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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8 20:58
인류세 개념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급진 생태학적 사회운동들에서 일종의 “산만한” 아나키즘에 비해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확히는 2000년대부터 '온난화현상'과 '기후운동'에 초점을 맞춘 환경운동이 대세가 되면서, 맑시즘과 생태주의가 거리를 두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국가 단위의 탄소배출 제재는 이미 모든 발전을 끝낸 선진국들이 개도국에게 강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기후 중심의 생태주의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온난화 현상'에 주목하는 생태 운동을 비판한 바 있죠.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1) 지역마다 자연 환경이 다르며 따라서 환경 운동도 다원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점, 2)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더 중요한 문제, 즉 원자력발전을 옹호하는 모순을 범한다는 점, 3) 앞서 언급한대로 선진국이나 대기업과 결탁하여 개도국을 제재하는 전략에 포섭된다는 점을 듭니다. 따라서 생태주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 있습니다. 특정한 동물 보호 운동, 특정한 슾지 보호 운동처럼 공통된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운동입니다. 반면, 글로벌화-일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 있습니다. 이는 지구 대기변화와 온도변화에 초점을 두는 운동입니다. 맑시스트들은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에는 동참했지만, 온난화현상에 기초한 생태주의 운동에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죠.
20/02/18 22:19
기후변화가 초래할 수 있는 위기는 대파국 수준이고 실제로 대파국이 일어날 경우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공평하게 피해를 당하지는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지구 전체에 걸친 위기이므로 전지구적으로 협화된 대응이 요구됩니다.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라는 것은 우선적이어야 할 이 전지구적 대응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대응이 위기의 근원인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거나/고 모더니즘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린 뉴딜', '지구공학, 핵 발전, 탄소 저장 및 다른 기술적 방안들을 기후 변화의 해결책으로 장려하는 생태모더니즘'), 그리고 이미 모든 발전을 끝낸 선진국들이 개도국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강제하는 형태를 취하는 한, 생태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 대응을 비판하는 이들입니다. 본문에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 이론들 – 특히 영어권의 이론들 – 의 상대적 역동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상대적'은 '어느쪽이냐 하면 역동적인 편이다'라는 의미죠) 최근 20여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태학 연구를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와(과) 성공적으로 접목 - 이 접목은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과 미출간 초고에서 생태사회주의론(적 자본주의 비판)의 기본 아이디어들을 찾는 작업으로까지 진전되었는데, 그 작업의 결정판은 최근 국역되기도 한 사이토 코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입니다 - 시키면서 그 비판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인터넷 상으로는 https://climateandcapitalism.com/ 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사회주의론의 집결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들 중 한명이 Ian Angus 인데, 다음 글은 이 양반이 마르크스주의적 생태학의 중요 저작들을 추천하는 글입니다.
http://ecosocialistsvancouver.org/article/essential-books-marxism-and-ecology-revised
20/02/18 23:55
추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있을 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가지 의견 차이가 있네요. 말씀하신대로 다양한 자연파괴를 막는 것과 전지구적 규모의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다만 무엇이 우선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관해서는, 저는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로 '생태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라고 생각하고요. 진정한 의미의 생태주의란 인간중심성을 타파하고, 다른 종의 생명권까지 보전하려는 도덕적 이성에 기초한 운동이겠죠.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은 실상 인간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운동이고, 물론 이러한 목표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생태주의가 아닐 뿐더러, 인간중심적이기 때문에 간과하기 어려운 갈등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맑시즘의 중심 의제는 계급 혁명 또는 자본가 게급의 타파인데,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들에는 다양한 계급의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의제와 상충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언급하신 사이트에서 참으로 역설적인 기사들을 보게 됩니다. [https://climateandcapitalism.com/2020/02/11/climate-change-emissions-and-the-fat-tail-risk] 같은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지원하는 것은 'JP모건 체이스'와 같은 국제 자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학자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통해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하고 있죠. 맑시즘이 생태주의와 성공적으로 접목했다면, 그 중심 의제는 무엇인지, 운동의 방법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지네요.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 핵심은 모든 생명이 의존하는 원천으로서 수원(水原)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질에 따라, 수원지의 지질학적 특성과 서식하는 동물에 따라 환경운동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지요.
