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장편소설
공식 책 소개
아버지 없이 자란 세대가 아버지가 되는 방법!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이영훈의 소설 『체인지킹의 후예』. 아버지 없이 자란 세대가 살아갈 방법을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천천히 배워나가며 저마다의 상처를 극복하는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독특한 구성력과 ‘특촬물’이라는 생소한 제재로 지금 젊은 세대의 풍경을 담아냈다. 신예작가 이영훈이 선사하는 강렬한 여운과 신선한 박력이 돋보인다.
이야기는 보험회사 직원인 ‘나’가 암 투병 중인 연상의 여인을 만나 그녀의 아들 샘과 대안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갑자기 시작된 연애와 결혼으로 덜컥 아버지가 되어버린 ‘나’에게 자폐 증상을 보이는 샘과의 소통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이다. ‘나’는 샘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샘이 매일 밤 빠져 있는 특수촬영물 《변신왕 체인지킹》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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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없는 세대의 성장기]
열번째 책 이후의 소개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몇 가지 글을 쓰고, 다시 글쓰는 것이 빡빡하고 어려움을 느끼고. 몇 권의 다른 책을 돌다가 이번에는 이 책에 안착하였다. 그런데도 이 책을 한 호흡에 읽을 수 없었다.
이 책의 도입부에는 불치병환자가 나온다. 나는 어릴 적에 가시고기를 읽은 적이 었었는데, 당시에 느낀 그 불치병이 가져오는 가정에 대한 말도안되는 폭력적인 힘, 비극, 아픔, 슬픔, 가족애 등이 뒤섞인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상당히 멘붕을 했던 기억이 있다. 참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그 뒤로 불치병이 등장하면 죽음과 그것을 이루는 주변인의 괴로움이 몇 배는 현실처럼 가깝게 다가와서 쉽사리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의 도입부를 넘어가는데에는 조금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도입부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것들은 서브컬쳐의 향연이다. 이 작가는 30대 초반의 문예창작과 출신인데, 우리나라의 현대소설 작가중에서 서브컬쳐에 대한 높은 이해와 통통튀는 구성을 재현하는 작가의 수가 많지 않음을 생각하면 이건 꽤 반가운 내용이었다. 소설에 자신이 아는 반가운 내용들이 나오면 재미는 몇 배로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참 재밌다! 장르는 아마도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쉽고 노골적이다. 가령 철학이라면 정말 상식적인 겉핥기 수준인 필자가 보아도 어떤 캐릭터는 작가의 현대 포스트 모더니즘 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자신의 입을 통해 비유적으로 말한다. 해체주의, 그리고 옛날부터 이어져 온 인간이 의존한 전통적 철학 맥락의 분해가 가져온 현대의 사람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바라는 게 없어.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에게 무얼 바라면 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걸 어떻게 얻으면 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적이라도 있었으면. 차라리 싸우다 죽었겠지만 요즘의 우린 서로에게 너무 친절해. 느슨하게 따뜻하고, 적당히 좋아하지. 그러니 싸룰 수도 없어. 우리는 그저 남들이 그러는 것처럼 살고 있어. 영화와 만화와 드라마를 흉내내면서. 아버지도 없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고. 믿고 따른 진실도 없어. 신도, 철학도 아무것도 없어. 가진 건 그저 반복 학습된 찌꺼기야. 우리는 어디선가 있었던 이야기들의 흉내일 뿐이야. 비참한 소재의 처참한 패러디야.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와 나는, 우린.
“우리는 체인지킹의 후예야”』-본문 중에서
정말 노골적이다. 그러나 앞 뒤를 살펴보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설정한 캐릭터의 모습들과 상황들이 너무 딱딱 잘 맞아떨어져서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런 설교형 방식의 캐릭터가 등장하는것은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이 있는 편인데, 다행히 이 책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는 그저 강한 인력을 쫓아가는 사람일 뿐이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끌리는 인력을 받아들이는 거지. 줄이 가장 긴 곳에 선 거야. 너 같은 놈들은 언제나 있었어. 그런 놈들이 서로를 경쟁으로 몰아넣고, 남을 짓밟는 거야. 그래야만 자기 몫이 생긴다고 믿으니까. 그런 계산 밖에 못 하는 거지. 그런 놈들이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거야. 대체 왜 그러지?"』-본문 중에서
이런 문장만 보아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저 작가의 자기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극 중에 설정된 상황과 인물의 관계에 따라서 이 이야기는 굉장히 통렬한 비판으로 따라온다. 물론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 놓고, 그것이 서사와 맞물려 고개를 끄덕여지게 한다.
