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관계없는 얘기가 될 진 모르지만, '친일파'란 단어에 한 번쯤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때 배운 국사에 대해 얼마만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국사라고 하면 사실 상식부분도 많고, 또 관심있는 분들은 개설서나 교양서적 등을 많이 읽어보셨으니, 국사 교과서가 진리가 아님은 많이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국사 교과서만큼 국수적이고, 정권에 민감하며, 영 교육과정을 극도로 활용하고 있는 교과서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타 교과보단 가치판단이란 부분이 중요하게 작용하다 보니, 얼마전의 일본의 국정 교과서 문제나,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 문제 등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직업상 이런 부분들이 저에겐 민감하게 다가옵니다.
역사의 함정은 곳곳에 숨겨져 있지만, 요즘처럼 근현대사 부분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저로서는 자주 고민하게 되는 것이, '과연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야 할까, 아님 숨겨져 있는 진실까지 적나라하게 얘기해야 하는 것일까'
가뜩이나 자국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고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는 추세인 현실속에서,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을 학생들이 그대로 수용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할 지...뭐 그런 고민들을 하게 되지요.
진실이 있다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전달 방식에 따라 학생들에겐 다르게 다가오겠지요.
서설이 길었습니다.^^ 사실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했던 33인에 관한 건데요, 그들중 많은 이들이 나중에 친일파로 전향(?)했다는 사실은 대부분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들에 대해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볼까요?
'거족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종교계의 대표들이 앞장 서서 마침내 1919년 3.1 운동을 일으켰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서울에서는 탑골(파고다) 공원에 모였던 각급 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시가지로 나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문제 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은 과연 어디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였을까요?
1) 탑골 공원 2) 태화관
보기가 두 개 밖에 없다고요? 어투를 보니 파고다 공원은 아닌것 같구, 태화관일 것 같다구요?^^ 네, 답은..................................................................................없습니다.^^;
그럼 답은 뭐냐구요? 답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지 않았다'가 정답입니다.^^
그럼 태화관은 무엇이냐....탑골공원 부근의 중국 음식점인 명월관의 별관입니다. 왜 갑자기 태화관이 나오느냐...33인이 3월 1일 모인 장소가 태화관입니다. 왜 하필 태화관이었느냐...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영향인데, 태화관에 자주 드나들었던 손병희는 태화관 기생 주옥경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모인 33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극기를 향해 경례한 다음, 최남선이 지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려 했습니다. 이 때 대부분의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서는 이미 다 보았는데, 굳이 낭독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따라서 낭독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독립 선언 기념 잔치를 벌였지요. 그리고는 일제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렸고요. 그래서 정답이 없다고 했던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인력거를 가지고 이들을 체포하러 온 일본 헌병, 순사들에게 민족 대표들은 인력거는 싫다며 자동차를 가져오라고 했지요. 이에 다시 택시 7대가 오자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타고 경무 총감부로 끌.려. 갔답니다.
천도교의 전신은 동학이지요. 동학하면 모두들 동학농민운동을 떠올리실텐데, 동학교도들이 러일전쟁당시 일본에 적극 협조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독립협회 일부 세력과 다수의 동학교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 반일을 외치며 봉기하였던 동학교도들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일본 힘을 빌어 한국 정부의 전복을 기도했던 손병희의 지도에 따라 말입니다...(물론 동학농민군=일진회 가담 동학교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만...)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에 근거, 일제 총독이 지배하는 조선인 국회를 만들어 행정을 맡기자는 자치론을 주장하였습니다.(민족 개조론이란? 간단히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은 게으르고 신의 없는 우리의 민족성 탓이므로, 독립 운동보다 먼저 민족을 개조하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
최린은 1930년대 들어 더욱 변절하여, 천도교 장로로 있으면서 천도교 이름으로 일제에 비행기를 사서 바쳤고, 또한 1942년 5월 10일자 '매일신보'에 일제 징병제를 축하하는 담화를 발표하였지요.
"동포들은 벌써부터...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느냐... 반도 민중은 창씨도 하였고, 기쁜 낯으로 제국 군인이 되어 무엇으로 보나 황국 신민이 된 것이다."
정춘수. 그도 3.1 운동 뒤 변절하여 기독교계를 친일로 만드는 데 거리낌이 없었지요. 경성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신사 참배에 적극 앞장섰고,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박희도. 1931년 1월, 일문으로 된 친일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조선이 스스로가 자진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일본 국민이 되어 버리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또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해방될 때 까지 열심히 친일 행각을 벌였지요...
사실 아주 비판적으로 이야기 하긴 했지만, 33인이 만든 독립 선언서나 그들의 영향이 만세 시위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실 사실이며,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지금까지 쓴 내용보다 더욱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언제나 역사에서는 양면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기록이란 대부분이 승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얘기한 짤막한 교과서의 서술 내용에서는 알 수 없는 것들...
원래 민족 대표는 33인이지만, 이날 지방에서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4명이 빠져 29명이 참석하였다는 것...한편 미리 연락을 받고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들이 대표를 보내어 "민족 대표 중 1명이라도 탑골공원에 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대표 중 박희도가 "군중이 밀집한 탑골공원에서 선언식을 거행하게 되면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일제 경찰이 어떤 간계를 사용할지 모르므로 우리는 여기서 당.당.하게 잡혀가기로 했다"고 변명하였다는 점...등을 한번쯤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일제의 고문속에서 장렬하게 순절해 가신 여러 열사들의 이야기를 접할때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이 저에겐 더욱 빛(?)을 발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