20/02/19 02:49
지금과 같은 추세의 기후변화는 인간종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생물종들에게도 큰 재앙을 초래합니다. 현재 지구상의 상당수의 생물종들이 당면한 재앙 중 그 재앙보다 더 큰것은 없습니다. 물론 일부 생물종은 변화되어 가는 기후조건 아래서 더 번성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 지구에는 새로운 기후에 적응한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기 동안 수많은 인간개체들과 생물개체들의 생의 질이 확 떨어지게 되고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은 실상 인간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운동'이라는 주장은 넌센스일 뿐입니다.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이 생태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이라면 그 운동에 전인류의 이익이 아주 단순하게 걸려 있습니다. 자본가 계급과 그들을 서포트하는 국가 및 이데올로그들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상충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상충이 없다면 왜 운동이 필요한가요? 모든 근본적 사회운동은 언제나 더 진실을 보고 더 정의를 추구하고 그래서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세력과 수구반동세력 사이의 상충이라는 형태를 취합니다. 일부 자본주의 기업들이 기후변화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와 그것을 서포트하는 국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문제의식이 그 기업을 생태사회주의 운동의 동반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생태계에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기후변화 추세는 자연적 사이클도 인간본성의 불가피한 귀결도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온 세계 탓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전지구적인 생태사회주의 체제가 건설되지 않으면 그 파국적 결과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은 2050년까지 평균기온 2도 상승은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그 이상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물론 막기 위한 아무런 근본적인 전지구적 대책도 실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 저는 모릅니다. 누구도 타개할 수 없고 파국적 위기를 겪으면서 인류 문명 자체가 퇴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 인류 대다수는 현재보다 삶의 질이 확연히 떨어지게 되는 피해를 보게되는 와중에도 적응할 자원을 확보한 어떤 소수는 큰 손해는 안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의존하는 원천으로서의 수원' 운운은 여러 자연적 힘들/요소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특정 형태를 통해서만 생태계가 생물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로 재생산된다는 단순한 사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곳적 얘기의 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수원을 보호하는 것은 현재의 전지구적 기후변화 추세를 전지구적 대첵을 세워 저지하는 것과 전혀 상충되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대기 중 이산환탄소 농도의 증대로 인한 대양의 산성화는 수원 오염의 가장 대표적이자 가장 대규모적인 사례입니다.
20/02/19 07:46
전인류의 이익이라든가 전지구적이라는 단어가 이데올로기적이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온난화는 어떤 지역이나 어떤 특정 종에게 멸종을 초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구 역사상 생명 대량 멸종을 초래한 것은 빙하기지 온난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화석증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최근의 환경운동은 온난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것은 특정 지역을 위한 전세계의 호혜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합니다
20/02/28 18:00
기후변화는 어떤 지역에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후변화는 지구 전체에, 따라서 지구 생태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간단히 얘기해 대다수의 생명을 서포트 하는 자연력/요소들이 오염되고 약화됩니다. 이 오염과 약화가 오히려 번성의 조건이 되는 생물종은 많지 않습니다. 인류는 그 생물종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즉 자본가들을 포함해서 기후변화로 지금보다 더 삶의 질이 나아지는 이들은 없습니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최소한만 말해도 문자 그대로 전인류의 이익이 걸려있는 보편적 사안입니다. 물론 최대한은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되고 수많은 생물종들의 삶의 질이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기후변화로서의 온난화 역시 지구역사상 대량멸종을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대규모 화산폭발도 흔히 대량멸종을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로 거론되는데 화산폭발로 인한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가 온난화를 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의 대량절멸 항목을 검색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최근의 환경운동은 온난화라는 표현보다는 기후변화라는 표현을 더 즐겨 씁니다. 기후변화는 작게는 전인류의 이익을 위하고 크게는 생물종 다양성의 보존을 위해서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의 책임과 능력에 맞추어 전지구적으로 공조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20/02/18 22:02
제가 저사람들만큼 생태주의나 환경보호에 대해서든 맑스레닌주의든 알지는 못하겠지만 자기네들의 케케묵은 혁명담론에 요즘 핫한 기후변화를 끼얹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네들 사상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만능열쇠인 양 기후변화와 관련된 사람들의 폭발력을 어떻게든 이미 힘을 잃은 구좌파적 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엮어보려는 불순한 의도로 해석하자면 제가 너무 삐뚤어진걸까요
20/02/18 22:34
케케묵었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아주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 그러나 생태정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약함은 이 시점에서 그것의 거의 보편적인 약함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즉, 이 약함은 대양의 산성화 및 그 밖의 모든 것들과 함께 인류의 위기의 한 증상이다). -- 바른 것이 힘을 못쓰는 것 만큼 위급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른데 왜 힘을 못쓰느냐구요? 바르면 대중을 장악할 수 밖에 없다는 법칙이라도 있나요? 진실/진리가 승리한다는 법칙은 인간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생각이 진리/진실을 담고 있는지 여부와 그 생각이 대중을 사로잡아 실천에 옮겨졌는지 여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음을 보장하는 주의주장이 아닙니다. 그 실천의 가능한 형식을 지적하고 그 실천을 촉구하는 주의주장이죠. 마르크스주의는 케케묵은 자본주의 비판이기도 합니다. 생태학적 대파국의 잠재력이 돌이킬 수 없는 선 바로 앞까지 커진 현실에서 자본주의와 그 대파국의 잠재력 사이의 관계를 눈여겨 못보고 그 관계를 눈여겨 볼 수 있는 이론과 대안적 사회론을 제시해온 유일무이한 주의주장을 중학교 반공 교과서나 조선일보 수준의 논리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내팽개친다면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20/02/19 02:51
기후변화의 아이러니 같은건 기후변화에 대한 운동으로 개도국을 제재한다는 안좋은점도 있지만
기후변화를 못막으면 가장 피해가 큰것도 개도국이라는게... 기후온란화가 되면 어쩌면 캐나다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이득이 더 클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본것 같거든요..
