꼴"의 원조라는 것 말이죠. 기득권을 꿰차고 다른 건 모두 역적 내지 이단으로 몰고, 자기들끼리도 밥그릇 싸움만 하며 시대가 흘러도 옷만 바꿔 입고 계속 기득권을 유지했다는 식으로요. 영남과는 참 거리가 멀었던 노론이 영남 정권으로 이어진다고 할 정도면 말 다 했죠.
헌데 아예 반대의 말도 있습니다. 이른바 "입진보"의 원조가 이들이라는 것이죠. 탄압받다가 승리했고 (거기다 한 사건의 재평가를 위해 싸우다 승리했고 그 사건의 역적들은 열사로 바뀌었고) 승리한 다음에 하는 걸 보니 결국 밥그릇 싸움에 어쩌고... 뭐 이런 식이죠.
이런 식이니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 하면서 대입하는 게 영 싫습니다. 끼워맞추기 나름이거든요. 비슷한 모습 보면 그게 본질이고 다르면 뭐 시대적 차이니까 무시해도 될 부분이 되는 거죠 뭐. 그렇다고 역사 연구하는 걸 그냥 재미의 영역으로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지금 제 수준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문제겠죠.
잡설이 길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들어가보죠. 이 사건을 통해 승리 직전까지 갔던 사림파는 몰락했고, 훈구에 이어 유교 사회에 있으면 안 되는 외척들의 집권을 겪은 후에야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사림 집권 후 이 사건은 완전히 재평가 됩니다. 역적으로 몰려 숨죽여 살던 후손들에겐 오히려 자랑스러운 명함이 됐죠.
+) 대표적으로 장군님ㅠㅠ 역시 마찬가집니다. 헌데 어떤 드라마에서는 이걸로 역적 가문으로 취급받았다고 나왔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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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후 조선은 뭔가 크게 바뀔 것 같았습니다. 최소한 연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나아졌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중종반정의 공신, 정국공신의 수는 어마어마했습니다. 1등 7명에 2등 13, 3등 30, 4등 50명이었죠. 애초에 반정의 주역부터가 연산의 측근이었고 그들이 갖지 못한 정통성만큼 많은 이들을 끌어들입니다. 참 뒤늦게야 참가한 이들도 있었고, 공신들이 자기 가족들을 끌어들인 경우 역시 많았습니다. 연산군이 모두가 버릴만큼 막장이었다는 뜻도 되지만, 절대악을 쓰러뜨렸다 해서 딱히 절대선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죠.
이런 신공신들에게 줄 보상을 다 어디서 마련해야 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연산이 가지고 있던 것을 주면 되죠. 다시 말하면 연산이 뺏은 것들은 원주인에게로 돌아가지 못 합니다. 다 공신들이 챙겼죠. 이것도 힘든 상황에서 천재지변도 일어나고 왜변도 다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아래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저런 놈들도 공신이 되는데 우리는 왜 아닌가/혹은 우리는 왜 못하냐는 거였죠. 나머지 하나는 그런 공신들의 자격을 정면으로 따지고 드는 거였구요. 어느 쪽이든 공신에 대한 불만을 공유하고 있었죠.
가장 먼저 터진 건 김공저(의원), 박경(서얼)의 옥사였습니다. 이들은 박원종, 유자광 등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합니다. 남곤부터 조광조까지 얘기는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만 딱히 소득은 없었고 결국 유숭조가 배신, 고변했죠. 중종 2년이었습니다. 주모자로 몰린 이들만 죽고 나머지는 대충 유배만 보낸 후 바로 풀어줬고, 알면서도 뒤늦게야 말 한 남곤의 경우 상까지 받습니다. 훈구파들이 딱히 일을 크게 키우려 하지 않았다는 거죠.
역모 사건은 계속 일어납니다. 이번엔 전라도에서 거병, 연산군을 몰아내려 했던 이과였습니다. 공신들은 그의 요청에 공신에 끼워넣으려 했지만 대간들이 반발, 격이 떨어지는 원종공신이 됐고 이에 또 다른 반정을 노린 거였죠. 그들이 왕으로 삼기로 했던 진성군은 사사됩니다. 중종은 이를 고변한 노영손부터 사건 조사를 맡은 이들까지 새로 공신으로 만듭니다. 그들 자신조차도 반대했는데 말이죠. 20여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됐죠.
