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님은 개발자입니다. 저도 개발자입니다. 이건 중요한건 아니고요. 여친님은 퇴근하고 집에서 개인 프로젝트 코딩을 합니다. 사용하는 개발 장비는 싱크패드 노트북입니다. 싱크패드에 유감은 없고 좋은 싱크패드도 세상 어딘가엔 있겠지만 여친님 장비는 별로 안 좋아보이더군요. 콘솔에서 타이핑을 하는데 화면에 출력되는 글자가 타이핑속도를 못따라갑니다. 대단한거 켜지도 않았는데.. 야 노트북 왤케 느려. 물어보니 응 아닌데 할만한데? 지금 내 노트북 무시하냐? 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저는 느린 환경에서 개발하는 것을 정말 못참는 성격입니다. 문답무용입니다. 싱크패드를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여친님 생일도 다가오겠다, 맥북 프로를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여친님이 회사에서 쓰는 개발도구가 맥북인데, 가끔 집으로 가져와서 회사 일을 할때 (회사 노트북으로는 개인 플젝을 하지 않는 주의) 그렇게 간지가 나더라고요. 왜 내 맥북은 저렇게 간지가 안나고 빈티지 추리닝 같을까? 2013년에 사서 그런걸까?
전 그때 몰랐어요. 이게 그렇게 긴 기다림이 될지...
저는 일본에 삽니다. 우선 일본 애플스토어에서 맥북을 주문했습니다. CPU를 한단계 올리고, 램도 올리고.. 최종가격.. ?? 37만 9천8백엔.. 가격 실화냐.. 5년전에 한국에서 백만원주고 맥프로 레티나를 지인에게 구입한 제게는 약간 묵직한 충격이군요. 게다가 소비세 별도.. 소비세 3만엔.. 합하면 대충 41만엔.. 망설여지는군요. 일시불로 지르기엔 제 지갑이 얇아 할부는 어떤가 찾아봅니다만, 아 맞다! 일본에서는 무이자할부라는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쓰는건 라쿠텐 카드와 아마존 카드... 일단 알아나 보자.. 할부 이자... 1년... 15프로... 실화냐? 이야 이놈들 돈 쉽게버네.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그런데 일본 애플 스토어에는 Orico(이하 오리코)라는 무이자 할부 회사와 연계해서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분할납부를 하면서 신용카드를 끼워쓰면서 내야 하는 할부이자를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프로세스는 이렇습니다.
1. 애플 스토어에서 주문신청
2. 신용카드, 기프트카드(이걸로 진짜 사는 사람이 있다고?), 계좌입금, 쇼핑론(이게 오리코입니다. 무이자할부.. 지만 실상 대출이죠)
3. 쇼핑론을 고르면 오리코 페이지로 넘어감
4. 오리코 페이지에서 결제 신청.
- 신용카드 신청하는 것 처럼 제 신용정보 파악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5페이지에 걸친 입력폼을 지나다니면서 꼼꼼하게 입력해야합니다.
무슨일을 하고 있고 어디 살고 누구랑 살고 수입은 어느정도고..
5. 오리코 페이지에서 신청을 마치면 애플 스토어로 다시 돌아와서, 주문처리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제 오리코에서 제 정보를 가지고 심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려달라는 메일이 애플과 오리코에서 도착합니다. 오리코에서 OK승인이 떨어지면 그 정보를 바탕으로 애플에서 배송준비를 시작하는 프로세스입니다.
하루를 기다렸는데 오리코가 아닌 애플에서 메일이 왔습니다.
장황하게 이것저것 써있었지만 결국, 승인 보류가 났는데 주문자 주소랑 배송지 주소랑 다르니까 주소를 일치시켜야 할 필요가 있답니다. 어차피 여친님 생일선물이고 하니 제가 여친 회사 사무실로 바로 배송주소를 입력했는데, 주문자 주소(저)는 집주소로 되있는데 배송지 주소가 집주소와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승인 보류가 된 셈이죠. 그러니까 전화를 달랍니다. 통화를 한참 했는데 결국 애플 직원분이 배송지를 집으로 수정해주는걸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제 쪽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주셨죠. 야 역시 세계 최고의 기업이야 서비스 쥑이네! 진작좀 알려주면 좋았을텐데 그건 그렇다 치고요.
