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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3/05/30 22:02:41 |
Name |
몽땅패하는랜 |
Subject |
나를 웃음 짓게 만든 프로 게이머-조정현 선수 |
안녕하세요, 얼마전 겜티비 3차 리그 관전평이라는 뒷북으로 인사를 드렸던 사람입니다. 답글 달아주신 분들에게 일일이 감사인사 못 드린 점은 미리 사과드립니다. 처음에는 당시 참여 프로 게이머 16인에 대한 단평으로 출발했었는데요, 타고난 게으름과 부족한 필력으로 지금은 기브 업 GG상태입니다.
하지만 불현듯 한 프로 게이머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서 피지알 게시판을 어지럽히는 잡글을 하나 또 올리게 됩니다.
사실 저는 흔히 말하는 냄비 팬입니다. 스타리그에서도 임요환, 이윤열등등 유명 톱 랭커가 아니면 그저 그런 선수들이겠거니 생각하는 초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당시 유명했던 선수들을 물리치고 결승에 오른 홍진호(전 무서운 신인이라고 생각했었던) 선수의 상대선수였던 조정현 선수에 대해서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몇자 적게 됩니다.
운영자이신 항즐이님께서(좋은 글 자주 올리셔서 감사합니다-아부는 아닙니다 ^^:::) 최인규 선수의 이미지를 멋있게 적으셨던 문장이 있었죠 “세상을 주유하는 낭인검객의 이미지”(이런 허접한 제 스타일의 편곡이 되어버렸네요 ㅠ.ㅠ)
이상스럽게 저 역시 조정현 선수를 보면 꼭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베가본드의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 그를 처음 본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당시 그의 소속이 무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에겐 조정현 선수 하면 무사시나 일본 바둑의 큰형님이었던 후지사와 슈코 같은 낭만검객, 또는 방랑무사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V-건담이라는 아이디나, 대나무류라는 독특한 그의 스타일도 한몫을 차지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의 외모도 미남형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오똑한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처음에는 흐미~~엄청 무섭게 생겼다,라는 거부감을 일으켰던),그리고 오로지 승리만을 추구하는 듯한 가난해 보이는 이미지(역시 무소속이라는 인상이 주는 것이 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가 그, 조정현 선수를 비운의 방랑무사라는 인상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케이블 티비를 신청 못하는 가난한 자의 슬픔이여~~~) 그때부터 이미 노장 게이머(말이 되나?), 1세대 게이머라는 이야기를 듣던 그였기에 저는 아마 이젠 은퇴햇겠거니,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앞서 제가 올렸던 겜티비 3차 리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그는 아직도 현역으로 동생뻘의 프로게이머들과 부대끼고 있었습니다. 슬럼프다, 예전의 프로토스 극강에서 모든 종족에 약해졌다,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예선전부터 참여했고 16강 티켓을 얻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 그의 육성을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이상스럽게 왕중왕전 파이널의 인터뷰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ㅠ.ㅠ)
어눌하다고 해야 할까요, 가라앉은 목소리 담담한 어조, 말끝마다 흐릿하게 떠오르는 수줍은 미소, 그리고 이제는 드림팀이라는 소속이 생긴 그에게는 지난 날 강적과의 일합을 앞둔 검객의 비장함보다는 그저 게임이 좋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이런저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즐기는 듯한 달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이젠 조정현이라는 게이머는 승부사라기보다는 낭만주의자로 변신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의 각진 얼굴에는 이제 여유로움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것도 좋을 것 같다. 무조건적인 승부지상주의보다는 저런 낭만도 게임계에 필요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열악한 게임계에서 과연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치 오랜 방황을 끝내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온 큰 형님같은 그의 모습은 저에게 적지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본선 제 1경기는 저그 대마왕, 일명 거만 저그 강도경과의 경기였습니다. 같은 원로급(?)게이머들의 경기.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중천에 이글거리는 태양이었고, 조정현 본인은 슬럼프 또는 완연한 하강세라는 평이 지배적인 경기였습니다, 저 역시 승패를 떠나서 조정현 선수 본인이 게임전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지더라도 만족할 수 있는 경기를 하고 싶다”라는 말에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가볍게 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2인용 맵인 엠퍼러 오브 엠퍼러에서 그는 언덕 전진 벙커와 팩토리를 구사합니다.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인 모험수를 구사한 것입니다. 물론 강도경의 유연하면서도 강력한 대처에 무산되고 이후 그는 승부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고 용전분투했지만 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묘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승부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승부사의 피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많은 그의 동료들이 게임계를 떠났고 그 역시 하락세라는 비정한 평가를 받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결과의 성패를 떠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승부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대단하다, 그리고 무섭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그 순간 저는 그에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비록 졌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는 조정현 게이머의 모습에서 실패한 거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패를 안고 격돌한 저그 군단 소울팀의 강자 나경보와의 사일런 맵에서의 경기. 테란이 암울하다는 섬맵에서 그는 마침내 대박을 터트립니다. 방어의 어려움으로 거의 사장되었던 더블 커멘드에 이은 발키리 생산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대규모 드롭쉽 운영을 통한 상대방의 확장파괴와 봉쇄, 그리고 샤우론 테란(경기중 언급된 내용입니다)에 가까운 무한확장. 이재훈과의 로템에서 강렬한 역전승을 이끌어냈던 나경보는 조정현의 괴력에 쓴 웃음을 지으며 패배를 인정합니다. 경기 내내 전용준 캐스터의 환상 오바 멘트와 김창선 해설위원의 감탄사가 그칠 줄 몰랐던 경기였습니다.