그러고도 1년 뒤에 다시 옥사가 일어납니다. 역시 공신 책봉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거였죠.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운 법이죠. 4차례의 반정 중 가장 힘이 약했던 중종, 역시 힘도 없고 정통성도 없었던 훈구파들, 중종 초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뭐 그만큼 새로 계획을 짜던 이들도 딱히 대단한 건 없었긴 했죠.
이렇게 무력을 동원한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을 동원한 이들이 있었죠. 연산군이 그리도 싫어하던 대간이었습니다. 대간은 유교 정치의 필수요소였고, 연산군에게 그렇게 핍박받은만큼 그들의 발언권 역시 되찾을 수 있었죠. 이들의 말을 안 듣는다? 연산군 같이 되냐는 말 듣기 딱 좋았으니까요.
중종반정 직후부터 이들은 공신 책봉을 문제삼습니다. 박원종 같은 핵심은 건드리지 못 했지만요. 애초에 연산군 타도라는 근본적인 걸 반대하지 못 하는 이상 못 하는 거일 겁니다. 야사들을 봐도 핵심 공신들은 성격은 좀 안 좋고 문제는 있었어도 반정한 건 옳다는 식으로 쓰여 있죠. 대신 이들이 잡은 건 다른 이들이 공신이 될 자격이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특히 연산군 초기에 잘 놀았던 유자광이나 인척이라는 이유로 2, 3등이 됐던 이들이 대상이었죠.
유자광은 이런 대간들의 반대로 유배됩니다. 핵심 공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버림받았죠. 그들이 보기에도 유자광을 안고 가는 건 무리수였거든요. 참 한 시대의 풍운아였던 유자광은 이렇게 유배돼 쓸쓸히 죽음을 맞습니다.
이후에도 이런 반대는 계속됩니다. 위의 역모들도 이런 분위기에 그나마 있는 것도 더 뺏길까 싶어 일어나는 식이기도 했죠.
중종은 이런 데 소극적이었습니다. 애초에 공신들이 앉혀준 왕자리였습니다. 신하들에 의해 왕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앉은 게 자기였던 거죠. 그들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습니다. 이는 그의 결정 전반에 걸쳐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신중하게 가면서 모두의 뜻이 이러니 이렇게 하겠다는 식이었죠.
이런 면으로 인해 중종은 참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됩니다. 뭐 대장금 덕분에 맛있다 맛있다 하는 왕으로 기억되기도 하죠 (...) 하지만 그의 치세 때 일어난 일들을 보면 절대 우유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죠.
정치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정말 어떤 정책 같은 것을 잘 짜는 것, 나머지는 아랫사람들을 잘 다루는 것이죠. 보통 이 둘이 혼용됩니다. 전자만이 정치력이라면 유비의 정치력은 꽤나 밑으로 떨어지겠죠. 유교 사회는 후자를 더 치기도 했구요.
전자는 일단 넘기고, 후자를 봅시다. 중종은 형 밑에서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을 견뎌냈습니다. 연산이 중종을 갈궜다는 얘기는 (진위여부는 몰라도) 여러 개 남아 있죠. 왕이 된 후에는 공신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위에 있든 밑에 있든 참 남의 눈치를 봐야 했고, 아랫사람들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력이 안 생길 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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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의 핵심 중 핵심으로 신하의 도를 넘을 정도의 사치를 부렸다는 박원종, 하지만 그는 죽음을 이기지 못 합니다. 중종 5년에 죽으니 불과 44세 때였죠. 여기에 역시 핵심 세력인 유순정은 중종 7년에, 성희안은 중종 8년에 죽습니다. 삼대장이 다 죽어버린 거죠.
그 뒤를 이을만한 정국공신 1등의 신윤무, 박영문은 의외로 쉽게 꺾여버립니다. 핵심들과는 달리 대간들의 탄핵에 파직되기도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무관이라서 만만하기도 했죠. 노비 정막개는 이들의 역모를 고변했고, 옥사로 죽습니다. 이걸 정막개가 정말 머리가 좋아서 한 치의 실수 없이 만들어낸 걸로 보기도 합니다. (인생역전은 했구요)
이렇게 공신의 핵심은 사라집니다. 나머지 공신들은 많았지만 정권을 흔들 정도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반면 대간들은 이들 중 일부를 공격할 순 있었지만 이들의 힘 자체를 흔들 정도의 일은 벌이지 못 했죠.
그런 가운데서 지각변동이 일어나니, 중종 10년이었습니다.