그렇게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 이틀..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런건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아아니 주문을 했는데 이게 어케 돌아가는지 알 방법이 없다니 이런 미개한 나라가 있다구요? 구라치지 마세요! 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도대체 뭐 주문이 되고있는건지 뭔지 연락이 안옵니다. 주문번호가 들어왔지만 조회할 수 있는 수단은 웹사이트에 없습니다. 원래 이렇게 느린가? 오리코.. 심사.. 느림.. 일본웹에서 검색해보니 바로 승인이 나는 케이스는 1일만 지나도 연락이 오는가 하면, 2,3일이 지나도 연락이 안오는건 뭔가 문제가 있거나 거절될 확률이 높다는 각종 블로거들의 증언이 보입니다. 저는 사흘째였죠.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는게 도통 이상해서, 참다참다 못해 오리코에 전화를 해봤습니다. 여러번의 토스 끝에 심사관련 담당자와 통화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나 : 심사가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요. 결과 좀 여쭈려고 전화했어요
오리코 상담원 : (기다리게 해드려서 대단히 죄송하고 심사가 오래걸린 점 용서해주시길 바라고 아무튼 송구하고 개인정보를 몇번 여쭐지도 모르고 괜찮으신지 아무튼 죄송하고 등등의 표현 생략) 주문번호좀 알려주시겠어요?
나 : xxxxxxx요
상담원 : (대단히 죄송하고 조사가 필요한데 시간이 걸리고 아무튼 각종 미사여구 생략) 기다려주세요.
나 : 네
음악을 들으며 한 3분 기다렸습니다.
상담원 : (미사여구 생략) 고객님 이거 주문 취소요청 들어와서 심사도 중단되셨습니다
나 : ? 예?
상담원 : 정확히 5일 전에 애플쪽에서 주문 취소해달라고 메일이 와서, 취소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제가 처리했습니다.
나 : ????? 일단 상담원님 성함좀 알려주시겠어요?
상담원 : 네 고객님 제 이름은 XX입니다.
나 : 감사합니다.
그리고 애플에 전화를 했습니다. 음.. 통화내용은 녹음된다네요.
애플 상담원 : 안녕하세요 고객님
나 : 열흘정도 전에 쇼핑론 껴서 맥북 주문을 했는데 문의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애플 : 무슨일이신가요?
나 : 오리코쪽의 심사 승인을 기다리는 중에 애플쪽에서 주문을 취소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해서 그 내막을 알아보려고요
애플 : 주문번호를 알려주시겠어요?
나 : XXXXX요
애플 : 잠시만요 고객님
거짓말하지 않고 그대로 10분은 기다렸네요. 조사가 길어질거면 전화를 아조씨가 줘야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세계최고 기업 정책이 사람 기다리게 하는거라면 제가 따라야죠 별 수 있습니까?
애플 : 고객님
나 : 예
애플 : 저희는 그런 요청 드린 적이 없습니다..
나 : ?? 예?
애플 : 저희는 오리코에서 주소 변경 요청을 받아 주소를 바꾸고 다시 확인하도록 연락드리긴 했는데요. 주문을 취소하는 요청은 한 기록이 없습니다.
나 :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오리코쪽에서 착오가 있었을거란 말씀이시네요 맞나요? 애플은 잘못이 없는거죠?
애플 : 아....네....(주절주절 뭐라 웅얼대며 설명) 아무튼 기록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오리코에 연락을 했습니다.
오리코 상담원 : 안녕하세요 고객님
나 : 아까 상담했던 XXX라는 분이랑 다시 통화하고 싶은데요.
상담원 : 아... XXX는 현재 다른 응대중인데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무슨내용인지 여쭤도 될까요?
나 : ....아.......................... (자초지종 설명)
상담원 : 하지만 고객님 애플쪽에서 분명 취소요청 메일을 받고 저희는 취소진행을 했습니다. 분명 애플이 저희쪽 착오인 것 같다고 했는지요?
나 : 네. 그럼 애플이 잘못한거에요? 애플쪽에 문의 할때 상담내용이 녹음도 되고있다는 안내를 들었는데, 저는 딱히 거짓말한 내용은 없거든요.
상담원 : 적어도 저희쪽은 문제 없이 절차 진행 한 것 같습니다 고객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나 : 죄송한데 제가 지금 한시간 가까이 통화만 하고 있거든요. 정확한 정황 파악을 아까 제 심사 처리해주셨다는 XX님이랑 잘 확인하신 후에 저한테 전화를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상담원 : 물론이죠 고객님.
나 : 고마워요.