“아~~조정현 선수 잘할때는 너무 잘해서 문제예요” 진정어린 김창선 해설위원의 감탄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테란 잡는 프로토스라는 이재훈 선수에게 패하고 재경기까지 가는 악전고투끝에 어떻게 8강까지는 진출합니다. 그러나 16강전에서 이미 그의 에너지는 소진된 것일까요. 결국 그의 행보는 8강전에서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리그 내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애썼습니다.(모든 프로 게이머가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비록 퍼실리티를 두개 짓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도(김창선 해설위원도 저건 실수입니다, 라며 쓴 웃음을 짓습니다) 다음 경기 인터뷰에서 수줍게 웃으며 “퍼실리티를 두개 만들고~~어휴, 그런 실수를 하고...”라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모습은 전 스타크래프트가 너무 좋아요, 라며 웃음짓는 초보유저의 모습을 연상케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게이머에게 패배는, 실수는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지난 날 이창호의 <하늘에 놓는 돌>이라는 저서에는 일본 바둑의 거장 면도날 사카다의 패배장면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이중허리 임해봉과의 본인방 도전기(그의 마지막 3대 타이틀 도전기였습니다)에서 패를 걸면 승패불명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결행하지 못하고 그대로 패배하자 복기를 끝내고 사카다는 자신의 방에서 위스키를 잔뜩 마시고 술에 취해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동료기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합니다.“알아? 패를 썼으면 내가 이겼을 것을....패를 썼더라면 내가 이겼을 거야...상대는 두세집씩 손해를 보게 되니까...,알아? 상대가 손해를 본단 말이야....패를 썼더라면 내가 이겼을 것을....상대는 두세집씩 손해를 보니까....패를 썼더라면 내가 이겼을 거야....”
패배를 할때마다 조정현 선수는(아니 패한 프로 게이머 모두는) 조금 과장해서 이런 경험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이겼을 텐데...아니, 그렇게 허무하게 패하지는 않았을텐데, 이렇게 했더라면 그런 억울한 역전패는 당하지 않았을텐데...라는 마음속의 울부짖음을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각양각색의 격려와 비난 심지어 억울하다 싶을 정도의 인신공격성 글들이 올라올 것입니다.
그럴 때 생각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고 패배가 거듭될 때, 더구나 한때 한국 최고의 프로 게이머중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이젠 그만둘 때가 아닐까?
이제 나는 더 이상 프로게이머라는 이름을 가질 수가 없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물론 어디까지나 제 허접한 추론입니다) 하지만 그는, 조정현 선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은퇴가 그러한 심리적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 차선의 선택일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직도 조정현 선수의 부활의 노래는 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울리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저 개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한명의 영웅입니다. 전 그냥 게임이 좋아요, 라며 수줍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은 대학 시절 소설을 쓰겠다던 소박한 열망조차 식어버린 삼십대 늙다리 총각에겐 결코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성부 리그에서 신예 한미경 선수에게 패색이 짙어지자 낭패한 모습으로 마우스를 한순간 놓치던 이혜영(경?) 선수의 슬픈 얼굴을, 그리고“얼마나 힘들겠습니까?”라며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는듯한 김창선 해설위원의 씁쓸한 한 마디를.
물론 패배만을 기록하는 게이머는 어쩌면 존재가치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날의 강자였던 사람들이 떠오르는 신예에게 패배를 당할 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패배의 아쉬움보다도 아직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쁠 수도 있습니다.
아, 그래도 조정현 선수는 여전히 현역에 남아 있구나, 김동수 선수를 볼 수 없어도, 신주영,이기석, 김동준 선수를 스타리그에서 볼 수 없어도 아직 조정현 선수는 남아 있구나, 라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조각을 말입니다.
패배는 물론 아픔입니다. 은퇴한 대부분의 프로 게이머들은 거듭되는 패배라는 아픔을 이기기, 아니 견뎌내기 힘들기에 은퇴라는 형식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현 선수도 언젠가는 결국 은퇴라는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처참한 패배를 당할지라도 다음 날 예선에 다시 출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체력과 그래도 난 게임을 사랑한다, 라는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조정현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스타리그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의 독특한 문파인 대나무류 테란이라는 이름과 함께. 승부에는 졌지만 나는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기백이 엿보이는 그의 모습도 영원할 것입니다.
조정현 님. 당신은 저에게 스타 크래프트라는 부분에서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영웅입니다. 영원히, 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지요. 그저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승리의 미소와 패배의 아쉬움을 반복하더라도 가능한 오래 게이머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당신을 기억하는 많은 분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에구, 엄청 길고 허접하다 못해 자칫 건방진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불현듯 석제의 공포마저 엄습하고 있습니다 ㅠ.ㅠ) 조악하다 못해 혼성모방까지 곁들여진 초라한 글이지만 피지알 식구 여러분들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언제 또 기회가 닿는대로 다른 글을 올리겠습니다.(많은 돌팔매질을 기다리겠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말입니다 ^^:::)
추신 -소설을 쓰신다는 박인성 님도 건필하시기를 먼곳에서나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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