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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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 사무국이란 곳은 도대체 뭐하는 단체일까요. 왜 나에게 이딴짓을 하는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사무국 녀석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패널티를 집행하고야 마는 놈들이란 것. 반드시 퀘스트를 성공시켜야 합니다. 평판이라는건 베게 속의 깃털 같아서 한번 흩어져 버리면 다시 모을 수 없으니까요.
현실 감각이 무디어 졌을때는 의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핸드폰 연락처를 훑어보아도 연락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동창 민호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습니다. 큰 기대를 안하고 있었는데 억지스러운 부탁에도 흔쾌히 만나자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된건 없지만 어쩐지 구원을 받은거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대화상대가 절실히 필요했으니까요.
오랜만에 본 민호는 예전보다 몸이 많이 불었고 머리숱이 적어 보였습니다.
"야, 썰쟁. 머하고 살았냐. 왜러케 연락이 안돼."
여전히 별명으로 불러 주어서 반가웠습니다. 민호는 결혼을 했고 애가 있다고 했습니다. 민호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초딩시절 뭔지도 모르면서 "아~섹스하고 싶다!" 이딴 소릴 하고 다녔죠. "큰소리로 말하지 마 병신아" 하고 쿠사리를 먹이는게 내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옛 추억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고 있었습니다.
"야 너 기억나냐. 니네집에 모여서 그 스크루지 나오는 연극 연습했던거. 그때 진짜 잼났었는데."
민호는 우리를 과거로 데려가는 유령일까요. 제 머릿속 필름은 빠른속도로 되감겨 추억의 영상속으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영문 모를 두근거림을 품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조별로 발표하는 연극 연습을 하기 위해 반친구 여섯명이서 우리집으로 갔던 날이었죠.
거기에는 내짝 소희도 있었습니다. 인생을 통털어서 유일한 여사친이었죠. 얼굴이 빵실빵실해서 몰래 턱밑에 손가락을 세우고는 핫도그라고 놀려먹곤 했습니다. 친구들이 왔다는 말에 엄마는 간식으로 전을 부쳐주신다던가 선물받은 외국 쿠키를 꺼내 주신다던가 어쩐지 우리와 함께 들떠계신 느낌이었습니다. 아, 그리운 사람들. 별것 아닌 추억에 잠시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가 다됐네. 넌 여친하고 보내는거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버렸습니다.
"뭐...나야...그렇....지."
"야 부럽다. 여유가 있나보네."
"뭐...그런건 아니고..."
"너 그럼 혹시 돈 좀 빌려줄수 있어?"
갑자기 자살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번에 프렌차이즈 사업을 하나 구상하고 있거든. 이거 확실한 사업인데 투자 한번 안해볼래?"
친구를 죽여버리고 싶어졌습니다. 증인만 없애버리면 이딴 부끄러운 기억은 없었던게 될테니까요. 결국 '행운의 편지'에 관한건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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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잠을 못이루다가 서너시간 눈을 붙였습니다. 기안대 입구역을 지나는 첫차는 오전 6시전 입니다. 여유를 부린 탓일까요. 뭔가 쎄~한 기분이 들어서 지하철 계단을 뛰어 내려갔더니 첫차가 문을 빼꼼히 열고 있더군요. 막 출발하려는 참인거 같았습니다. 순간 마음이 급해져서 도움닫기를 해 문틈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푸슝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습니다. 열차가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켰습니다. 한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서 몸이 많이 약해진거 같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끌어버려서 구석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띠링~
핸드폰에서 익숙한 알림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긋지긋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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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모험의 소명>을 성공하셨습니다.
세계선이 2% 이동하였습니다.(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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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핸드폰이 다시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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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퀘스트> 모험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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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퀘스트? 이게 계속된다는 거야? 저는 핸드폰 액정을 클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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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B급> 모험가의 노래
* 당신은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까지 가장 좋아하는 애니송을 완창해야 합니다.
* 보상 - 직업을 구함
* 패널티 - 지하철에서 똥지림
* 세계선 변동률 +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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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지하철에서 지린다는건 어떤식으로 집행되는걸까요. 그리고 직업을 못구해서 이꼴로 사는건데 보상이 취직이라니요. 정부도 못하고 우리 부모님도 못한건데 갑자기 어디서 일을 구하냐구요. 세계선 변동률이란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설마 저 퍼센티지가 가득 찰때까지 미션이 계속되는건 아니겠죠. 항상 싫은 예감은 잘 적중한다지만 말이죠.
지하철 안을 둘러봤습니다. 넥타이 맨 사람들, 학생들,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들 다양한 인간 군상이 보였습니다. 노약자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어르신들, 피곤에 쩔어있는 직장인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쨋든 눈앞에 닥친 이 난관을 돌파해야합니다.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내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았습니다. 짱구? 케이온? 포켓몬? 러브라이브? 분명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무언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서 아련하게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밀려오는것 같았습니다.