그리고 점심시간을 다 소진한 저는 일하러 돌아갔지요. 위 내용은 대단히 많이 간추린거고 상담원들이 말이 엄청나게 길어서 실제로 저 스크립트보다 시간은 더더더더더더 걸렸습니다. 정말 한시간 가까이 통화만 했어요.
그날 저녁 전화가 한통 걸려왔습니다. 울 것 같은 목소리의 아가씨가, 자기는 애플 직원이라고 소개합니다.
애플 : 고객님 안녕하세요
나 : 네 애플에서 무슨일로 전화를 주셨는지요?
애플 : 사실 아까 낮에 문의주신 내용이 저희쪽 착오였던걸로 밝혀져..
나 : 아...예...
애플 : 대단히 죄송합니다.
나 : 그럼 이 주문 어떻게 되나요? 다시 계속할 수 있어요?
애플 : 그건 곤란하옵고 다시 처음부터 주문을 신청해주셔야...
나 : 아 전 딱히 잘못한게 없는데 열흘이 지났는데 그걸 다시 하라고요? 제 신용정보 입력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다 입력을 해야겠네요? 외국인이라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정확하게 이해한게 맞나요?
애플 : 대단히 죄송합니다. (울려고하는소리 끅끅)
나 : 상담원님이 취소하신거에요?
애플 :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대단히 죄송합니다.
나 : 아 알겠습니다. 담당 직원은... 아니 됐다 그럼 왜 제게 알림 메일이 단 한통도 오지 않은건가요?
애플 : 대단히 죄송합니다.
나 : ;; 아니 원래 안내 메일이 안오는지 여쭙는건데요
애플 : 주문이 취소되면 원래 고객님께 메일이 전송됩니다. 혹시 스팸함에...
나 : 애플의 메일이 스팸함에 들어간다고요? 잠시만요. (뒤져본 후) 아니요 없어요. 저는 단 한통도 애플에서 주문 관련 메일 받은게 없습니다.
애플 : 대단히 죄송합니다.
나 : (않이 뭐지 진짜) 일단 알겠습니다.
애플 : 제가 입력하신 정보로 주문서를 대신 작성해드릴까요?
나 : 헐...아니요 됐어요. 끊겠습니다.
애플 :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보세요 주문서를 대신 작성이라니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전화를 끊고 저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대체 이 주문은 어디부터 잘못된 것 일까요? 도대체 왜 애플 직원은 자기가 주소 재확인 요청을 했다고 떠는 목소리로 우겨댔을까요? 혹시..혹시.. 애플 직원이 혐한이었던 것일까요? 왜 주문 취소가 되었는데 제게 알림은 오지 않은 것일까요? 그럼 맥북 구입은 어떻게 해야하나. 역시 그냥 현찰박치기로..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좀..
저는 여친님께 자초지종을 상담했습니다. 여친님아 니 맥북은 아직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세상에 없어..
곰곰히 생각하던 여친님이 말씀하시네요.
오빠 난 솔직히 이걸 왜 사야하나 싶다.
근데 우리 회사 이름 끼고 법인으로 주문하면 8% 할인받고 살 수 있긴 해.
신용카드 할부이자 내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고 그냥 우리 회사 이름으로 사자.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했습니다. 다만 계산은 역시 회사 직원 명의여야만 해서, 여친님이 하게 되었네요.
회사를 통해 주문한 맥북은 무려 2주의 조립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잠수하고 있다가, 사흘에 걸쳐 일본으로 배송되어왔습니다.
아 맥북 사야징! 하고 주문을 시작하고, 우여곡절 끝에 한달만에 맥북을 수령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저는 여친님의 분할납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매달 이체를 걸어놓았고요.. 아니 참.. 이게 무슨 생일선물... 너무 폼 안나잖아요.. 흑흑.. 이게 뭐야..
아무튼 여친님은 뛸듯이 기뻐했고, 한달동안 시름시름 앓던 제 마음도 그 모습을 보며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중국에서 조립된 이 제품에 하자만 없다면 어찌되었든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울 것 같은 목소리의 상담원과 통화한 그 날 이후 변기에 앉을 때 마다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저는 더 화를 냈어야 했던걸까요? 혹시 호구로 보이진 않았을까요? 부들부들
애플 망해라!
에필로그입니다만
그 후 저는 여친님께 플4 프로를 선물받아 레데리2를 재미있게 즐기고 있습니다.
예? 선물 가격 차이가 몇배냐고요?
허참 중요한건 가격이 아니라 사랑 아니겠어요?
충성충성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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