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시절, 저는 옷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랑죠가 그려진 반짝반짝한 신발을 갖고 싶어 엄마를 졸랐던 게 유일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러다 옷에의 욕망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중학교 때 폭발했고, 저는 친구들과 안양지하상가에서 초면에 살갑게 어깨에 팔을 두르는 2인 1조 형님들을 피해 다니며 쇼핑을 했습니다. 그 때에도 친구들과 저의 옷을 고르는 기준은 처참했어요. 슬램덩크 캐릭터 티셔츠를 서로 사고 싶지만 똑같은 옷 사기는 싫어 가위바위보를 하고, 한창 힙합이 유행할 때라 로카웨어나 DC, 팀버랜드, 에코같은 브랜드들의 카피들을 너도나도 샀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엔 힙합은 물 건너갔지만 여전히 쇼핑은 안양지하상가였습니다. 엄마가 사오시는 옷들은 그 당시 표현으로 범생이같았다고 할까요.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유별난 친구를 한명 발견했습니다. 친하지 않으면 사복 입은 모습 보기 힘든 게 고등학교이지만 세 가지 케이스에서 자신의 패션을 뽐낼 수 있었습니다. 체육시간, 소풍(수학여행), 겨울. 체육시간에는 체육복을 빨거나 안 가져왔다고 변명하고 티셔츠를 뽐낼 수 있었고, 소풍은 고등학교의 패션위크였고요. 겨울에는 어떤 아우터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느냐가 관심이었죠. 그때는 힙합브랜드의 두꺼운 후리스같은 점퍼가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별난 친구는 소풍에 카라셔츠를 이중으로 레이어드해서 입고 오는 당시로서는 기행을 뽐내었고, 겨울에는 아메리칸 이글의 양털자켓을 입었습니다. 양털자켓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이란... 뭔가 어른같은 그 느낌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의 패션은 안양지하상가의 한도 내에서만 존재했었습니다.
대학교 입학 전, 친구들과 쇼핑을 가서 지하상가를 벗어나 리바이스 생지데님자켓과 엔지니어드 진, 카고바지, 그리고 그 당시의 최고의 유행템인 비니모자색깔세트를 샀습니다. 이 때 알았어야 하는 것은, 옷은 가장 예쁜 한 벌을 사는 것보다 무난한 5일치 옷을 사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두 살 연상의 동아리 선배와 사귀게 되는데 그 누나가 저를 간택한 이유는 그 옷을 입는 센스가 1학년 애송이같지 않았다 였습니다. 이 발언은 저의 패션을 10년간 정체되게 만든 주범입니다. 저는 건방지게도 스스로의 안목에 콧대가 높아졌고 가장 예쁜 옷 하나를 내가 가진 전부를 쏟아붓더라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예쁜 옷을 하나 사고 가지고 있는 옷들을 그 예쁜 옷에 맞춰 사다보니 그 옷을 안 입는 날은 패션고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제가 색약이 있어 색의 오묘함을 맞추지 못하다 보니 초록색 니트와 주황색 바지를 입었다가 당근같다며 당근으로 불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애를 할 때는 제 꼴을 못 버틴 여자친구들이 옷을 골라주어 조금 나아지는 때가 생겼습니다.
그러다 취직을 하게 되었고, 정장을 입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속성 정장 공부를 하고 나니 정장입는 공식이 정말 쉬웠습니다. 기본템 최소 두 개씩만 있으면. 차콜&네이비 수트, 블랙&브라운 구두&벨트만 있으면 셔츠와 타이의 베리에이션만으로도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었죠. 취직 초반 월급을 수트에 투자하고 어느 정도 수트가 완성되고 나서는 셔츠와 타이에 투자를 하니 그 재미가 엄청났습니다. 색상도 복잡한 색은 많이 사용되지 않기도 하고요. 그렇게 취직하고 2년 뒤 저는 FLUXUX씨 정말 옷 잘입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그 짜릿함이란.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던가요. 저는 얼마 전 캐주얼한 옷을 입는 회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장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고, 제 캐주얼한 옷들은 전 직장 시절 나이와 회식으로 찐 배를 가리기 위한 중학교 때 힙합룩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젠 양털자켓을 입던 친구를 보고 슥 지나갈만큼 패션에의 욕심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은 운동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캐주얼의 복잡한 공식들을 이해하러 가야겠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패션생활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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