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영화 <터널>, <히말라야>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공간] 신파에서 살아남는 법 (feat. 배두나, 정유미)
영화 <터널>에서 하정우가 고립된 터널 안과 터널 밖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심각한 가운데서도 의외의 유머와 재기발랄함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던 터널 안과 다르게 터널 밖 구조대의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슬프고 애타게 변하며 신파적 요소가 조금씩 더해져 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파의 흐름에 물들지 않고 꿋꿋이 자신만의 연기를 펼쳐내던 배우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아내 세현 역할을 맡은 배두나였다. 모두가 영화를 찍고 있을 때, 그녀 혼자 막막한 현실 위에 외롭게 두발 딛고 서있는 느낌이랄까. 이러한 그녀의 연기를 보며 '배두나를 대체할만한 여배우가 또 누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막상 고민해보니 한참을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배우는 정유미가 유일했다. 영화 <히말라야>를 휩쓸던 신파의 눈보라 속에서 꿋꿋이 자기연기를 해내던 그녀 말이다.
우선 <터널>의 배두나 연기 중 가장 신파적 요소가 진하고 감정의 파고가 높았던 순간은 극 후반부의 라디오 방송씬이다. 터널 구조작업에 난항을 겪던 정부는 현실적인 문제로 터널에 고립된 정수(하정우)의 구조를 포기하기에 이르고, 아내인 세현(배두나)은 이 충격적인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터널 안 자동차 속 정수에게 전하게 된다. 설정 자체만으로도 슬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장면. 남편의 구조 포기 소식을 눈물로 전하는 아내의 모습이 담긴 이 씬은 자칫 잘못하면 지나친 신파의 늪으로 빠져들기 쉬운 장면이기도 했다. 보통의 일반적인 연출과 연기라면 라디오 방송으로 구조 포기 소식을 전하던 도중, "오빠 미안해.. 오빠 내가 미안해.."라며 오열을 터뜨리며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려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배두나는 캐릭터의 감정을 가감 없이 폭발시키는 대신에, 꾹꾹 눌러 담은 절절한 태도로 온전히 그 순간의 공기를 짙은 현실로 무겁게 끌어내린다.
<히말라야>의 정유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무택 대원(정우)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히말라야 등반에 나선 엄홍길(황정민)의 휴먼원정대는 천신만고 끝에 박대원의 시신을 찾아냈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시신을 산 밑 캠프로 끌고 내려오지 못할 상황에 처한다. 결국 돌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산 중턱에 묻기로 결정하던 순간의 무전 대화씬이 이 영화의 절정인데, 이 클라이맥스 씬에서 정유미는 산 속 구조대원들의 신파 연기와 대비되는 절제된 감정 연기로 극의 무게 중심을 적절히 지탱해준다. 캠프에 남아있던 아내 수영(정유미)은 엄대장과 무전을 주고받으며 "오빠가, 산을 떠나고 싶지 않은가봐요."라고 말한다. 다른 대원들까지 더 위험해지기 전에 남편의 시신 운반을 그만 중단해달라는 뜻. 이 장면에서 정유미가 내뱉는 대사는 분명 신파적이었지만, 그녀의 연기만큼은 신파적이지 않았다. 이 점이 내겐 인상깊었다. 뭐랄까.. 배우 배두나와 정유미, 이 둘에게는 신파적인 상황을 신파적이지 않게 만드는 묘한 매력과 힘이 있다. 신파의 덫을 이겨내는 배우로서의 공통적인 느낌말이다.