20/02/19 08:06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저 (사회?)철학 분야의 특유의 표현을 전 잘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러나 생태정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약함은 이 시점에서 그것의 거의 보편적인 약함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음을 보장하는 주의주장이 아닙니다. 그 실천의 가능한 형식을 지적하고 그 실천을 촉구하는 주의주장이죠.」 이런 표현들 말이죠... 제가 무식하고 머리가 나쁜걸까요.아니면 스타일 문젤까요? 전공은 나름대로 사회과학 쪽으로 나왔는데 전 오히려 수학 물리학은 억지로 꾸역꾸역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명확하게 다가와도, 저런 문장표현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구요. 쓰시는 분은 분명 명확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턴데 제 뇌가 그걸 재조립하지 못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찌어찌 이해해도 계속 하기도 힘들고..독해 노하우 같은게 있나요?
20/02/19 10:39
1.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번역
2. 외국 개념의 도입 3. 1. 2.로 얻어낸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무분별한 적용 4. 3.의 현학적인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줄 알고 일단 모방 5. 외국 학자와 생경한 외국말 자체에 권위를 부여해 2를 가속화하는 내재적인 오리엔탈리즘 6. 합의된 개념 정의 및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 규약의 부재(말의 정의 자체를 애초에 진영에 따라 다르게 해버림)
20/02/19 13:43
어려운 낱말도 없고 문법적으로 복잡하지도 않은 문장들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본인의 독해력이 미발달되어 있는 것이죠. 잘 쓴 신문기사 같은 문체의 글만 읽어서는 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의 한계가 뻔하니 신경을 쓰셔야 할것입니다.
20/02/19 09:44
마르크스주의와 생태주의가 결합될 수 없다고 보는 인식은 흔히 마르크스를 경제성장과 생산력에 긍정적으로 평가한 프로메테우스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오독을 비판해온 폴 버킷,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의 학자들이 있죠. 이들은 마르크스의 저작 내에 이미 생태주의적 요소가 충분히 깃들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물질대사의 균열'이라는 개념이지요.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혁명'을 외치는 주의주의에 그치는 것 때문에 19~20세기를 혁명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만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자본론을 집필할 시기부터 당시 발전한 '농화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자연과학에 심취하고 있었습니다. '물질대사'란 개념이 자연과학으로부터 도입한 개념입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분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도시와 시골이 분리되었습니다. 시골에는 자본주의적 토양의 착취로 인해 지력이 고갈되고, 도시에는 토지로 되돌아가지 못한 인간의 분변과 폐기물에 쌓여 지독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죠. 이와 같은 인간과 자연간의 물질대사에 균열을 일으키는 생산양식 자체를 변혁시키는 것이 마르크스 생태주의의 큰 의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댓글에서도 언급하신 사이토 고헤이의 근작은 앞선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자본론 자체를 정치경제학 비판을 넘어서는 생태학적 저작으로 길어올립니다. 생태주의에 마르크스주의를 끼얹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르크스는 생태적이었고 이것의 전환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생산관계를 변혁시켜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20/02/28 19:11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인터넷 상에서는 전문영역이 아님에도 무리하게 논쟁하려고 시도하곤 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맑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생태주의적이다라는 생각은 2000년대에 등장한 맑스주의의 생태학적 전회로 이해하겠습니다. 작금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발상의 전환 같습니다.
사이토 고헤이(추선영 역)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두번째테제, 2020) 존 벨라미 포스터(김민정, 황정규 역) - 마르크스의 생태학 (인가사랑, 2016) 이 글에 제시된 몇 가지 레퍼런스를 정리해봅니다. 위와 같이 번역된 책들이 있고, 기타 제임스 오코너, 폴 버킷과 같은 생태 맑시스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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