중종 10년 8월, 담양 부사 박상과 순창 군수 김정이 상소를 올립니다. 그 내용이 참 충격적이었죠.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옛 왕비 신씨가 물리침을 입어 밖에 있은 지 이제 거의 일기(12년)가 됩니다. 신은 그 당초의 연유를 상세히는 모르겠으나, 무슨 큰 까닭과 무슨 큰 명분으로 이런 비상한 놀랄 만한 일을 하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당초에 박원종·유순정·성희안 등이 이미 신수근을 제거하고는, 왕비가 곧 그 소출이므로 그 아비를 죽이고, 그 조정에 서면 뒷날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르지 못하게 자신을 보전하려는 사사로움을 위하여 폐위시켜 내보내자는 모의를 꾸몄으니, 이는 진실로 까닭도 없고 또 명분도 없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홀로 전하만의 허물이시겠습니까? 저 당초에 권세를 끼고 용사하던 신하의 죄는 죽여도 그 죄가 남습니다. 저 원종 등도 명분의 크기가 하늘과 땅처럼 분명하여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신수근의 딸로 폐비된 신씨를 다시 부르고 박원종 등을 벌주라는 거였죠. 타이밍도 좋게 대신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후의 인종)를 남기고 죽은 5개월 후였습니다.
+) 장경왕후의 평 자체는 정말 좋습니다. 엄마 닮았는지 인종의 평 역시 마찬가지죠. 하지만 엄마 잃은 인종을 위협하는 이들도 많았으니 여인천하에 나오는 경빈(그의 아들 복성군은 서자지만 나이로는 형)과 문정왕후였죠.
흥미롭게도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 왜 이제야 말하냐며 벌주라 했고 (실제 벌 줬고) 대신들이 감싸줍니다. (...) 이렇게 벌 줘야 되는 거 맞다 봐 줘라 하는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월 22일, 무시무시한 상소가 올라옵니다. 그 주인공은 8월 말에 과거에 붙고 11월에 관직을 제수받은 새내기 대간이었죠.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에 가장 관계되어, 통하면 다스려지고 평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하므로, 임금이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 공경 (중략) 아래로 여항·시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말할 수 있게 하나, 언책이 없으면 스스로 말을 극진하게 할 수 없으므로 간관(대간)을 두어 그 일을 맡게 하는 것이니, 그 말이 혹 지나치더라도 다 마음을 비워 놓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은 언로가 혹 막힐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박상·김정 등이 구언에 따라 진언하였는데, 그 말이 지나친 듯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어찌하여 다시 죄줍니까?"
+) 구언 : 재앙이 있거나 까고 싶은대로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런 과격한 말도 나왔겠죠. 물론 그대로 한다고 벌 안 준 적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마는 (...)
"신이 이제 정언이 되어 어찌 구태여 직분을 잃은 대간과 일을 같이하겠습니까? 서로 용납할 수 없으니 양사를 파직하여 다시 언로를 여소서"
그 때 벌주기를 청한 대간들이 언로를 열어야 함에도 오히려 막아버렸으니 파직하라는 거였죠.
중종은 이를 정승들과도 의논할 정도로 크게 봤고, 결국 조광조의 말대로 대간이 교체됩니다. 이에 대신과 대간들은 양쪽으로 나뉘었고, 언로보다 왕실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에 이장곤 등 그를 지지한 이들이 파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이런 말까지 나옵니다.
+) 이장곤은 먼저 일어날까봐 두려워해서 반정 일으키게 한 그 인물 맞습니다.
"이장곤·김희수 등이 언로를 위하여 논계하기는 하였으나 다 편벽됨을 면치 못하고 언로에 방해가 되어 뒤에 해를 끼치게 되니, 양편이 다 잘못이므로 다 갈아야 합니다"
둘 다 잘못이니까 둘 다 갈아야 된다는 거죠 (...) 결국 이조판서 안당은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근래
대관을 간 것이 이제 네 번입니다. 이미 갈렸던 자는 다시 천거할 수 없는데, 조정에 있는 관원 중에는 대간으로 합당한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반복해서 생각하여도 비망(추천) 하기가 어렵습니다."
(...)
대간을 네 번이나 갈아버리는 일을 벌인 후, 여론은 한 쪽으로 쏠립니다. 많은 이들이 박상과 김정을 풀어주길 원했고, 다음해 5월에 풀어줬으며, 11월에는 다시 등용하게 했죠.
그만큼 대간의 힘이 다시 커져갔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언로라는 다른 명분이긴 했지만 공신들 전체를 노리고도 무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죠.
그리고 이런 거대한 일을 일으킨 인물이 주목을 안 받을 수 없겠죠. 신하들은 물론 왕인 중종에게요.
그가 바로 조광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