작은 몸짓이 주는 커다란 울림
[허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열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대해 별 관심이 없어요. 단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만 집중해요. 열연을 하며 전부 설명하면 좋은데, 관객들이 내 연기를 보면서 상상하게 하는 것이 더 재밌어요. 지금 캐릭터의 감정이 어떤지 궁금하게 만들고 싶어요. 그것이 내 자신이 원하는 연기의 방향이고요. 정말 슬프면, 펑펑 눈물로 슬픔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지만 오히려 울음을 참아요. 그러곤 관객에게 '상상하세요', 이런 방식이죠. 건방져요. 그래서 예전부터 ‘불친절한 배우’라고 설명해왔고요. 연기가 마음과 기술이라면, 기술에 초점을 두지 않았어요. 지금도 상대의 연기에 따라 내 연기가 달라지기도 해요. 단독 샷에서, 상대 배우에게 앞에 서달라고 부탁해요. 가끔 창피하죠. 기술은 앞으로 더 배워야겠죠.] (SURE, 서른셋 두나의 겨울 中)
우선 연기의 테크닉 또는 연기 내공의 차원에서 짚어보자면, 이 둘의 공통점은 절제하고 비워낼 줄 안다는 점이다. 신파라는 것은 때로는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리하게 연출되기 쉽고, 무리한 연출에는 과잉의 연기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격정의 순간에도 배두나와 정유미는 본인의 감정선을 함부로 터뜨리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오히려 반대로 무언가를 덜어낼 줄도 안다. 구조작업의 실수로 굴착 지점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터널 속 정수가 이성의 끈을 놓치고 더 이상 못 버티겠다며 삶을 포기하려하자 그와 통화하던 세현(배두나)은 "차라리 죽으라"며 화를 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감정의 밀도를 무겁고 단단하게 응축시킨다. 절정의 순간에 끝까지 치달아 모든 걸 터뜨리지 않고 오히려 눌러 담으며 관객들을 스크린 쪽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그녀만의 매력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면모는 정유미도 마찬가지여서, 남편인 박무택 대원의 장례식장에서 엄대장을 만난 그녀는 "대장님이 은퇴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우리 오빠 다른데서 대장한다 그러지도 않았을 텐데.."라며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킨다. 엄대장을 부여잡고 맘 놓고 통곡하고 감정을 터뜨릴만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아픔을 삼키는 연기로 진한 슬픔의 감정을 전달한다. 이것은 감독의 연출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배우 본인이 스스로의 감정에 따라 선택한 그 순간의 본능적인 판단이기도 할 것이다. 때로는 작은 연기가, 더 큰 울림을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두 배우는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연기를 대하는 그녀들의 자세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는 배우의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갑자기 임팩트 있게 나오거나 일약스타가 됐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많이 받는 것 같아 오히려 그게 부담은 없더라고요. 여배우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아직 저한테는 거창한 표현이에요. 그저 직업이 배우일 뿐인 거죠. 각자 자리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슈 데일리, '부산행' 정유미 - '히말라야' 얘기에 눈물 흘리는 소박한 배우 中)
[머리를 안 쓰는 것도 너무 좋아요. 재는 게 없는 것도 너무 좋고요. 일을 하면서 여러 관계에 대해 계산할 수밖에 없는데. 선균 오빠도 그렇고,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계속 출연하는 분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ARENA, 유미의 사연 中)
두 번째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녀들이 보여주는 '배우로서의 자세'다. 주어진 배역과 연기 상황을 대하는 태도 말이다. 이러한 자세 부분에서 이 둘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남들보다 돋보이려는 욕심이 없다는 점, 그리고 계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파라는 것은 결국 감동을 유발하는 순간이고, 슬픔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는 클로즈업할 수밖에 없고, 배우의 존재감은 자연스레 돋보이게 마련이다. 이 순간에 관객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위해 약간이라도 욕심을 부릴 것이냐, 아니면 무언가를 내려놓을 것이냐는 어쩌면 배우 자신의 본능적인 선택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녀들이 프레임 안에서 스스로 돋보이려고 애를 쓰고 욕심 부리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극 중 캐릭터의 감정이 가장 최고조로 치닫는 배두나의 '라디오 방송씬'과 정유미의 '히말라야 무전씬'마저도 그랬다. 분명 대사 자체는 감동과 신파가 뒤섞여있고 상황은 무척이나 절절하고 가슴 아픈데, 그녀들의 연기에는 관객을 반드시 울리고야 말겠다는 어떤 집념이나 의도가 보이질 않았다. 복잡한 계산과 잡념을 치워버리고 순수하게 본인이 맡은 배역과 주어진 상황에만 몰두하는 집중력과 순수한 자세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작위적인 의도와 욕심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들의 연기는 오히려 더 현실적일 수 있었고, 더욱 관객들의 마음속에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배두나와 정유미는 얄팍하게 연기하지 않아서 좋다. 잔머리 쓰지 않고, 계산하지 않으며 본인의 역량 내에서 진솔한 태도로 몰입하고 몰두해내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있다. 결국 이러한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배두나, 정유미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고유한 성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정말 카메라 밖에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같다. 그리하여 좋은 연기는 눈속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멋지게 입증해낸다.