'천사소녀 네티'
바로 그거다! 반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며 몰래 보았던, 나의 우상, 나의 사랑 네티! 눈을 감고 그 영상속으로 들어갑니다. 애라 모르겠다. 머릿속으로 흘러가는 멜로디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두성으로.
♬ 오늘밤에 무슨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까
나쁜 마음 끝이없는 욕심
멀리멀리 사라지면
훨씬 아름다운 세상될꺼야
뽀송뽀송 고슴도치 귀여운루비
엄마, 아빠께서 이 비밀을 아실까
긴 머리 높이 묶고 요술봉 휘두르며..................♬
예전에 역사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전국시대 절세미남 중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쳐다봐서, 그 시선 때문에 단명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하철 승객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습니다. 왜 일찍 죽었는지 알것도 같습니다.
그때 희미하게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분명 내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 넥타이맨을 발견했습니다. 안경, 퍼머한 머리, 터질듯한 와이셔츠. 그렇습니다. 그는 동료가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공감을 나눕니다.
♬ 빨주노초파남보 동그라미풍선
행복 나눠주는 천사소녀 네티
긴 머리 높이 묶고 요술봉 휘두르면
빨주노초파남보 동그라미풍선
행복 나눠주는 천사소녀 네티~♬
노래가 끝났을때 다음역에 도착한다는 안내음성이 들렸습니다. 안경퍼머맨은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새벽부터 출근하려니 기분이 울적했는데,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가슴이 따듯해졌습니다. 네티쨩을 향한 그 마음, 확실히 전해졌다굿..."
허공을 응시하며 긴 여운을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헐레벌떡 하차했습니다. 망연자실하고 있다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황급히 따라 내렸습니다.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의 파도에 따라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몇년전까지 이런 생활을 했었지만 까마득한 선캄브리아기의 기억처럼 흐릿하게 다가옵니다.
썰물이 빠져나간 지하철역은 어쩐지 휑해보였습니다. 갈곳을 잃은 저의 발걸음을 이끈 곳은 델리만쥬가게였습니다. 하...달콤하면서 촉촉한 냄새. 눈치없는 침샘이 홍수를 터트립니다. '새벽부터 델리만쥬는 반칙이잔아.'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지만 돈이 한푼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입니다.
띠링~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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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의 노래> 퀘스트를 달성하셨습니다.
세계선이 13% 이동하였습니다.(15/100)
보상으로 직업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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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깨를 두드리는 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봤습니다.
"배고픈가?"
"?"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이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이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따라오게."
"아뇨, 저 진짜 괜찮습니다."
한참을 노려보던 어르신이 말했습니다.
"자네 구독자지?"
"네??"
"행운의 편지 구독자 아닌가?"
"어...어떻게??"
"그러게 따라오래도.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고."
쿵!!
또다시 뒷통수를 둔기로 맞은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어르신은 바쁜 걸음으로 앞장서 가셨습니다.
우리가 도착한곳은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급식소였습니다. 성에가 잔뜩 껴 불투명해진 유리문 안으로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새하얀 입김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정도의 날씨였습니다. 하늘에는 서서히 밝은 기운이 돌고 있었습니다.
배식받은 뜨끈한 무국을 사발째 들이키면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입천장이 홀랑 까질정도로 뜨거웠지만 아우성치는 위장을 진정시키는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금방 들켜버리고 말아."
어르신은 시선을 식판에 꽂은채 말했습니다.
"네? 무슨...?"
"하긴 그 퀘스트란게 일반인들의 눈에 튀어보이는 것들이긴 하지."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아, 지하철에 타고 계셨던거군요..... 저기, 그럼 어르신도 행운의 편지란걸 받으시는 건가요."
"그렇지. 하지만 거기서 받기 전에도 퀘스트 같은건 평생 해왔어."
"네? 그게 무슨...말씀이세요?"
"여기 안에 사람들 둘러봐. 누구나 태어나면서 퀘스트를 받게 되어 있어. 학생은 학교에 가야하고 직장인은 직장에 가야하잔아. 퀘스트를 주는 상대가 직장 상사인지 사무국인지 차이일뿐 사람은 언제나 퀘스트에 허덕이면서 살아가는 존재지."
어쩐지 아리송했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야돼. 구독자들끼리는 어떤식으로든 엮여버리는 경우가 많거든."
"네...그렇군요."
숟가락도 멈추고 어르신의 말에 집중했습니다.
"보아하니 바쁜거 같아 보이진 않는데... 자네,오늘 나 따라갈텐가? 하루 일자리 정도는 소개해 줄수 있네만..."
"......"
퀘스트의 보상인걸까요. 어르신의 말에서 무언가 새롭게 시작해볼수 있을거 같은 이상한 의지 같은게 느껴졌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수 없지만 본능이 시키는대로 덮썩 물었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띠링~
익숙한 핸드폰 알림음이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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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퀘스트> 기초던전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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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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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C급> 기초던전공략
* 당신은 지정된 시간만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 보상 - 소정금액
* 패널티 - 바께스 뒤집어쓰고 알몸으로 강남역 뛰어다니기
* 세계선 변동률 +9% (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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