또한 이 책은 구성과 도구에 굉장히 많은 신경을 썼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가 꽉 짜여져있고, 마치 추리나 스릴러, 미스테리 소설처럼 모든 인물과 도구, 상황이 실타래처럼 꼬여있다. 버릴 소재가 없는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꼭 장점인 것만은 아니다.
소설은 현실의 거울이고, 가상을 비추어 주는 창이다. 소설이기에 허용되는 것이 있고, 소설이기에 개연성을 갖는 우연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 모든 것을 필연으로 담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 촘촘히 구성을 짜고 도구를 활용했다. 그런 것들이 충분한 개연성을 담보해 주었기에 소설상을 탈 수 있었을 테지만, 말하자면 그렇다. '너무 노골적이잖아.'
소설이라는 장르의 이야기는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삶은 줄기의 연속이지 잎사귀의 연속은 아니다. 때때로 어떤 잎사귀는 우연히 줄기의 방향을 바꾸지만 그 잎사귀가 모두 인과관계로 엮이거나 유의미한 재재로서 삶에 남겨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모든 잎사귀들, 주변것들이 어떤식으로든 주인공과 이야기속에서 한 자리씩 역할을 차지하게 하려 했다. 그것은 소설이기에 허용되는 개연성을 위한 허구들을 통해 당위는 확보하였으나, 읽는 이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꽉꽉 짜여져야 되는 인물인가? 혹은 사건인가?'싶은게 많다.
아마도 작가는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이 자신이 가진 등대의 부재-아버지, 혹은 인류에게 있었어야할 철학들에 대해-로부터 서로를 통해 모두 함께 각자의 성장을 이뤄내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서 모든것이 함께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유의미하게 남아있을 수는 없다. 조금만 그런 욕심을 버리고 주변부와 중심의 경계를 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철저하게 모든 소재들의 개연성을 추구하다보니 되려 극 전체가 약간 작위적으로 흐르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정말 재밌다. 문장의 리듬도 좋다. 감탄사를 자아낼만큼 이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원래가 철학과 출신에서 문창과로 넘어간 사람이라 그런지 이야기 전체가 철학비판을 비유하는 듯이 숨겨놓은 흐름도 재밌고 구성도 통통 튀면서 허접하지 않다. 캐릭터들의 매력도 상당히 좋고 소재도 너무 참신하다. -특촬물,오타쿠,인터넷 동호회를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카페 시삽, 그 인터넷 사회의 권력, 이혼가정과 불치병, 실패한 각본가 등- 이런 소재들을 흡입력있게 잘 엮어놨다는 것도 참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영훈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했는지는 모릅니다. 최선이 뭔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있는 힘껏 열심히, 꾸준히 썼습니다. 이 소설이 어떤 계절을 거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가는 앞으로도 많은 글을 써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책이 기대가 된다.
전체적인 평점은 4.4정도. 조금만 덜 노골적이고 조금만 더 우연성을 인정했다면, 이야기를 모두 꼼꼼히 의미를 만들어 완결지으려 하지 않고 몇몇 부분을 극 중에서 흘러가는대로 주변부에 넘어가게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재미면에서는 최근 읽은 책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즐겁게 읽은 책이었다. 불치병 부분을 넘어가자마자 남은 330여페이지를 한달음에 읽었으니까. 새롭게 나온 신인작가의 매력적인 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체인지킹의 후예'는 만족스러운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맘에 들었던 구절을 하나 소개드리고 싶다.
"마찬가지입니다. 실수죠. 우리는 모두 실수합니다."
...중략...
가만히 안을 바라보다 말고 영호가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짙었다. 가는 빗방울이 살짝 영호의 얼굴에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아니면 눈이 올 모양이다. 서너 번, 영호는 숨을 쉬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잦아들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내리고 영호가 안을 마주 봤다.
"이대로 비틀비틀 이어지는 거죠."
영호가 싱긋 웃었다.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요."
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원래 다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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